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2009년 여름 난민인권센터 번역 자원봉사활동을 했던 이효진 학생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개최한 인권에세이 공모사업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글입니다. 이효진 학생의 동의를 얻어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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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인권, 2010년 1/2월호]
내 마음의 국경을 넘어
이효진 자원봉사자
그의 이름은 조셉, 정치 박해로 인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고 있는 50대의 라이베리아 출신 목사님. 현재 한국에서 정치적 난민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법률 소송을 제기중인 난민신청자 신분이다.
내가 그의 개인 신상을 모르고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쳤다면 그는 아주 낯선 모습의 검은 얼굴의 외국인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여름방학, 나는 그의 법률 소송을 돕기 위해 법원으로 그와 동행했다. 비록 짧은 시간 동안의 만남이었지만 그가 그 나라에서 정의감 넘치고 자애로운 심성을 가진 성직자였음을 짐작하기엔 충분했다.
그는 현재 20대의 딸과 함께 아주 불편하고도 고달픈 이국 생활을 하고 있다. 난민 신분 때문에 직업을 구하기 어려워 지금 수입이 없는 상태다. 외국인 이주민들 중에서도 가장 열악하다는 난민의 현실적 고단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셈이었다.
법원으로 함께 가는 동안 뉴스에서나 간혹 등장하던 외국인 이주민, 난민, 정치적 박해, 불법 체류 등의 보통명사가 어느새 조셉이라는 고유명사로 바뀌어 내 일상으로 들어왔다. 여태껏 활자로만 접했던 인권의 그 무거운 의미를 교과서 밖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직접적으로 만나지 못했던, 최소한의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을 보게 된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비교적 규범 수용적 태도를 가진 모범생 스타일이다. 학교 규칙이나 사회의 권위에 대항하여 부당한 대우나 인격적 모멸감을 받은 적이 별로 없다. 지키라는 복장 규정을 굳이 어겨가며 머리를 기르고 교복 치마의 길이를 줄인 적이 없을 뿐더러, 간혹 폭언과 심한 체벌을 행하시는 선생님이 계셨어도 그에 협조하지 않은 우리 잘못도 있기에 드러내 놓고 반항을 해 본 기억이 없다.
세상이 유토피아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인권은 개개인이 잘하면 침해받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교실에서 마주치는 인권은 그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 정도로 생각했고, 교과서에 묘사된 인권은 전 세계가 달성하려고 노력해야 할 그저 추상적인 목표로 받아들였다.
인권에 대한 나의 이렇게 소박한 인식에 변화를 준 계기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교외 봉사로 시작한 난민 인권센터에서의 활동이었다. 때로 요식행위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시선도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학생들의 의무 봉사활동은 나름 감수성 예민한 시기에 여러 의미 있는 경험과 사고를 하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적어도 내게는 형식이 내용을 만들어 낸 가치 있는 일이었다.
지난 몇 달간 세계 곳곳의 난민 실태에 관한 자료를 번역하고 이곳의 웹사이트를 드나들면서 본 인권유린의 현장은 세상에 존재하는 정치 체제와 종교의 가짓수만큼, 그리고 피부 색깔 만큼이나 다양한 인종문제 등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생전 가 볼 일 없을 것 같은 미얀마, 라이베리아, 파키스탄이 미국, 영국만큼이나 친밀한 나라이름으로 다가왔다. 내 정치적 의사와 종교적 신념에 따라 어디서든 거주할 수 있는, 내게는 당연한 권리가 그들에겐 목숨 건 절박한 현실이었다.
돌아가려야 갈 곳이 없는 그들의 이름 난민, 그들을 버린 조국에는 오직 박해와 공포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비장한 결심으로 탈출해온 한국에서 그들은 또 다른 고통을 겪고 있다. 신청자의 겨우 10% 남짓만이 받는다는 난민 인정 수치는 우리의 경제규모에 비해서 턱없이 부족하다.그 나라의 인권실태를 알려면 재소자와 이주 노동자의 현실을 보라는 말이 있듯이 난민에 대한 우리나라의 태도는 우리 인권실태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들을 돕는 난민인권센터가 허름한 건물의 옥탑 방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현실과 같은 맥락이다.
사실 우리도 정치적 난민을 배출한 역사가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있었다. 끝내 이 땅을 밟지 못하고 돌아가신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 고암 이응로 화백이 있었고, 파리에서 20년 난민생활 끝에 돌아온 언론인 홍세화 선생, 그리고 얼마 전 돌아가신 김대중 대통령 역시 정치적 망명생활을 한 적이 있다. 그 당시 그들을 받아준 외국의 관대함과 배려가 없었더라면 우리 역사의 큰 손실이었을 것이다.
지구 온난화로 온 지구촌이 같이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글로벌시대가 되어도, 그 어떤 세상의 오지도 찾아간다는 블러드 마니, 다국적 자본은 만연해도, 다국적 인권은 없었다. 인권에는 여전히 철옹성 같은 국적이 존재하고 국경의 밤은 깊기만 하다.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는 것만큼이나 좋은 나라에서 태어나는 것도 큰 행운일 수 있겠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것이 운이라면 행운을 거머쥔 자, 불운을 맞닥뜨린 자를 포용하는 이치는 당연할 것인데 우리 사회의 그들에 대한 냉대와 편견은 여전히 일상적이다.
왜 학교에서 연애하면 퇴학을 당해야하는지, 몸매 노출을 너무 강요하는 요즘 여학생 교복 디자인에는 기업의 어떤 상술이 존재하는지 그 속의 숨은 뜻과 논쟁하는 나의 학교생활은 차라리 선진적이다. 결코 숨길 수없는 삶과 죽음, 굶주림의 문제에 무슨 논쟁이 필요할까?
난민인권센터의 그 어느 분의 말처럼 사람이 먼저 아닌가?
인권은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안전하고, 굶주리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삶을 보장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그 누구로부터도 박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인류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명제라는 강한 인식이 공유되어야 한다.
무더웠던 지난여름의 날씨만큼이나 결코 가벼울 수 없었던 이번 방학의 경험으로 앞으로 내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건 그 첫 단추는 먹고, 입고, 편히 잠들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진지한 고민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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