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여름 난민인권강좌] 종교문제와 난민 / 김동문 목사
난민인권센터의 [2014 여름 난민인권강좌] 는 ‘난민, 그리고 나’ 의 주제로 7월 5일, 12일 진행된다. 강좌의 첫날인 지난 5일, 나들목교회, 인터서브 선교회의 김동문 목사를 초청하여 종교 문제와 난민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 교과서에 난민의 의미와 일상에서 만나는 난민 사이에 온도차이
저는 1990년대 이집트에서 걸프전쟁을 겪었고 시간이 흘러 2003년에는 이라크 전쟁을, 그 외에 중동지역에서 여러 분쟁을 겪었습니다. 이라크, 요르단, 이집트 난민, 그리고 이집트의 수많은 수단 난민들을 만나면서 교과서적인 난민의 개념은 알지 못했지만 어떤 사람들이 난민인지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교과서적인 난민의 의미와 일상에서 제가 만나는 난민 사이에는 온도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가령 예를 들면 이라크 땅을 벗어났던 사람들이 요르단에서 난민지위를 받지 못하고 돌파구를 찾아서 유럽으로 많이 이동을 했었는데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밀입국을 해야 했었습니다. 그 속에 개입된 브로커들의 활동들, 중간에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 심지어 한 가족이 5개국으로 흩어져야 했던 수많은 사연들, 난민을 받아주는 나라의 상황에 따라서 어느 나라에서는 난민을 더 잘 받아준다더라 소문이 돌면 그쪽으로 몰리는 현실을 보면서 교과서적인 난민의 개념은 몰랐지만 난민 지위를 찾아서 헤매는 난민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죠.
■ 하나의 그림으로 말할 수 없는 여러 상태들의 존재
두 가지 사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이 발발했을 때 요르단 정부는 이라크와 접경지역에 큰 규모의 난민촌을 개설하였습니다. 많은 난민이 발생할 것을 예측했던 것이죠. 그러나 이 난민촌은 거의 개점휴업 상태가 되었습니다. 국내 난민들은 수 없이 발생했지만 밖으로 나온 난민들은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전해 2002년 한국 봉고 스타일의 차가 이라크로 많이 들어갔습니다. 그것이 이라크인들의 전쟁 대비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그 반면, 시리아의 상황은 아주 다릅니다. 통계마다 정확하지 않지만 레바논에는 150만 명이 요르단에는 60~80만, 전체적으로 350만 정도의 국외난민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같은 중동권 안에서도 하나의 그림으로 말할 수 없는 상태들이 존재합니다. 저는 이것을 교과서적으로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종교란 무엇인가?
어떤 토론이나 논쟁을 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이 어떤 의미(정의)를 갖는지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같은 단어를 쓰더라도 다르게 해석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종교문제에서 난민을 이야기할 때 ‘종교’ 가 무엇인지정의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말을 하다보면 막연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이비 종교라는 단어가 있지요. 사이비 종교는 종교라 할 수 있나요? 사람들은 고등종교 하등종교를 이야기하는데 과연 이런 것이 정말 존재합니까? 나를 믿는 신앙, 이거 종교인가요? ‘종교적이다.’ 라는 말은 자기 자신의 삶이 중심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을 종교적이다 표현할 수 있고 소위 종교적 활동을 직접 하는 사람들을 종교적이다 표현 할 수 도 있잖아요. 우리는 일상에서 종교라는 단어를 많이 쓰게 되는데, 종교는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종교란 무엇인가요? 첫째는 믿음, 신념의 체계로서의 종교가 분명히 있겠지요. 그리고 종교는 한 집단이나 개인의 정체성으로 표현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방식으로서의 종교가 있겠지요.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남존여비는 유교적 가치관 인가요 불교적 가치관인가요? 제사 드리는 것은요? 결혼하기 전에 사주보는 것은요? 성년식은요? 종교적인 것인가요? 여러분이 이런 의식을 치른다고 해서 유교인은 아니지요? 이판사판 갈 때까지 가보자. 이거 불교 용어거든요. 야단법석이야. 이것도 불교용어인데 이런 용어를 쓰면 내가 불교 신자인 것인가요? 이런 종교적 배경의 언어를 쓸 수 있지만 종교 활동은 안 할 수 있지요. 즉 종교적 언어에 삶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지만 특정 종교의 특정한 행위를 지속적으로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교를 숭상하지 않지만 유교 문화에 영향을 받을 수 있지요. 불교가 아니어도 불교적 언어를 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종교적 언어가 삶에 영향을 미치지만 종교적 영향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서의 부분인 것이지요. 종교는 어떤 사람에게는 삶의 방식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특정한 종교적 활동을 하므로 어떤 사람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운명적으로 결정되는 등 여러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크게 믿음으로서의 종교, 정체성으로서의 종교, 삶의 방식으로서의 종교. 이 세 가지의 범주 속에서 종교를 이야기 할 수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 세 가지가 다 결합이 되어있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 중 하나만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지요. 그래도 어쨌든 이 모든 경우 종교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종교의 개념을 규정할 때 여전히 모호함이 있는 것은 사회적으로 관념적으로 관습적으로 종교를 규정할 때 나타나는 조금씩의 차이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종교적인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왜 종교적이야 라며 논쟁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어느 나라의 종교인들이 종교박해로 인하여 다른 나라에 가서 난민신청을 했는데 그곳에서는 당신들은 종교인 아니야 라고 하며 인정받지 못할 수 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알고 있는 종교 개념으로 종교를 규정하기에는 쉽지 않은 것이지요.
■ 종교적 박해에 대하여
종교적 박해라 함은 무엇을 떠올려야할까요?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정체성이나 종교 활동 혹은 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제지당하거나 제한받을 때 이것을 박해라 이야기할 수 있지요. 정부로부터의 박해의 예를 들면 중국 정부는 위구르 지역 무슬림 사람들에게 라마단 기간 중 금식을 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했습니다. 이들은 신앙적으로 라마단 기간에 해가 뜨면 굶어야하는데 이를 법으로 제지한 것입니다. 이 지역의 무슬림들에게 종교행위를 하지 못하게 한 것. 정부로부터의 박해 맞지요. 타종교에 의한 종교적 박해를 살펴봅시다. 이전에 동국대학교 기독교인 학생들은 학교 안팎에서 집회행위를 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다른 종교에 의한 탄압이지요. 이랜드라는 기업을 봅시다. 기독교인이 절대 다수인 기업에서 불교신자가 불교적 행위를 적극적으로 한다면 이 직원이 승승장구할 수 있을까요?
몇가지 사례를 더 살펴봅시다. 국가 종교를 가진 나라에서 다른 종교를 가질 때 정부차원에서의 통제가 있겠지요. 예를 들어 라마단기간 동안 사우디 혹은 요르단에서 낮에 공공장소에서 먹고 마시면 감옥에 가거나 추방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무슬림이 아닌 사람으로서 자율권이 있는데 라마단 기간에 공공장소에서 먹고 마셨다고 해서 체포 및 추방을 당하는 것은 정부 차원에서의 박해라 할 수 있지요. 과격한 보코하람이나 이라크에서 세력을 확대해가는 거대한 이슬람 원리주의 집단은, 같은 무슬림인데도 사람들을 잡아서 알라의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공개적인 참수형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자기 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이 이탈했을 때, 혹은 자신의 집단을 위협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집단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물리적 행위를 가할 때 이 또한 박해에 해당할 수 있지요. 언론, 미디어 조작을 통해서도 박해가 이루어집니다. 로마 초창기에는 기독교인들을 인육을 먹는 사이비 집단이라 언론이 몰고 갔었지요. 특정 종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곳에서는 소수 종교를 미디어를 통해 박해하는 일은 참 쉬운 일이겠지요. 미디어의 힘은 큽니다.
여러 종교적 박해의 상황들은 존재합니다. 여러분들이 계시는 집안에서 부모님과 같은 종교를 갖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신적인 박해를 받을 수도 있고 신체상의 박해도 받을 수 있습니다. 특정 종교 집단이 세력을 확대하면서 소수 종교와 통합되는 사례들, 학교 안에서 종교 집회를 하지 못하게 통제되는 상황들. 특정 종교의 이념을 가진 회사에서의 타종교인에 대한 배제 등 일반적으로 여러분이나 저나 이런 종교적 박해의 상황에 놓일 수 있습니다.
이라크 시아파와 수니파 이슬람 양대 계파 사이에 유혈충돌 이후 시아파의 장례행렬
■ 종교, 개인의 선택 영역을 넘어서 사회적 법적으로 규정되어진 하나의 신분
이슬람에는 수니파와 시아파라고 하는, 같은 종교 안에서도 다른 계파가 존재합니다. 이라크에서 시아파가 집권을 하게 되면서 수니파가 비교적 소수가 되어 여러 형태로 억압을 받고 있습니다. 반면 요르단에서는 대부분의 사원에는 시아파 무슬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예배가 적습니다. 반면 이란으로 가면 시아파가 많은데 이 경우에는 수니파 사람들이 억압을 받습니다. 큰 그림 속에서 정리가 되어야할 부분은 우리는 지역에서 종교 간 이동이 원활하지 않은 체제에 있다는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정체성의 상징이 종교인 그들이 본인의 종교를 바꾼다고 하였을 때, 이는 단순히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집안의 명예, 전통, 지역과 연결이 됩니다. 또한 국가가 종교적 이동을 제한하는 현실 안에서 종교 이슈는 단순히 개인의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동에서의 종교 이슈는 개인의 선택 영역을 넘어서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규정되어진 하나의 신분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꿀 수 없는 피부색과 같은 것, 선택에 의해 주어지지 않는 성씨 같은 것이 종교의 이슈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맥락 속에서 종교난민을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작성 : 이아름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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