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간다 난민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되지?”, 티라야 씨의 이야기가 끝날 쯤에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우간다에는 수십만 명의 국내 실향민들이 존재한다는데,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숫자만이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되었다는 통계를 어디선가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를 통해서 우리는 잠시 동안이지만 우간다의 수많은 국내 실향민들을 생각할 수 있었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난민이 주체가 되어, 한국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이야기를 나룰 수 있는 기회가 없었기에, 티라야 씨와 함께 월담은 참으로 소중한 첫출발이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이야기라 조심스러움도 컸고, 우리가 티라야 씨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걱정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티라야 씨가 여러차례 시간을 들여 정리하고 준비하여 풀어낸 자신의 이야기는 당당한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고, 한 회원 분이 말씀해 주신대로 “한국을 너무 모르는 한국 사람들”에게 참 많은 것을 배우게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첫 행사였지만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참석해 주셨습니다. 난센 회원들 뿐만 아니라 대학생, 직장인, 문화연구자, 사회학 연구자, 변호사 등 각 분야에서 다양한 분들이 진지한 마음으로 행사에 임해주셨기에 함께 “담을 넘을 수” 있었습니다.^^
우간다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
단일민족인 한국인은 400개의 부족들이 있고, 수십개의 왕국 및 족장국으로 이루어진 우간다의 다양성을 상상하기 힘들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사람’으로서 ‘우리’라는 강한 소속감을 느끼지만, 우간다 사람들에게는 ‘우간다’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962년 우간다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부간다, 분요로, 안콜레, 토로 왕국 등이 영역확장을 놓고 싸우거나 전쟁을 벌이기도 했기에 그러한 국민 정체성은 더욱 낯선 것이었습니다.
1962년 우간다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후 선거를 통해 선출한 대통령과 공화국 헌법은 1971년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독재자 이디아민에 의해 모두 사라졌습니다. 이디아민이 권력을 장악하고 8년간 대량학살과 폭압정치를 자행해 약 30만 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해방 이후 맞닥뜨려야 했던 군부정권들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우간다는 그보다 훨씬 더 심각했던 것이지요. 이 때 수많은 사람들이 탄자니아, 캐나다, 영국 등으로 망명을 갔다고 합니다. 이디아민의 통치는 탄자니아-우간다 전쟁으로 막을 내리고, 여러 정치세력들 간의 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망명의 길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무세베니는 1986년 이러한 분쟁을 종식시키고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며, 지금까지 우간다의 대통령으로 집권하고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무세베니를 구세주로 생각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무세베니는 오랜 집권을 유지하기 위해 반대하는 왕국들과 부족민들에 대한 학살, 유배, 고문, 구금을 자행해 왔으며, 현재까지 우간다의 평화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우간다에는 국내 실향민이 140만 명에 이를 정도라고 합니다.(2008년 기준으로 말씀하심. 현재는 2008년 이후 약 60만 명이 고향으로 돌아 갔다고 보고됨)
실종과 고문의 경험을 공감한다는 것
티라야 씨가 우간다에서 박해를 받고 한국으로 건너온 이유는 이와 같은 정치적 상황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었습니다. 티라야 씨의 남편은 군인이었는데 처음에는 무세베니 정권을 지지하였지만, 그 실체를 알게 된 이후 반대파에 투표를 하였고, 또한 티라야 씨와 남편이 속한 부간다 왕국의 땅을 무세베니 정부가 소유하려 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남편은 정부와의 협상을 확인받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되길 기다렸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에 실종되었습니다. 그리고 티라야 씨도 정부인사들로부터 지속적인 위협을 받다가, 납치되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문으로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정신이 들어 깨었을 때는 집이었는데,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마을 목사님의 권유로 위협을 피해 한국행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티라야 씨는 우간다로 돌아가서 다시 위협을 당하고 싶지 않았기에 한국 도착하자마자 난민신청을 하셨고, 현재는 난민으로 인정되어 생활하고 있습니다.
난민이 한국에서 만난 새로운 벽, 함께 허물기
티라야 씨가 법무부 출입국 사무소에서 자신이 우간다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했을 때, 직원들은 모두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며 믿을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고, 자신의 박해 경험에도 불구하고 난민 인정은 불허되었습니다. 이의 신청을 하고 자신의 박해를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어렵게 구하여, 다시 법무부를 설득시킨 뒤 겨우 난민 인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한국생활에서 겪게 될 어려움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난민협약에 의하면 난민도 내국인과 거의 동일한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하지만, 티라야 씨는 거주하는 것 외에 어떤 기회도 얻기 어려웠습니다. 자신의 직업 경험을 살려 셀 수도 없이 많은 이력서를 넣었지만, 단 한 개의 직업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우간다에서 교육학 학위를 갖고 신학 공부를 하면서 교사로 생활했지만, 그러한 경력은 제3세계 국가 출신의 외국인을 폄하하는 한국 문화에서는 앞에 아무런 쓸모가 없었던 것이지요. 먹고 살아야 하기에 공장의 일거리나 식당의 접시 닦는 일을 찾아 면접을 보러 다녔지만, “피부색이 한국인과 너무 다르다”는 이유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거절 당했고, 다시 소개료를 줘야 하거나 최저임금 이하인 주변부 노동시장으로 유입되었지만,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기에 임금체불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티라야 씨는 말했습니다. “접시 닦는데, 피부색이 정해져 있습니까?” 상식이 통하지 않는 한국사회를 향해서 말입니다.
또한 티라야 씨는 말했습니다. “정부는 나에게 여기 머무를 권리를 줬지만, 그것은 단 하나의 의미 뿐입니다. 내가 강제출국 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뿐입니다.”
티라야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함께 한 우리들은 허울 뿐인 ‘난민법’의 실상을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한 분은 한국에서 흑인에 대한 편견이 이제는 많이 사라졌다고 느꼈지만, 여전히 겪어야 하는 차별에 둔감했던 자신의 죄송한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민족주의가 너무 자연스러운 우리나라 사람들이 난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외국인들에 대한 정부 예산이 이슈에 따라 대폭 증액될 때도 있지만 티라야 씨처럼 정말 필요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지요.
이번 기회를 통해, 한국인들이 각국에서 오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외국인들을 ‘인간’으로서 대하고 수용하는데 얼마나 인색하고 편견에 갖혀 있는지 되돌아 볼 수 있었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해준 티라야 씨의 용기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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