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활동 Activities

4기 인턴들의 자유분방한 태국 방문 감상문 ♬ - 1번 타자, 권가람




여행 내내, 그리고 돌아오고 나서 나의 직업이 4컷 만화 작가가 아닌 것이 천만다행으로 여겨졌다. 매 순간, 그 소중했던 기억을 4장으로 간추리는 것은 어찌나 힘든 일이 될는지! 보름 남짓했던 매솟 그리고 방콕에서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 장기전이 된 버마 민주화, 그 속에서 엿보이는 혁명가의 인간적 고뇌

[캠프 내 숙소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아이야 레스토랑. 그곳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섭씨 35도의 태양이 지글지글 끓다가, 거뭇한 땅거미가 내리고 나면 버마 민주화의 무거운 멍에를 짊어진 매솟의 사람들은 그 곳으로 모여든다. 아이야 레스토랑. 사방의 벽은 시가를 피워 문 체 게바라 생전의 모습과, 8888 혁명 대오의 제일 앞자리에 서 있는 굳건한 눈빛의 아웅산 수지 여사로 장식되어 있다. 이 시각 이 혁명적 레스토랑에 모인 사람들의 인구비를 조사해 보면, 매솟 지방의 인구 구성을 대충 짐작해볼 수 있다. 버마라는 조국 아닌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절반, 노랑갈색검정머리 세계 각국의 NGO활동가 절반. 이렇게 태국의 소도시 매솟에서 태국 출신의 본토인을 찾아보기란 정말 힘들다.

금요일을 맞아 레오(Leo) 맥주를 한잔 걸친 조우 린(가명)은 오랜만에 걸걸한 목소리로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다. 8888혁명에 참여하여 7년 동안의 감옥생활을 하고 출옥하자마자 들은 소식이 형이 구만리 떨어진 또 다른 감옥에서 고문당하다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2008년 나르기스가 버마를 덮쳤을 때, 가족을 모두 잃고 간신히 국경을 넘은 조우 산(가명)과 의형제를 맺은 것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자 조우 산은 조우 린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이야기한다.

"아, 그게 몇 년전 이야기냐 제발 고만 좀 하자!"


그들의 인생에는 버마 민주화의 지난한 역사에서 비롯된 군부의 폭력으로 점철된 일상, 일장일단의 정치적 사건, 그리고 몇몇 운동가들의 혁명적 궤적 이외의 것들이 들어올 틈이 없었다. 왜 그들이라고 사랑하는 연인에게 편지 한장 쓰느라 밤을 새며 우물쭈물 연필 끝을 씹는 꿈을 꾸지 않았겠는가? 버마 민주화가 오랜 시간을 끌어 왔고, 그 끝이 쉬이 보이지 않는 이 상황에서 매솟의 많은 운동가들은 지치고 힘들어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뜨거움, 울컥함이 가슴속에서 완연히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고뇌를 보며 느껴지는, 때로는 나약하기도 때로는 강인하기도 한 인간으로서의 연대의식 때문일까?



# 산비탈에 자리잡은 난민촌, 아름다운 ‘새장’

매솟 시내 중심에서 3시간 달린 그곳은 움피엠 난민촌! 버마 사태의 장기화로 움피엠은 이미 만팔천명의 난민이 거주하고, 매달 꾸준히 수백의 새로운 사람들이 유입되는 거대 촌락이 되어 있었다.


움피엠 난민촌에는 카렌족이 가장 많이 거주한다. 버마 전체 인구 7%를 차지하는 카렌족은, 버마내 여러 민족 중에서도 자신들의 독립에 대해 가장 강경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실 버마의 여러 민족들은 현재 버마 군부 독재 종식이라는 동일한 목표 아래 힘을 모으고 있지만, 그 이후 연방제의 청사진에 관해서는 조금씩 입장차가 있다. 움피엠 난민촌에 사는 몇몇 카렌족들의 이야기는 이러한 현실을 뒷받침 한다. 버마 군부를 연신 ‘천벌 받을 놈들’이라고 저주하던 한 카렌족 아저씨는, 차라리 영국의 식민지 시절이었던 그 때의 버마를 그리워한다. 오랜 세월동안 버마족에 의해 차별을 받고 살았던 카렌족에게는, 영국군이 우리를 버마족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준 구세주와 같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국군은 식민지의 효율적 통치를 위해 카렌족 편애 정책을 폈다. 이러한 버마 역사에 대한 입장차 때문에 실제로 버마 민주화 운동가들은 민주화 이후 내전의 상황을 우려하고 있기도 하다. 이 카렌족 아저씨는 ‘총명함 때문에 박해받지만 위대하다는 유대민족’을 역할모델 삼아 오늘도 세계사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의 옥스포드판 버마어-영어 사전은 새카맣게 손때가 탔다.



흰색, 푸른색의 UN텐트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고, 산비탈을 깎은 그 곳에는 짚과 나무 줄기를 엮은 열대 지방의 수상가옥을 연상케 하는 집들이 성냥갑처럼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똑같은 지붕의 모양을 한 그 곳 아래, 누구는 목물을 하고, 누구는 공부를 하고, 누구는 성경을 들여다본다. 우리 없이 지내는 닭들은 연신 이웃집 개들을 쪼아대고, 잠시 부모가 집을 비우면 아이들은 이웃집 이모네에 놀러 가 하던 숨바꼭질을 계속한다.


하지만 이렇게 한적하고 평화로운 묘사는 18 혹은 19세기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나 만족시키기에 적합하지 않을까. 그들은 이러한 묘사에 열대 우림으로 가득한 인도차이나 반도나 티크 나무 사이로 날아다니는 시암의 원숭이를 상상할 테니까. 하지만 이토록 아름답기만 한 이곳은 거대한 새장과 다름없다. 태국 정부의 정책에 따라 버마 난민은 이곳 난민촌을 자유롭게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아름다운 새장에서 누구는 목물을 하고, 누구는 성경을 들여다보는 사이, 누구는 병원에 갈 수 없어 목숨이 질 날만 기다리고 있고, 누구는 그곳을 몰래 탈출하여 태국인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14시간 죽도록 일하기라도 꿈꾸는 것이다.



# 주어진 기득권, 당신이라면 포기할 수 있나

매솟은 태국 서쪽 버마의 국경에 붙어있다. 수도 방콕까지 나오려면 야간 버스를 타고 8시간을 달려야 한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달리는 버스의 여정은 꽤 험난했다. 무장을 한 군인들이 신분 확인을 이유로 우리가 탄 버스를 세 번이나 멈춰 세운 것이다. 물론, 졸리고 지친 눈을 힘겹게 비비며 Passport?(여권 말이에요?) 라고 하자, 그들은 그냥 지나갔다. 태국인이 아닌, 그리고 매솟에서 태국으로 불법으로 여행하는 버마인이 아닌 우리는 신분증을 제시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새우잠을 자며 장발로 단속되어 경찰에 연행되어가는 아빠의 꿈을 꿨다.



아태지역 난민 네트워크 회의가 열리는 방콕은 화려와 혼잡, 무더움과 강바람, 킬힐과 전통 차크리 드레스가 버무려진 각양각색의 불꽃놀이 같은 도시였다. 출발 전, 한 친구가 1920년대의 시카고, 2006년의 바그다드를 방콕에서 볼 거라고 하던 농담이 생각났다.
회의 시작 하루 전, 타이 문학에 대한 호기심으로 들른 방콕 중심의 쭐라롱껀 대학교에서 나는 특이한 만남을 가졌다. 영문학 코너에 있던 지적인 인상의 한 학생에게 슬며시 영어로 된 타이 문학 작품을 몇 권 골라줄 수 있냐고 말을 건넸다.

“나는 이곳 출신이 아니라 잘 모르겠네요. 미얀마(버마)에서 왔어요!”


매솟에서 약 일주일간 동고동락한 버마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쳤다. 반가움도 잠시. 내가 만난 매솟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군부가 공표한 명칭인 미얀마로 부르기를 거부하지 않았던가? 이 학생은 버마 군부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고 방콕에서 2년째 공부를 하고 있었다. 장학금의 조건은 2년안에 석사를 취득하여 졸업 후 10년간 버마 정부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것.

양곤에 가족이 있다는 이 학생은 매우 친절했고, 인문대 도서관과 학과들을 모두 직접 안내해 주었다. 하지만 그 동행 내내 나의 속마음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살고 있는 버마와 매솟의 사람들이 살았던 버마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매솟에서 만났던 버마 사람들은 버마에서 휴대폰을 사려면 미국 돈으로 1,000달러를 주어야 한다며, 군부의 물품 독재와 시민들의 통신권 박탈에 대하여 불같이 성토했었다. 하지만 이 버마 군부의 유망주는 양곤에서 살 때 주로 노키아 폰을 썼고, 방콕에 와서 새로 휴대폰을 샀다고 했다. 그래도 이 친구는 내 휴대폰을 보고 구글(Google)이 뭐냐고 물어봤다.


나는 결국 마지막까지 이 친구에게 매솟에서 본 버마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했다. 난센이 매솟에서 한 활동을 이야기하면 그 친구가 더 이상 나에게 말을 잇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버마의 군부가 보는 그 나라의 현실이 어떨지 나는 너무나 궁금했고, 그 친구가 나에게 자신의 스쿨버스 승차권을 쥐어주는 순간까지 나는 매솟의 이야기를 꺼내놓지 않았다.


씁쓸함을 안고 돌아오는 길, 나는 서른 남짓 되었을 이 학생의 탄생의 순간을 상상해 보았다. 군부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아버지를 둔 이 학생은, 버마에 태어나자 마자 천국의 계단에 발을 디딘 것일까? 하지만 이러한 삶의 대안이 구금 아니면 군부의 총구를 피해 1년에 수십 번 정글 속을 옮겨 다니며 거처를 마련하여야 하는 불안정함의 지속이라고 할 때, 나라면 그 기득권을 포기하고 뛰쳐나올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이 학생이 본 버마의 현실에서 이러한 고민 자체가 불필요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조지 오웰, 1946, 나는 왜 쓰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