비가 아스라이 내리던 오후, 난민 A씨를 만났다. 젖은 비 사이로 시작된 우리의 첫 만남은 각자가 지나왔던 과거의 시간만큼이나 새롭고 낯선 것이었다. 그녀는 내가 만나왔던 여느 방글라데시의 소녀들처럼 으레 낯을 가리더니 금세 제 나이 또래의 발랄함을 되찾았다.
우리가 만나게 된 것은 그녀의 재판을 위해서였다. 나는 며칠 전 변호사 사무실에서 부터 급하게 통역 요청을 받아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법원에 도착하였을 때 통역인의 이름이 바뀌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법원의 실수로 통역인이 2명이나 섭외가 되어버린 것이다.
“안녕하세요”
우리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또 다른 통역인은 훨씬 키가 큰 사람이었다. 깔끔한 수트를 차려 입고 온 그에게서 중년의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한편으로 안도했다. 오히려 나보다는 많은 법원 통역 경험을 가졌을 그였기에 더 나은 통역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짧았던 생각과는 달리, 그녀는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해 보였다. 지금 그녀의 주변에서 펼쳐지는 모든 상황이 그녀에게는 낯설고 두려운 것들이었으리라.
문득 수년 전, 방글라데시에서 겪었던 일화가 떠올랐다. 그 당시 나는 직업훈련학교를 방문하여 앞으로 함께 일하게 될 선생님과 첫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앗살라무 알라이꿈(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
아직은 어색한 이슬람식 인사와 함께 그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조용하고 정중하게 나의 악수를 거절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이곳은 이슬람 문화가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방글라데시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만큼 방글라데시의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낯선 남성과 여성의 만남은 보수적이다 못해 엄격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내가 그곳에서 깨달았던 심리적 거리만큼이나 그녀가 지금 이 순간 남성 통역인과의 사이에서 느끼고 있을 압박감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은 진행된다.
사건번호 *****
그렇게 재판은 시작되었다.
젖은 오후만큼이나 무거웠던 법정의 공기, 그리고 권위적으로 보이는 전문가들 속에서 그녀는 오랫동안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몰라 했다. 특히 통역인과의 대화에서 통역인의 눈을 계속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 그녀의 심리적 위압감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충분히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방청석에까지 전해져 오던 불안은 어린 그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워 보였다.
그녀는 변호사의 질문에 따라 어쩌면 그녀의 삶 속에서 떠올리고 싶지 않았을 순간들을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 과정에 있어 통역인의 자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통역인은 그들의 입이 되어야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화가 났다. 통역인은 이따금 A씨가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다그치는 듯 이야기 하는 것 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분명 이슬람 문화권에 있었던 그녀에게 더 큰 압박감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진술자가 ‘난민’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 통역인이라면 그런 태도를 피해야 하지 않는가? 통역인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통역인은 A씨의 말이 길어질 때 그녀의 말을 먼저 끊어버렸다. 통역의 효율을 위해 그러한 조치를 취한 것은 적절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통역인은 그 다음 진술을 위한 기회를 일방적으로 차단하는 듯 보였다. 그녀는 말의 흐름을 타의에 의해 여러 번 놓쳐버렸다. 무언의 제재가 가해지고 있는 듯 했다. 그녀는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아요.’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더 이상 말할 기회를 부여 받지 못했다. 충분한 진술의 기회를 일방적으로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마침내 통역인은 나의 분노에 결정타를 날렸다. 그는 치명적인 오역을 하였다. 그럼으로써 재판장이 그녀의 진술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녀의 진술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질문들이 이어졌다. A양의 입장에서는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A씨의 진술에 신뢰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법정소란 죄로 퇴정 조치를 받게 되더라도 할 말은 해야 했다. 그래서 방청석에 앉아 오역된 부분을 정정했다.
결국 법정 소란으로 지적받지는 않았지만, 분명 이것은 A씨에게 있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단 한 번의 오역으로 삽시간에 A씨는 재판장에서 고립되어갔다.
난민신청자들 가운데 자신의 박해 상황과 관련하여 서면으로 된 증거나 증인을 통하여 그 주장 사실을 증명하는 사례는 실제로 매우 드물고, 그러한 연유로 난민의 지위를 부여할지 여부는 국적국의 정황에 관한 자료 외에 난민신청자 본인의 진술에 의하여 판가름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우리말을 잘하지 못하는 난민신청자 본인의 박해 상황에 대한 진술을 듣고 그 진술의 일관성이나 신뢰성을 제대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통역이 필수적이다. |
진술의 일관성과 신뢰성이 중요한 난민 재판의 경우 통역의 역할은 더더욱 강조된다. 법정 안에서는 오로지 통역인만이 난민의 언어를 이해하고 전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통역인의 실수는 난민의 실수가 되기 쉬운 구조에 놓여있는 것이다. 통역인은 진술의 진실여부와는 상관없이, 그 어떤 생략과 추가 없이, 진술자의 언어를 정확히 전달하는 데 그 목적을 두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난민의 입술이, 참석자들의 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통역, 언어의 벽을 넘어야 할 존재
분노로 까맣게 태워버린 방청석에 앉아 생각했다.
'어떻게 진술의 신뢰성이 중요한 이 재판에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오역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 된 것인가?'
법원에서는 주로 통역인을 선발 할 때 관련 학위를 취득하거나 법적 지식 및 기존 통역의 경험이 있는 자들을 위주로 선발을 한다. 그러나 희귀 언어와 같은 경우 통역인의 자질을 어떻게 객관적으로 입증하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인가? 심사자가 해당 언어를 구사할 수 없다면, 통역의 질에 대해 객관적으로 심사할 수 있는 자격은 자연히 소멸되는 것이 아닌가?
또한 통역인은 난민재판에 있어 중요한 근거가 되는 그들의 진술을 그 어떠한 장벽 없이 전달 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사자는 통역인을 선발하는 절차에 있어 진술자의 성별, 종교, 정치, 문화, 심리적인 배경을 반드시 고려해야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폭행을 당한 여성 난민같은 경우는 남성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고, 심리적인 불안이 잠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상황에서 통역인이 남성이라면 어떻게 자신의 박해 사항을 다 이야기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스위스의 사례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난민판정절차에서 난민신청자에게 당국에서 제공하는 통역인이 아니라 스스로 통역인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한다‘ - 스위스 난민법 제 16조 |
스위스는 법적으로 난민 스스로가 통역인을 선정할 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써 ‘충분한 진술’을 보장하고 있다. 난민 스스로 통역인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은, 통역인의 자질 검증 뿐만이 아니라 난민 자신의 심리적 안정감을 위해서도 큰 배려가 되는 것이다.
난민재판에서의 통역인은 정확한 언어 구사능력 이상으로 난민의 충분한 진술을 전달 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어야만 한다. 그런 매개체의 역할을 해야하는 자가 난민에게 심리적 위압과 불안을 조성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아니된다. 본국에서의 박해를 피해 자신의 권리를 찾고자 한국으로온 온 난민들의 진술을 이런 어처구니 없는 과정으로 오해하거나 빼았을 수 없는 것이다.
법무부는 지난달 통역인의 인력풀 확충을 위해 예전보다 더 많은 통역인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인력을 늘리는 것 만큼, 아니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통역의 질과 더불어 통역인 스스로가 그 문화에 대한 높은 이해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분명하고 객관적인 검증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선정절차에 있어 진술자의 배경을 충분히 고려해야만 앞으로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다시는 제 3의, 제 4의 A씨가 없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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