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활동 Activities

[법무부장관님께] 10. 안녕하세요, 이상아입니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님께,

 

안녕하세요?
저는 코트디부아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고 지금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이상아라고 합니다.

 

아프리카 서부에 위치한 코트디부아르(Cote d'Ivoire)에는 제가 17살이 된 해였던 2011년에 내전이 발생하였습니다.
긴 기간의 시위로 긴장감이 맴돌고 있던 상황에서 내전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었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던 날이었습니다.
밖에서 시위자들이 떼창을 하며 행진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학교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학교 지하실로 대피하였고
시위자들의 떼창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된 후에야
부모가 방문하는 대로 학생들은 학교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곧 저를 찾으러 오셨고, 집으로 가는 도로에는 피로 둘러싼 시체 몇 구가 덩그러니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것들을 피해 조심히 운전해야 하였습니다.
그날 저녁에는 총소리가 끊임없이 들렸고 부모님과 저는 안방구석에서 공포에 떨며 밤을 지새웠습니다.
다음 날 저는 한국으로 피난 올 수 있었으나
분쟁국에서 비행기의 수는 극히 제한적이었기에 부모님은 끝내 빠져나오지 못하였습니다.
한국에서 피난 생활을 하면서 저는 몇 개월간 부모님과 통화할 수 없었습니다.
제 부모님의 집은 반란군의 기지가 위치한 곳과 매우 가까웠으므로
부모님은 집에 아무도 없듯 숨죽여 지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동네에서 반란군은 무고한 민간인들을 길 한복판에 잡아서
그들이 저항할 힘조차 없을 때까지 팬 후 불태워 죽였습니다.
제 부모님을 포함하여 내전 기간에 코트디부아르에 남았던 한인 분들은
아직도 내전의 후유증으로 우울증, 불안감 등을 앓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던 그 기간에 제가 느낀 공포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장관님께 내전을 목도한 제 경험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리는 이유는
분쟁, 폭력, 박해를 피해 피난길에 올라 한국을 찾아온 난민들이
얼마나 취약한 상황에 놓여진 사람들인지 말씀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폭력 속에서 경험한 공포와 생명의 위협은 한 개인을 상당히 취약하게 만듭니다.
당시 저와 제 부모님은 심적으로 매우 취약한 상태였습니다.

 

만약 제가 한국인이 아닌, 코트디부아르 사람으로 태어났더라면,
그래서 2011년 당시 코트디부아르인으로서 난민신청을 하러 한국에 온 것이었더라면
과연 저는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요? 제 부모님이 코트디부아르 사람이었다면요?
저와 제 부모님 모두 한국에서 난민으로 보호받을 수 있었을까요?

 

코트디부아르인으로 한국에 왔더라면 저와 제 부모님은 당연히, 당연히 난민입니다.
왜냐하면 코트디부아르에서 저와 제 부모님은 도로 위에 시체로 발견된 사람들,
길 한복판에 불에 타 죽은 사람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할 위험에 처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난민제도를 통해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난민인 이유 하나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는 "한국식의 난민 정의"가 있고, 그것을 평가하는 "시험"이 있고,
그 시험에 "만점"을 받은 자만이 "진정한 난민"으로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한국의 난민인정률은 3~4% 미만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주 예멘 난민 신청자 중 겨우 0.4%만이 난민 지위를 얻었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하여 만점에 가까운 대학입학 시험을 치르고 입학하게 되는 명문대의 합격률보다 더 낮은 수준입니다.

 

삶이 산산조각이 난 난민들에게 시험지에 만점을 요구하는 것은 참으로 가혹한 일입니다.
제가 코트디부아르 사람으로 태어나 그때의 상태로 난민신청을 했더라면,
한국이 내미는 "난민시험지"에 100점을 맞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저는 "가짜난민"이라고 정의되었겠죠. 난민이 아니라서 그랬을까요?

 

대한민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수많은 난민이 난민으로 인정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가짜 난민" 혹은 장관님께서 사용하신 용어를 이용하여, "허위 난민신청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아직 난민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난민들에게 "가짜 난민"의 딱지를 붙여 쫓겨 낼 것이 아닙니다.
난민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부족함을 깨닫고
문제를 최선의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선진국가로 성장해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전, 폭력, 박해를 피해 온 난민들에게 대한민국은 그들이 머무는 수 개월간 햄버거와 콜라만을 제공합니다.*
대한민국에서 받은 비인간적인 대우로 호주에서 난민 인정을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난민제도는 국제적인 인권 기준에 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실상입니다.
그러나 난민법 개정을 두고 국회의원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충격 그 자체입니다.
난민에 대한 지원이 코딱지만 한 상황에서 이것마저 아깝다고, 한국의 주권을 크게 제한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난민신청을 재외공관에서만 받자고 우기며 아예 난민협약의 탈퇴를 돌려 말하는 의원도 있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이라고 하는 걸 듣자니 답답하고 화가 납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취약한 사람들을 홀대하는 방법으로만이 보호될 수 있는 건가요?
이것이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인지요.

 

"주권"이라는 이름으로 외국인과 난민에 대한 비합리적인 대우를 정당화하려는 행위.
그것은 주권을 보호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종차별입니다. 그 누구도 자부할 수 없는 못난 행위입니다.

 

현재 한국의 난민법은 난민들을 다루는, 사람을 다루는 법으로 개정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주권도 당연히 지켜야 합니다.
그것을 훼손하면서까지 난민 보호에 뛰어드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겠죠.
그러나 대한민국의 주권을 그렇게 잔인한 방식으로 많이 지켜질 수밖에 없다고 단정을 짓고
난민을 배척하는 방안으로는 절대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제가 장관님께 온 맘 다해 요청드리는 바는
진짜난민과 가짜난민을 더 철저하게 가리는 거짓말 탐지기와 같은 능력을 키우시는 것이 아닌
대한민국이 난민을 받아들일 역량을 갖추도록 온 힘을 다해 힘써주시는 것입니다.

 

더 기계적이고 더 방어적인 난민법 개정이 아닌,
사람이 중심이 되는 난민법 개정이 이뤄지도록 힘써주세요.
난민들은 장관님이나 저나, 대한민국의 시민이 어쩌면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끔찍한 공포감을 이겨내며 살아가야 하는 취약한 사람들입니다.
장관님, 난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정직한 난민제도가 성립되도록 최선을 다하여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 편지를 적으며 2011년 아버지가 시체들을 피해가며 운전하셨던 자동차 안에서
공포감에 떨었던 그 날을 다시금 떠올려봅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한국의 문을 두드리는 난민들의 심정을 상상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을 향하는 한국 사회의 혐오의 손가락질과 차가운 면접 분위기도 머리를 스칩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난민들에게 또 다른 공포의 대상이 아닌,
그들의 지친 마음을 조금이나마 토닥여 줄 수 있는 따듯한 안식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9년 4월 17일
이상아 올림

 

 

*공항만에서 난민신청의 의사를 밝히고 불회부(거절)결정을 받은 신청자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한국에 입국하지도 못한 채 송환대기실 또는 공항 탑승동에서 숙식제공없이 수개월을 보냅니다. 송환대기실에 사실상 구금하고 '햄버거와 콜라'만을 끼니로 제공하던 관행은 책임주체없이 탑승동에서 지내야 하는 상황으로 바뀌었고, 그 열악함은 변함이 없습니다. _난센주

 

 

 


 

최근 법무부장관은 난민제도 '악용을 막는' 난민법 개정을 발표했고 입법예고를 앞두고 있습니다. 난센은 난민 정책의 근본적인 방향 설정 없이 난민신청자들의 권리만을 제한하는 법무부의 개정안에 반대합니다. '난민에게도 사람으로서의 권리가 있다'는 난민법의 애초 의도가 훼손되지 않도록, 시민분들과 <법무부장관에게 편지쓰기> 캠페인을 진행합니다.

 

약 한달간 시민분들의 편지가 법무부장관께 도착합니다. 매일매일 보내지는 편지를 난센 홈페이지와 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 이 캠페인에 함께 참여하고자 하시는 분은 refucenter@gmail.com으로 문의주세요.

 

 

 

난민인권센터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