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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Activities

짱의 꿍꿍이 엿보기...maesot, '난민' 아닌 '사람' 사는 이야기

뭣보다 대자연의 냄새, 버마인들의 열정의 땀냄새, 아이들의 순수한 향기를 맡고 돌아온 그 길에서...
작정하면 풀어놓을 보따리가 얼마나 많겠냐마는 감칠맛나는 사진과 함께(감칠맛 안나도 할 수 없구요) 살짝 살짝씩만 열어 보도록 한다. 
버마의 정치적 상황이라든지 maesot(방콕도 포함하여) 난민분들의 환경이 얼마나 열악한지에 관하여는 앞서와 같이 두 말 할 필요도 없는 실태였지만, 나는 '난민'이기 이전에 한 명의 '사람'으로서 한 가정에서, 한 마을에서, 한 민족의 구성원으로 나아가 태국이란 타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 더 초점을 두고 만나보고 싶었다. '일단 살아있는 이상 눈뜨면 또 내일'이란 현실속에서 우선은 오늘도 최선으로 살고자 애쓰는 그 모습과 목소리가 내겐 뭣보다 사무쳤고 또 한번 값진 배움이었던 것 같다. 

사람 사는 이야기. 결국 내가 본 이야기는 짧지만 그것이었다.
그래서 이번 장에서는 주로 그들의 풍경, 태국-버마의 문화, 아이들을 "좇다 건진 짧은 수다" 라 생각하자. 말 그대로 좇다 말았다. 리서치하기엔 짧은 기간도 그러했지만, 이러한 범주로 접근하기엔 현지의 정보와 스케줄은 지극히 한계적이었다.
고로 이렇게 나의 꿍꿍이는 아쉬운대로 그저 엿보기로서 서문을 열기로 한다. 
 



물 위의 사람들



물고기와 노는 아이들                               물고기를 잡는 어른


같은 물을 바라보고도 서로 다른 어른과 아이의 생각.

정말 재밌게도 다리 위 왼편에서는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고, 오른편에는 이렇게 마냥 사냥의 때를 기다리는 어른이 내 양 옆으로 동시에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물 항아리



태국의 물항아리는 집집마다 혹은 마을의 공동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물항아리는 여자들이 결혼을 할때 준비하는 중요한 혼수품이기도 하며, 신년 혹은 행운을 위해서 새 물을 담아놓는 용도로도 쓰이고 있다. 허나, 길가다가 누구나 물 한잔씩 떠먹도록 하는 보다 실용적인 점이 더 마음에 드는 점이다. 
물을 통한 배려와 따뜻함이 엿보이지 않은가?



원숭이 목각인형

물항아리에 매달린 목각 원숭이.
원숭이는 상징적 의미다. '한우만'이라는 태국신화에서 원숭이는 정의의 신, 용기의 신을 상징하고 있는데, 그 밖에도 원숭이는 티벳이나 중국, 아프리카, 로마의 신화에서도 지혜와 용기의 의미를 담고 있어서, 태국에서는 그 모든 것이 수호적인 동물로 원숭이가 사랑받을 만한 이유였다.   

대문의 차이


MAE TAO CLINIC




검진받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아무리 예약에 맞춰 오더라도 기본 1시간을 기다리는 것도 양호한 편이다.


응급실 & 임산부/영아 대기실

응급한 환자들이 간이침대에 누워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혼잡한 방.
그리고 소아과 옆에 붙어있는 수유 및 영아보호방으로 이곳에서는 주로 임산부나 어린 영아들이 쉬면서 차례를 기다리는 방.
이때 애띠어 보이지만 이미 아이가 셋이라는 예쁜 부인과 (영어-버마어 통역을 통해) 나눈 이야기.
"가족 누구하나 아프면 정말 큰일이예요. 하루 종일 병원에 와서 아무 일도 못하고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생계가 힘들어요. 오늘은 막내가 아파서 왔는데 검사 받아보니 목이 좀 안좋다네요. 간단한 약 처방만 받았을 뿐인데....오늘 일을 못하게 됐어요. 그래도 다행히 큰 병이 아니라 안심이긴 하지만...그런데 지금 제가 또 넷째아이를 임신 중이어서...정말 앞이 캄캄합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도 올바른 피임교육은 권장해야 하지 않을까 심각하게 생각 든 구절이었다.)

그 옆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려는지 심한 고통에 절규하는 산모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다만 남편만 옆에서 함께 배 마사지를 해주고 있을 뿐. 
나 역시 잠시 도와 그들과 함께 있긴 했지만...딱히 내가 힘이 될 수 없어 애만 탔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진땀나게 한다.
 



여기서 잠시 딴 생각~!
퍼뜩~ 저 승려의 존재감이 심히 궁금해졌더랬다.

태국과 버마는 불교의 성행에 따라 승려에 대한 공경도 매우 큰 편이다. 특히 태국에서의 승려란 노약자와 임산부, 어린이와 동급의 보호대상이기도 하다.  
1. 저 스님은 환자들을 위해 기도를 해주러 거니는 걸까 아님 환자인 걸까?
2. 만약 스님도 환자라면 역시 또 우대의 대상이 되는가? 그렇다면 이 기다림의 순서에서도 우선 순위가 되는 게 아닌지...
미처 알아보지 못한 의문점이었다. ^^;


꽃꽂이하는 소녀



꽃장식 만큼이나 너무 예쁜 소녀.
그 눈빛은 이미 풍부한 꿈들을 담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꽃장식 놀이로만 끝나지 않을 것을 안다.
소녀는 이렇게 실력을 쌓아간 후엔, 결국 직접 자신이 만든 꽃장식을 팔아 생계벌이를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소녀에겐 먼 미래의 일로 부쳐두자.


Umpiem의 인형과 콘야(희망과 절망)



비약이라고?
인형을 갖고 노는 소녀와 콘야를 수시로 찾는 청년들이 대조되었다.
소녀의 손에 나중엔 인형대신 콘야가 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바로 이렇게..!!
순수한 이해를 위하여 시도해봤음을 밝혀드립니다.



Umpieum 사람들 이야기





집의 양식은 대체적으로 마른 나뭇잎으로 안을 대고 마른 짚으로 밖을 덧대어 덮었으나 그 기둥과 벽면의 구조에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수부족별로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대체로 카렌족이 많기 때문에 카렌족의 주거형태가 주를 이룬다 할 수 있겠다. 확실히 버마인들도 전형적인 농경문화를 이어왔다는 게 이런 면에서 드러난다. 짚을 이용해 엮어 지붕과 울타리를 만들고 때론 태워서 해충을 방지한다. 마른 짚들조차 버릴데 없이 쓰임새가 좋다.
(여담인데 좀 더 함께 지내면서 한국의 짚 문화와 비교하고 그들의 엉키기 기술을 좀 더 알아보고 싶은 충동도 가까스로 참았다는...)








1. 벽면은 크게 판자식 형태와 얼기설기 형태로 구분되었다. (추가 보충 필요)
2. 문양은 원, 삼각형 따위의 각종 도형을 규칙적으로 배열한 무늬를 사용한 기하학 양식(기원전 9세기~기원전 8세기 무렵 그리스 미술에서 발달하였던 양식)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건물의 구조 역시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1. 복층 식 구조 - 주거 공간
2. 단층 식 구조 - 공공시설(종교시설, 학교 포함) 및 상가 등



물레방아의 수력을 이용해 마을 곳곳에서 활용하고 있다.

 




여기저기 풀어놓은 가축들을 볼 수 있는데, 대개의 가축들은 우리에 가두거나 묶어두는 편이지만 닭의 경우는 예외였다. 개처럼 집을 잘 찾아 돌아올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면 대체 닭들은 어떻게 관리하는 것일까? 그래서 든 궁금증.

공동소유인 것일까 개인소유일까?
그러나 농경문화가 강한 사회일수록 책임과 분담, 소유권에 대해서도 더욱 엄격한 편.
움피엠 난민분 왈
"닭의 경우는 재밌어요. 우선 묶어두고 며칠째-한 3일 간-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반복 학습을 시키는 거죠. 그러다보면 어느순간 자연스럽게 본능적으로 제 집을 알고 밤에는 찾아오더라고요."


umpiem 사람들의 주식 중 하나, 육포
냉장시설이 없지만 지대가 높아 일교차가 큰 덕에 반건조 보관이 가능하다.





의복...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추위 때문에 두꺼운 옷은 필수였고, 그렇기에 낮시간이 유일한 건조시간이 될 수 있다.
또한 방한복보다는 여러겹을 겹쳐입거나 되물림 입는 옷들이므로 살균은 필수였다.


외부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지역도 아닌만큼 전통을 중시하는 이들 버마출신의  각 소수민족 난민들은 본인들의 의류나 생필품을 위해 사고 팔았다. 또한 대개는 카렌족의 전통복들이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수공예품이 아니다. 수공예품에 예리한 내 눈썰미도 그것들이 청바지나 다른 공산품들과 별다르지 않게 유통되어 판매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여긴다.
(본래 카렌족 여성의 직물을 다루는 능력은 매우 뛰어나기로 유명한 데, 집에서 그런 가내수공업을 하기에는 이곳 난민촌에서는 생계로 보장되지 못하는 한 지속이 힘들기 때문이다. 다만 카렌족 남성의 바구니 등을 만드는 능력은 집 짓기 등 여러모로 움피엠 형성에 밑받침되고 있었다.)
이처럼 외부와 단절된 고립지역일 수록, 공급은 어려운데 수요자가 끊임없이 발생될 수록, 자활할 수 있는 생산능력이 절실해진다. 충분히 능력이 있는 그들이 제 민족의 전통 수공예 기법도 제대로 전수하지 못하는 가운데 공산품에 의존하고 있는 모습은 움피엠의 장기화에도 분명 치명적일 수 있었다. 
 
 





사람은 그 처해진 상황이 절박하고 힘들수록 더욱 신앙에 절실해지게 된다. 이들 내에서 종교란 그것이 무엇이냐보다는 그렇게 결합하고 완화해주는 차원에서 이슬람과 불교, 기독교가 서로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또한 자연스럽게 각 종교를 중심으로 움피엠 촌락 내에서도 또다시 단위별 분류가 이뤄지고 있었다. 그래서 다들 닭장처럼 모여있었지만 집집마다 번지수로도 뚜렷하게 구별되고 있다.

여기서 잠깐~ 다른 생각!


이렇게 석가모니도와 나란한 포스로 걸린 축구 포스터들을 보며,
잠시 종교와 스포츠의 역할을 생각하게 된다. 외부와 단절된 이곳에서는 어쩌면 바깥의 소식들과 뉴스들이 종교의 그것만큼이나 중독성있고 절대적일 수 있겠단 생각을 들게 해준 묘한 배치였다.



움피엠 아이들의 놀이



'고무줄 따먹기' 놀이
도구는 다르지만 우리의 딱지치기와 비슷한 방식. 고무줄을 땅에 놓고, 다른 고무줄을 불어서 상대의 고무줄을 뒤집거나 엎게 되면 따먹는 아이들 놀이. 주로 남자아이들이 많이 하는 놀이로, 움피엠 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놀이였다.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보다 대체적으로 소유욕이 강하다. 그래서 옛부터 치기··먹기·등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오는 놀이를 더 좋아해왔다. 한국의 딱지치기를 비롯하여 ‘구슬치기’ ‘동그란 딱지 따먹기’ ‘돈치기’ 등도 그것인데, 놀이는 사회구조를 재생산하는데 기여하기도 한다.


'긴줄넘기' 놀이
노래에 맞추어 줄을 뛰어넘는 놀이. 혼자 하는 것은 ‘줄넘기’, 두 명이 줄을 돌리고 그 안에서 뛰는 것을 ‘긴줄넘기’라고 하는데,  놀이뿐 아니라 운동으로도 활용되고 있고, 전세계에서 많이 하는 놀이 가운데 하나이다.

문헌자료가 없기 때문에 줄넘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아주 오래 전부터 줄이 생활에 이용된 것으로 보아, 줄넘기의 기원도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옛날에는 물건을 묶거나 잡아맬 때 볏짚으로 꼰 새끼를 이용하였다. 버마의 경우도 다르지 않은데, 그러나 긴줄넘기는 동양보다는 서양에서 더욱 발전한 놀이이다. 서양에서는 줄을 두 개 가지고 돌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 재주를 부리기도 한다.
(한국의 경우, 최영년(崔永年)의 《해동죽지(海東竹枝)》에 의하면, 줄넘기는 새끼줄을 잡고 뛴다고 하여 ‘도색희(蹈索戱)’라고도 하였다. 그 내용에 “조선시대 조중봉(趙重峰)이 어린이들로 하여금 이 놀이를 하게 하여, 다리 힘을 기르고 각기병(脚氣病)을 없어지게 하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다나카



얼굴에 저건 '다나카'라고 부른다. 버마인들이 주로 바르고 다니는 다나카는 다나카나무 가루를 물에 개어서 얼굴에 바르는 것으로, 흰 피부를 지향하는 화장효과, 자외선 차단, 피부에 좋은 이유 등 여러가지 장점을 갖고 있다. 나 역시 maesot에 온 첫날부터 줄곧 바르고 다녔다.




쓰레기 산에 사는 아이들과 러이 끄라통 (Loi Krathong, 등불축제) jok을 나눠먹으며...




마침 태국의 대표적 전통 축제인 러이 끄라통 (Loi Krathong, 등불축제) 날, 쓰레기산을 방문해 아이들과 나눠먹은 jok은
이번 답사 중 잊을 수 없는 최고의 맛이었다. 버마 난민이자 쓰레기산의 주민인 이들도 그날은 축제 준비에 한창이었는데, 그날 밤 함께 축제의 끝을 보내지 못한 건 꼭 다음 기회로 함께 하고 싶다.

이렇게 사진을 정리하며 다시 또 느끼는 건, 우리는 난민 캠프와 난민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들을 만나러 떠났던 것이었지만, 사실 이번의 캠프는 이미 정주되어진 마을이었고 난민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들 중엔 태국인들 사이로 흡수되어(비록 그것이 세상의 소외되고 빈곤한 쪽이라 할지라도) 저들만의 새로운 문화체계를 형성해가는 이들도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면에서 그들이 지금 만들어가고 있는 그 그림들은 결국은 지금의 아이들 혹은 미래의 후손들에게 남겨질 면이라는 데서 오는 중요성 만큼이나, 또 한편으로는 그들끼리의 소통과 이해를 위해서도 중요하게 인식되어져야 했다. 

가령 캠프가 실은 마을이 되었고, 겉에서는 하나로만 비춰지는 버마 난민촌이 실은 촌락 내에서도 5개의 민족과 종교로 혼합된 형태더라라는 것을 페이퍼보다 현장을 통해 더욱 실감할 수 있었듯, 우리가 그들을 '난민' 대상자로서만이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고 역동하기를 꿈꾸는 또 한 명의 사람으로서 더 이해하고 다가가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충분히 다각적인 차원에서의 이해와 노력, 지속된 만남이 병행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본 내용은 편집. 기사화 하여 오마이뉴스에 동시 게재되었습니다.>
기사 전문 보기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91611&PAGE_C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