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삶: 도시 난민들의 말하지 않은 이야기
사진 작가 앤드류 맥코넬(Andrew McConnell)의 최근 작품은 이전 세기와 현 세기에 벌어진 여러 분쟁들을 피해 도망쳐 온 도시 난민들의 삶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기존의 임시거주 난민캠프의 난민들을 담은 사진들과는 다르다. 그는 도시라는 배경을 강조하여 드러낸다. 밤 시간에 촬영된 난민들의 모습은 주로 도시 거리를 비추는 인공 불빛이 너른 바다처럼 펼쳐진 배경으로 카메라에 담긴다.
“밤의 어둠을 이용해서 도시 난민들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담았습니다. 우리는 이 도시들에서 난민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에게 그들은 감춰져 있는 것만 같죠. 저는 이 사실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라고 맥코넬은 이야기한다.
그의 작품은 세계 곳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완성하기까지 수 개월이 걸렸고, 4개 대륙의 8개 도시에서 작업이 이루어졌다. 난민들은 자신의 모습이 사진에 담길 때마다 어떻게 새 삶을 찾아 오게 되었는지 각자의 사연을 풀어 놓았다. 어떤 이에게는 피난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외국행이기도 했다.
이 달 말까지 런던의 세인트 판크라스 인터내셔널(St. Pancras International)에 전시되는 맥코넬의 작품 1 일부를 이 지면을 빌어 소개한다.
59세의 파와즈 라르하일 터키(Fawaz Rarhail Turkey)와 그의 가족은 시리아 내전을 피해 현재 요르단 알 마프라크(al-Marfraq)에 머물고 있다.
군 부대가 우리 집을 무단으로 침입한 후부터 아이들의 신변이 걱정되었고 이 나라를 떠나야겠다는 결심이 들었습니다. 사방에 포진해 있는 저격병들. 그들을 보는 것은 예삿일이었습니다. 시리아 군인들은 우리 동네 사람 네 명을 살해했습니다. 인근 가옥의 욕실에 숨어 있던 다른 여덟 사람과 함께 제 남동생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선은 홈즈(Homs) 내 다른 지역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가 있던 곳이 공격을 받게 되었고 모두가 이슬람 사원에 가 몸을 피했습니다. 사원에 피신해 있은 지 2시간쯤 지나 소형 오픈트럭 한 대가 오더니 더 안전한 곳으로 가지 않겠느냐고 물어 왔습니다. 트럭 기사와 함께 차에 오른 우리는 그 주 주말 무렵 하마(Hama)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마에서는 미니버스를 가진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 남자는 총 인원 45명인 여덟 가정을 국경으로 실어다 주기로 했습니다. 다라(Deraa)로 건너간 우리는 자유시리아군(FSA, Free Syrian Army)의 도움을 받아 밤에 국경을 넘었습니다. 오후 8시부터 걷기 시작해서 새벽 1시에 도착 했습니다. 당시 노인과 어린이를 포함해 150명이 움직였기에 우리가 표적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요르단 군대가 국경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임시거주 난민캠프에 옮겨졌고 괜찮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3일이 지나 이곳 버려진 집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시리아에서와는 달리 안전하다고 느끼고 있으며 잠도 편히 잘 수 있습니다. 한 국제단체가 면담을 하러 왔었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다른 나라에 가 자리를 잡고 살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싫다고 대답했습니다. 현 정권이 무너지면 고국으로 돌아 갈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다시 돌아갈 바람을 품지 못할 겁니다.
18세의 라니 러블리(Lanier Lovely)는 2010년 1월에 아이티를 강타한 지진으로 국내실향민이 되었다.
지진이 있은 후로 우리는 길 위에서 잠을 잤습니다. 집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하던 지진이 발생하던 당시, 저는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무너진 집에 떨어지는 돌을 맞은 저는 무릎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처음에는 피를 흘린다는 사실조차 알아 차리지 못한 채 갇혀 있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도중 느껴진 고통에 털썩 주저 앉아 버렸습니다. 제 어머니를 찾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제 자신은 심신이 극도로 고통스러웠고 거리 곳곳에는 시체들이 널려 있었으며 사람들은 끊임없이 통곡하고 있었기에 노상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틀 뒤, 집에 들러 옷가지를 좀 가지고 나온 우리는 그 길로 바로 난민캠프에 오게 되었습니다.
5일이 지났을 때, 어머니를 찾았습니다. 빨래를 가지러 다시 집에 갔었는데 그 때 어머니가 저를 보셨습니다.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던 어머니를 만나니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난민캠프에서 지낸 지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밤, 저는 강간을 당했습니다. 새벽 4시경 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장례식을 위해 교외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저는 혼자였습니다. 그 남자는 다가와 저를 칼로 위협했습니다. 막으려 애를 썼지만, 저는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제구조위원회(International Rescue Committee, IRC)의 사회복지사가 저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이미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제 아들의 이름은 로빈스키(Lovinsky)이고 이제 15개월 되었습니다. 아이가 있어 행복합니다. 저는 제 아들을 많이 사랑합니다. 가끔 저는 가족이 있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는 가족의 울타리 안에 있는 다른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아파오기도 합니다.
저를 성폭행했던 그 남자는 두 번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동안 머물던 난민캠프를 떠나 이모와 함께 지냈고, 아기가 태어난 후부터는 다른 캠프의 천막을 보금자리 삼아 지내고 계시던 어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경찰서에는 제가 직접 가지 않았습니다. 국제구호위원회 직원이 경찰서를 방문해 사건 경위를 설명했습니다. 난민캠프 내 치안은 충분치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안전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똑같은 일이 저에게 또 다시 일어날 수도 있을 겁니다. 밤 시간에는 더욱 안전에의 보장이 답보되어야 하고 가로등도 더 많이 밝혀야 합니다. 이런 류의 강간범들은 반드시 감옥에 가야 합니다.
신이 저를 보호하시고 살아갈 힘과 아이를 돌볼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내일 당장이라도 난민캠프를 떠났으면 좋겠습니다. 어머니가 셋방을 구하려 하고 계시기 때문에 내일 이사가는 것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베트남 콘 다오(Con Dau)에서 온 21세의 응구옌(Nguyen)은 현재 태국 방콕(Bangkok)에 거주하고 있다.
저는 다 낭(Da Nang) 콘 다오(Con Dau)의 한 천주교 교구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정부는 우리 교구를 폐쇄하고 토지를 몰수하길 원했습니다. 2010년 5월 4일에는 한 동네 주민 여성의 장례식이 치뤄질 예정이었으나, 당국이 허가를 내주지 않아 경찰이 출동하고 묘지로 향하는 길을 봉쇄해 버렸습니다. 경찰들은 몽둥이와 전기봉을 이용해 사람들을 구타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임신부에게까지도 가차없었습니다. 제 어머니를 비롯, 사람들을 체포했으며 관을 압수해 갔습니다. 그들이 떠난 마을은 온통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정부는 누구든 나라를 떠나는 자는 민중의 적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라오스로 갔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종교적 신념이 강하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천주교 신자가 정부 관료로 일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차별 대우를 받았습니다. 정부기관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종교를 버려야 했습니다. 제 어머니는 6개월 간 감옥에 수감되셨고 이후 9개월의 가택연금을 받았습니다. 감옥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은 가혹한 구타에 시달려야 했고 그 후유증을 현재까지 앓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저와 함께 이곳에 오고 싶어하셨지만 현재 경찰의 감시 하에 계십니다.
장례식 때의 사건이 있고 나서 저는 다 낭 시내로 가는 길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다 낭에서 라오스행 버스를 타고 계속해서 태국으로 이동했습니다. 저는 여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경을 넘을 수 있었지만 여권이 없는 다른 주민들은 정글을 헤쳐 나와야 했습니다. 콘 다오에서 온 우리 모두는 한 신부님의 도움으로 국가안보부(Department of Home Security)에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국제구조위원회로 이관되었습니다.
2012년 6월 14일, 저는 미국의 테네시(Tennessee)로 가 재정착할 예정입니다. 정말 기다려집니다. 저는 이 날만을 2년 넘게 고대해 왔습니다. 이제 제 목소리를 높여 베트남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실상을 폭로하고, 천주교 신자들과 정부 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할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고국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만나고 싶지만, 모든 것은 베트남 정부가 변해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스리랑카 마나르(Mannar) 지역 출신 난민인 31세의 파라마난탐 두샨탄(Paramanantham Dhushyanthan)은 현재 태국에서 지내고 있다.
저는 스리랑카에서 에엘람인민혁명해방전선(Eeelam People’s Revolutionary Liberation Front, EPRLF)의 당원이었습니다. 우리가 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정부 여당은 선거 기간 중 우리를 상대로 협박을 벌였습니다. 구타를 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면 다음 날 아침 깨어날 수 있을지 의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우리 지부 사람들 중 다수가 한밤 중에 끌려가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곤 했었습니다.
집에 머무르기가 두려웠던 저는 친구나 여동생과 함께 있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어느 날, 저는 납치 당하고 말았습니다. 2009년 7월 10일 저녁 7시였습니다. 여섯 사람이 나타나 제 가슴에 총을 겨누고는 자신들의 차에 올라타라고 명령했습니다. 어느 공터로 끌려 간 저를 그들은 총으로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제 머리에 총을 겨누고 막 쏘려는 찰나, 다른 사람이 말했습니다. “지금 죽이지는 마. 나중에 처리하자. 우리가 이 자를 차에 태울 때 어떤 의사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어.” 그래서 저는 집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고, 다음 날 어머니는 저를 콜롬보(Colombo)로 보내셨습니다.
개인적으로 모은 돈과 여동생이 물건을 팔아 만든 돈으로 방콕에 왔습니다. 제가 떠난 뒤, 사람들이 찾아 와서 스리랑카 집에 머물고 있는 가족들을 협박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제가 인도로 떠났다고 이야기했답니다.
방콕에 이르렀을 때에는 저는 모든 게 잘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9개월이 지나고, 난민 지위를 얻었습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간다면 경찰이 저를 잡아갈 것입니다. 재정착이 이루어지고, 그래서 그곳에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미래를 그려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설령 꿈을 꾸더라도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스리랑카는 아직 안전하지 않습니다. 방송 매체에서는 스리랑카의 상황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보도하지만, 제 가족들이 전해 주는 이야기는 사람들이 여전히 두려움에 떨며 살고 있으며 납치가 변함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뿐입니다.
소말리아 모가디슈(Mogadishu)에서 온 50세의 난민 아미나 압디 하산(Amina Abdi Hassan)은 현재 케냐의 나이로비(Nairobi)에 거주하고 있다.
알 샤바브(Al Shabaab)가 집권하면서 일상생활은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가디슈를 떠났습니다. 시장에조차 갈 수 없었습니다. 자유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살아 온 도시에 갇힌 죄수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이전에도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군벌 치하에 부족주의가 창궐하기 시작했습니다. 약탈은 으레 있는 일이었고 사업을 한다는 건 어려웠습니다.
알 샤바브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여성들은 잘라비브(jalabib)(역주: 무슬림 여성들이 입는 외투. 두 눈을 제외한 몸 전체를 감추게 하거나 목에서부터 가슴을 가리는 넓은 옷)를 입도록 강제 조치가 취해졌고 외출은 금지되었습니다. 남성과 대화라도 나누는 것이 목격되면 매춘부라는 혐의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여성들은 이러한 사소한 건들로 공격을 받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곳에는 현재 치안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발생해도 신고할 정부 기관이나 관계자가 없습니다. 길거리에서 총을 맞는 사람들도 보았고 집이 폭격당하는 경우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이웃들의 집을 무단침입해서 전 가족을 살해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가축 운반용 트럭을 타고 모가디슈를 나와 나이로비행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저와 어머니, 아들 둘, 딸 둘, 손주 둘까지 모두 8명이 움직였습니다. 정식서류가 없었기 때문에 2명씩 짝을 지어 이동했습니다. 8명 모두가 함께 움직이는 것은 그야말로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었습니다.
몇몇 친척들이 돈을 모아 주어 머물 곳을 임대할 수 있었습니다. 나이로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어떤 부인의 도움으로 보온병을 몇 개 구입할 수 있었고 저는 차를 끓여 팔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채소를 팔아 가족들의 생활비를 좀 보태고 있습니다. 여기에 산 지도 4년이 되었네요.
난민의 삶은 어려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현재 저의 가장 큰 고민은 매달 집세를 내는 부분입니다. 소말리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곳에는 현재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삶을 꾸릴 수 있을 만큼 원상복귀시키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품고 있습니다. 신께서 도와 주실 것이라고 언제나 믿고 있습니다. 변화는 이루어질 것이고 제 아이들은 어쩌면 해외로 나가 저를 도와 줄 수도 있을 겁니다.
이라크 바그다드(Baghdad)의 난민인 알리 아흐메드(Ali Ahmed)는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다.
2003년의 전쟁이 발발하기 전 이라크에서의 삶은 평화로웠지 결코 폭력적이지 않았습니다. 우리 가족은 수니파와 시아파 이웃들과 함께 어우러져 살고 있었고, 그 전쟁이 있기 전까지는 그들의 종교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정말 평범하게 살았습니다. 어머니께서는 25년 째 교직에 계셨고, 아버지께서는 기술자이셨습니다. 저는 고등학생으로 꽤 좋은 교육을 받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초기에는 아무도 밖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2, 3년이 지난 후부터는 전쟁폭력의 강도가 점점 세지기 시작했습니다. 제 형은 총을 맞았고 다른 형은 거의 죽을 뻔 했습니다. 저도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이대로 이라크에 있다가는 아들 중 누구라도 잃을 수 있겠다 생각하셨고, 우리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Damascus)로 떠났습니다.
미국에 갈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매우 기뻤습니다. 여러 차례 인터뷰를 진행했고, 마지막 인터뷰에서 비자와 항공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퍽 들떴었습니다.
우리의 스폰서가 뉴욕(New York)에 있었고, 또 가족이 함께 있었기에, 뉴욕으로 왔습니다. 처음 4달 동안은 국제구조위원회가 지원을 해 주지만 그 다음부터는 스스로 일을 해 생계를 이어야 합니다.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던 우리는 친구들이 있는 아이다호(Idaho)로 갔습니다. 하지만 그곳의 삶도 그리 순탄치 않았고 결국 2년 뒤, ‘할 만큼 했어, 이제 뉴욕으로 돌아가는 거야’라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국제구호위원회에 이야기를 했더니 아파트에 집을 얻을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일자리를 잡으셨습니다. 저는 판매원으로 일하게 되어 작은 가게의 신발 매장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이힐과 플랫슈즈, 샌달, 부츠, 장화 등 모든 신발에 대해 모르는 게 없습니다! 뉴욕으로 다시 돌아온 지 2년 정도 된 지금, 꽤 자리를 잡았습니다. 국제구호위원회가 없었더라면 뉴욕으로 다시 돌아올 기회는 없었을 겁니다. 국제구호위원회에 감사를 전합니다.
내년 1월에 저는 미국 시민권을 얻습니다. 저는 정말 기쁩니다. 진심입니다. 이곳에서 지낸 지 4년 만에 무언가를 성취하고 이제는 이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기에 시민권을 얻는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제가 뉴욕을 사랑하는 한 가지 이유는 그 다양성 때문입니다.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아갑니다. 신께서 저를 이곳에 데려다 주신 것이 참 감사합니다. 이제껏 저는 많은 일을 겪어 왔고 이제는 모두 잊고 싶습니다. 뉴욕 사회의 더욱 확고한 구성원이 되고 싶고 더욱 열린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필 쿰스(Phil Coomes) 편집
원문출처: http://www.bbc.co.uk/news/in-pictures-20900282
번역: 김지혜
감수: 김한나
- 역주: 런던 세인트 판크라스 인터내셔널 역에서는 2013년 1월 31일까지 맥코넬의 작품을 전시했다. 이번 전시회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인도적 구호 및 시민 보호(European Commission's Humanitarian Aid and Civil Protection) 분과의 지원을 받아 영국의 국제구호위원회(International Rescue Committee, IRC)와 협력하여 진행한 프로젝트의 결과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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