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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Activities

[기고] 소수자가 난민이 된다는 것 - 소수자난민인권운동의 고민들

이 글은 2019 난센포럼 <한국사회와 난민인권> 6번째 시간 나영정님(소수자난민인권네트워크, 장애여성공감)의 발제내용을 기고 형태로 받은 글입니다. 난민인권센터에서는 난민과 관련된 시민분들의 다양한 경험과 목소리를 담고자 기고글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다립니다. 문의: refucenter@gmail.com  

 

2019 한국사회와 난민인권

 

소수자가 난민이 된다는 것 - 소수자난민인권운동의 고민들

 

20191205 나영정(소수자난민인권네트워크)

 

 

 

들어가며

 

소수자난민인권네트워크에는 난민을 직접 상담하고, 난민 신청 절차를 조력하고, 증거를 찾기 위해 노력하며, HIV 감염인 신청자의 경우 그의 치료제를 구하기 위해서 수소문 하는 역할을 하는 활동가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네트워크에서 난민 직접 지원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네트워크의 역할은 난민 인권, 성소수자 인권, HIV 감염인 인권 영역에서 활동하는 인권활동가, 전문가, 조력자들에게 소수자 난민 이슈를 알리고,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며, 정책과 문화를 바꾸려는 시도에 동참하는 것에 적어도 지금까지는 가깝다. 네트워크 실무팀에 현재 결합하고 있는 사람들도 매우 다양한데, 활동가, 연구자, 변호사가 있고 저마다의 활동 이력 또한 매우 다양하다. 오늘 이 자리를 통해서 소수자난민인권네트워크에 대해 소개하고, 성소수자와 HIV 감염인이 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개략적인 이해를 함께 도모하도록 하지만(별도의 ppt를 통해서), 이 글에서는 퀴어활동가로서 소수자난민 이슈와 의제를 만나가며 어떤 질문과 고민을 하게 되는가에 대해 간략하게 메모해보려고 한다.

 

 

소수자가 난민이 된다는 것.

 

네트워크 활동을 통해서 한국사회에서 성소수자, HIV 감염인이 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이들이 겪고 있는 이 ‘사건’들은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던 문제들을 확대해서 비추는 돋보기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생각이 들때마다 이진화가 지적했던 “동질감을 점검하고 이질감을 핑계삼지 않는 마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는 “선뜻 느끼는 동질감이나 친밀감은 엄연히 존재하는 다름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마치 난민의 존재가 한국사회의 문제를 알려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도구화하면 곤란하다. 난민은 그저 여기서 살아가야 하는 각각의 고유한 인격으로 여기에 존재한다. 다만 그들이 겪는 문제가 한국사회에서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사회의 문제와 연결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드러난 문제들을 어떻게 직면하고 해결해나갈 것인가라는 과제를 받아안게된다.


난민이 난민이기때문에 겪는 문제의 원인은 난민, 그 사람에게 속한 내재적인 것이 아니다. 난민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이다. 본국에서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 한국사회가 가진 조건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것이고 적어도 난민과 한국사회 ‘사이’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난민은 심사와 처분을 일방적으로 받아야 하는 조건에 있다. 난민이 겪고 있는 문제는 난민으로 온 그 ‘사람’을 심사하는 내용으로 전환되고 이는 곧 난민 개인이 겪는 고유한 문제로 치환되기 일쑤이다.

 

 

심사라는 구조적 차별

 

내 삶의 터전의 문제가 생겨서 원치 않은 이동이 강제되었을때 국경을 만나고, 국가에게 심사 받아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이유로 인해서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 자체는 19세기 이전에 상상하지 못했던 차별일 것이다. 굳이 여기서 ‘차별’이라는 말을 가져오는 이유는 난민심사가 현대 국가들이 차별을 상상하는 방식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미국 수정헌법에서 인식하는 차별은 ‘타고난 차이’이며 식별되는 차이이다. 대표적으로 성별과 인종이 꼽힌다. 이에 따라서 일부 동성애자들은 성적 지향이 타고난 차이임을 입증하려고 애를 썼(지만 성공한 적이 없)다. 게다가 ‘숨길 수 있다는 가정’ 때문에 인정받기가 까다롭다. 이로 인해서 드러내지 않기를 강요받는 ‘커버링’ (켄지 요시노) 개념이 생성되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는 성소수자 난민 심사 때 똑같이 나타난다. 더욱이 자유주의 전통이 강한 국가에서 차별이 가진 구조적인 속성은 쉽게 간과되고, 구조적 차별을 철폐하는 데 필요한 국가의 책임 또한 희미해진다. 차별을 겪는 사람, 특히 소수자 집단에 속한 사람(어떤 사건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차별을 받는다고 가정된)의 경우 공통적으로 겪는 ‘심사라는 구조적 차별’도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사회적 조건 속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고 호소를 해도, 호소하는 자의 존재 자체가 심사 받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차별의 원인을 그 속성을 가진 개인에게 돌린다.

 

“트랜스젠더 탈가정 청소년을 쉼터에 받을 수 없어요. 여성쉼터, 남성쉼터 어디에도 안맞잖아요. HIV 감염인은 성폭력 피해자 쉼터에 입소할 수 없어요. 공동생활이 어렵잖아요.”라는 답변을 보자. 여기서 문제시 되는 건 쉼터의 접근성이나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아니다. 오히려 트랜스젠더임, HIV감염인임 자체가 문제시 되고 있다. 이는 삶터에서 내쫒김을 당한 난민, 바로 그 사람이, 존재 자체가 심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상황이다. 이는 반차별 운동, 차별금지법제정 이후에 우리가 무엇이 좀더 주목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차별을 호소하는 그 사람더러 차별을 입증하게 하는 상황에서, 그것이 자신의 소수자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문제임을 밝히기 어렵다면 차별은 계속 재생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피해자다움이라는 문제와도 연결된다. 차별받는 피해자에게 기대되는 전형성과 ‘선량함’이 있다면 차별의 ‘원인’이 피해자에게 있다 하더라도 구제받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다시 말해 구제받을 가능성은 얼마나 그 피해자가 피해자다움을 확보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결정되기도 한다. 그간 인권 운동이 그리고 무수한 피해자가 그 피해자다움에 저항하면서 차별의 개념을 넓혀왔지만 피해자다움에 대한 기대와 기준 자체는 여전히 강고하다. 난민이 정말로 피해자로서 구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으려면 유엔난민기구가 정한 협약과 의정서에서 정한 난민 지위의 인정기준에 부합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그 마저도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다. 한국의 심사체계가 국제 기준을 자의적으로 축소/왜곡하여 해석하고, 실제 사람에게 적용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심사기준에서 제시하는 정체성의 전형성도 서구중심적, 전문가중심적, 동화주의적이다. 유엔인권규범에서 채택하고 있는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성별표현이라는 개념과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인터섹스라는 분류는 ‘독립’적이고 ‘확고’한 정체성이라는 개념에 근거하고 더구나 전형적인 삶의 방식을 전제한다. “청소년기에 정체성을 확립하고,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동일시하며, 그 집단에 속한 대부분이 선택하는 삶의 방식에 맞춰서 살아간다”는 전제 말이다. 전 세계 곳곳의 난민인권운동은 이러한 전형성에 도전하고, 성소수자 난민의 삶을 옹호하기 위해서 대안적인 서사를 개발하고, 심사기준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해나가고 있다. 현재 우리의 목표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전제(전형성이 권리의 근거가 되는 것)를 바꾸는 것은 난민을 ‘위한’ 것이 아니다. 도처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전형적인 삶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는 성소수자가 어떤 위험에 처할 수 있는지, 어떻게 재현에서 배제되는지, 어떻게 위기에 빠질 수 있는지를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다.

 

 

경제(중심)주의와 혐오

 

전형적 각본에 따라 정체성을 이해하는 문제는 경제활동을 위해서 난민신청을 하는 ‘가짜난민’이라는 강고한 프레임과 연결된다. 난민협약이 만들어질 1951년만 해도 경제적 이주와 정치적 이주, 박해로 인한 망명을 구분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지금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다. 1950년대에도 경제활동을 해야 ‘정상적인 시민’이라는기준을 확립했던 자본주의 질서하에서 이미 난민은 예외적인 존재로 배치되었지만, 지금의 이 불안정한 자본주의 질서하에서 이러한 구분은 더욱 의미가 없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경제활동을 하다가 죽고 다치고 있는 상황이 전쟁 수준이라는 지적을 많은 이들이 하고 있다. ‘합법적인 국가 경계’안에 있지만 노동하다가 불구화/무력화되는 삶, ‘국가 경계를 넘었다’는 이유로 노동하고자 하는 필요와 욕구 자체가 범죄시되며 불구화/무력화되는 삶 사이에서 경제활동 추구 여부를 따져 ‘가짜난민’ 과 ‘진짜난민'을 구분하는 것이 대체 어떤 정당성을 가질까.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느껴진다. 가짜난민에 대한 프레임과 그에 기반한 혐오와 차별의 정상화는 “마치 한국 정부가 한국에서 난민 신청을 한 죄로 저희를 벌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빅팀)의 말에서 이 ‘죄와 벌’의 문제가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정상적인’ 노동 허가를 받아서 비자를 취득해서 이주하는 것만이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내전과 재난으로 인해서 경제활동의 토대가 완전히 파괴됐거나 정치적인 이유로 살아갈 수 없는 것 (즉, 난민이 난민이 되는 조건) 또한 모두 경제적인 삶과 연결되어 있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경제활동과 직접 관련이 없다고 여겨지는 인권이나 권리를 사소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어떤 정치활동에 대해서 경제성장을 방해한다고 불온시하면서, 난민에게만큼은 완전히 경제 밖에 존재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주문이 아닌가. 이러한 혐오의 얼굴을 마주하면서 더 고민하게 되는 것은 경제와 인권이 분리되면 될수록 이 문제에 접근하는 우리의 역량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인권에서 경제적 문제는 사회적 권리 중 하나의 목록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안에서 전체 인권의 토대와 작동에 영향을 준다. 모든 불평등은 경제적 불평등과 연결되어 있다.

 

주류적 경제주의에 대해서 환멸을 느끼면서도 경제를 다루지 않는 방식으로 인권을 접근하는 것이 가진 한계는 소수자들의 삶을 계속 ‘먹고 살만하게’ 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성소수자도 먹고 살만해야 한다. 또한 성소수자는 국가발전과 경제성장에 기여하기 때문에, 혹은 그럴 때에만 인정받을 수 있는 정체성이 아니다. 이성애시스젠더정상가족 중심으로 만들어진 배분 시스템에서 생존하기 위해 그러한 시스템을 바꾸자고 비판하고 도전하는 불온한 사람이다. HIV감염인도 먹고 살만해야 한다. 단지 치료제만 국가로부터 공급받고 더이상 질병을 전파시키지 않고 그저 조용하게 살아야 하는 죄인이 아니다. HIV감염인이 차별과 배제를 거부하고 노동권을 주장하며, 다른 아픈 모든 사람이 당연히 받을 수 있고 받아야 하는 대접을 사회적 비용에 대한 죄책감없이 받아야 한다. 성소수자와 HIV감염인이 본국에서든 한국에서는 억압을 받는다는 것은 먹고 살기 어렵게 만드는 구조와 직결된다는 점을 놓치지 않을 때 우리는 ‘가짜난민’ 프레임에 제대로 도전할 수 있지 않을까.

 

 

질병의 범죄화

 

HIV감염인이 난민으로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문제 또한 한국사회의 문제를 정확하게 반영한다. 한국사회에서 HIV감염인은 공중보건을 위해서 관리당해야 하지만, 집단생활은 불가능하다고 전제된다. 다른 질병에는 적용하지 않는 ‘전파매개행위’에 대한 형사처벌은 HIV 자체를 범죄시한다. HIV감염인이 특정 난민 쉼터에서 거주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쉼터가 특정한 종교적 배경을 가진 문제도 있지만 바로 한국 정부 때문이기도 하다. HIV감염인은 군대에서도 강제 전역을 당하고, 구금시설에서도 강제로 독거수용이 되며, 여성폭력 피해자를 위해서 제공되는 국가 쉼터에도 거부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실정이다. 게다가 HIV감염인인 이주민과 난민은 한국에서 정착하기보다 떠날 것을 기대받기 때문에 치료제 제공 조차 안정적이지 않다. 질병과 국경에 대한 강한 통제가 이주민/ 난민 HIV감염인을 못살게 만드는 것이다.

 

HIV치료에 대한 눈부신 발전으로 이제 HIV 바이러스는 과학적으로는 전혀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6개월 가량 치료제를 복용한 경우 HIV바이러스는 체내에서 확인할 수 없는 정도가 되었다. 당연히 그 상태에서는 타인에게 전파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의료인마저 여전히 공포와 혐오를 갖고 있는 이 질병의 진짜 원인은 ‘성적 낙인’이다. 비규범적인 방식으로 성적으로 활발한 존재들에 대한 사회적 공포는 ‘동성애’ 혐오를 구성하는 강력한 내용이기도 하고 이슬람포비아를 이루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는 한국사회의 문제만은 아니다. 권미란은 어떤 난민을 만났을때 “HIV 유병률이 높은 국가에서 왔다고 관련 정보를 많이 알고 있을 거라고 여긴 것은 오산이었다. HIV확진을 받고 충격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고, 누구에게도 정보제공과 상담을 받지 못했다. 바로 의료기관으로 연계된 경우는 운이 좋은 편이다”라고 한다. 한국의 의료인들은 국내에서 에이즈 혐오가 심한 이유를 지나치게 감염인이 적기 때문이라고 한다. 의료진 입장에서 한평생 감염인을 한번 볼까 말까한 상황에서 HIV/AIDS에 대한 인식을 기를 기회가 없을 수는 있다. 아무리 그래도 의사가 가진 혐오의 수준이 대중들과 다르지가 않다는 것은 부끄러워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유병률이 높은 곳에서도 내적 낙인이 심각하고, HIV감염인이 폭행의 대상이 되고,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어린이들의 문제를 생각하면 감염인이 적어 혐오가 강하다는 식의 생각은 매우 순진한 것이다. 혐오감이 사회적인 차별과 폭력으로 나아가고 정치화되는 데는 주류의 굳은 의지에 기반한 혐오의 정당화와 확산 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질병의 범죄화는 결국 환자를 못살게 만든다. 권미란이 지적했듯이 “HIV 치료의 중요성과 예후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할지라도 불안정하고 열악한 난민신청상태에서 정기적이고 지속적으로 항레트로바이러스치료 및 각종 검사를 유지하기란 여간한 일이 아니다.” 태국 마사지업 여성종사자가 에이즈 발병으로 잇달아 생명이 위독한 순간에 발견되었다. 관광비자로 들어와 3개월만에 미등록 상태가 된 상황에서, ‘불법’ 업소에서 감시당하며 일하는 처지에서, 아파도 병원에 갈 생각 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주민 중에서도 HIV 테스트를 꺼리거나, 진단받은 이후에 치료제 복용을 하지 않아서 생명의 위기에 빠지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질병이 범죄시 될 때 환자는 질병을 치료하고 나아야 할 주체가 아니라 곧장 범죄자가 되어 버린다.

 

사하라 이남지역에서 발생하는 문제로 거론되는 ‘치료제 부족’의 문제는 한국사회에서 난민이 겪는 똑같은 문제이다. 이는 난민의 생명을 차등화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생명 (혹은 죽음) 정치와 연결이 된다.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 윤가브리엘 대표는 2019년 11월 29일에 열린 세계 에이즈의날 맞이 기자회견에서 “아픕니다. 아픈데 왜 치료를 안 해줍니까? 요양하고 싶으면 요양을 해야 되는데, 왜 요양 안 해줍니까? 일을 해서 먹고살아야 하는데, 왜 일을 못하게 합니까? 사람이 숨만 쉬고 살아있다고 그것이 살아있는 것입니까? 이렇게 AIDS환자들에게 아무런 인권과 권리를 보장해주지 않으면서, 왜 치료비 지원을 해줍니까? 차라리 치료비 지원도 해주지 말고, 다 죽게 내버려 두십시오!”라고 외쳤다. 이 발언은 치료제 지원은 확실하니까 한국은 그래도 HIV 감염인 상황이 나은 편이라고 자위하는 전문가, 당사자, 활동가들에게 벼락같이 꽂혔다.

 

 

재생산적 미래를 기대받지 않는 자들의 연대

 

장애인 운동이 탈시설 운동을 본격화하면서 장애여성공감은 ‘시설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품었다. 왜 장애인은 시설에 수용되어 사생활도, 사회적인 삶도 없이 사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생각되었을까, 왜 장애인은 강제 불임수술과 낙태수술의 대상이 되었을까, 이렇게 해도 된다는 국가의 권한은 어떻게 정당화되고 유지되었을까. 이러한 질문을 제기해 나가는 과정에서 장애인이라는 범주를 넘어 여러가지 방식으로 시설화된 삶을 살고 있는 존재들이 곁에 들어왔다. 난민에게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라는 수용시설을 제시하고, 거기에 머무는 동안 한국 정부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는 것, 인도적 체류지위자에게 가족결합을 허가하지 않는 것은 가족구성권을, 재생산권을, 성적권리를 박탈당하고 시설에 수용당해왔던 한국사회의 많은 소수자들의 삶과 겹칠 수밖에 없다(고은지, 김연주의 글 참고). 이성애시스젠더 시스템에서 불화할 수 밖에 없는 구조에서 살아가는 성소수자들과 ‘벽없는 감금’을 경험하고 있는 HIV 감염인을 비롯해 이렇게 갇힘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국가가 우리의 미래를 박탈하는 구조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그 구조를 적극적으로 운영함으로써 희망을 앗아가는 방식을 잘 알고 있다. 도심에서 퀴어퍼레이드도 하지 말고, 출근 시간에 휠체어장애인은 지하철도 타지 말고, 길에서 눕거나 구걸하지 말고, 예맨에서 제주도에 도착한 난민들은 세 명 이상 모여다니지 말라고 하는 목소리들과 지침을 보라.

 

피/난민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은 한국전쟁으로부터 본격화되었다는 성찰이 난민 혐오에 대응하는 논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과거에 한국이 국제사회로부터 받았던 도움에 대해서 재차 감사하고, 지금 한국에 찾아오는 난민에게 베풀라는 권유에 머물 위험이 있다.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피/난민을 만드는 구조,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라하더라도 부당하게 죽고 다치며 삶의 터전을 잃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서야 한다. 그러한 상황들은 우리 모두의 삶과 연결되어 있고, 그렇기에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들어야할 강력한 목소리는 바로 보호라는 이름으로 사회에서 격리되어왔던 소수자의 목소리다. 단지 지금을 살아있게 하는 것(인도주의)을 넘어서 정당하게 미래를 상상하고 계획할 수 있을 권리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보호의 대상들은 허락된 장소와 위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한편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의사소통을 위한 접근성이다. 시각, 청각, 언어, 발달장애를 가진 이들은 구조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기회를 빼앗겨왔다. 특히나 영어를 제외한 다른 언어를 쓰는 외국인에게 통역을 제공하는 것은 ‘언어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의사소통의 접근성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장애의 사회적 모델에 따라 소수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장애화되는 것은 사회적 환경에 따르는 것이다. 특히나 그 사람이 난민이라는 처지, 빈곤한 처지가 되었을때 그 사람의 역량박탈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소수자가 기대되는 것과 다른 이야기를 할 때 국가와 사회는 더욱더 소수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사소통 역량을 박탈하는 것은 이들을 통제하고 무력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혐오에 대응하기 - 난민, 성소수자, HIV감염인이 함께 하기 위해서

 

함께 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우리가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일방적으로 찾을 게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우리의 삶 또한 살리게 한다는 것을 우선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현미는 인종주의를 이렇게 정의한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생물학적 특징을 ‘본질적인 요소’로 보게 만들어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신념체계이다. 모든 개인은 특정한 인종적 특질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특질을 경제적 자원, 문화적 권리, 인권에서의 차등적 분배를 정당화하는데 활용한 것이 인종주의다. 인종주의가 사회적 통치 체제가 된 과정에는 제국과 식민, 발전주의라는 역사를 고려해야 하고 동시에 학교, 미디어, 종교, 법이라는 사회화의 기제들을 통해 강화되어온 제도적 인종주의를 분석해야 한다.” 또한 신인종주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종 대신 언어, 종교나 문화, 의식주 습관 등 ‘문화적 기표’를 이유로 특정 집단을 배제하는 것이다. 무슬림 생활양식과의 ‘양립불가능성’을 강조하는 이러한 신인종주의는 특정 문화권의 사람들은 사는 곳이 어떠하든, 이주와 이산의 경험 여부나 각 지역의 정치적 변화와는 상관없이 영구적으로 동질한 문화를 공유하고 실천한다는 전제를 하고 있다.” 박경주는 “신인종주의는 인종주의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진행된 인종주의적 행위패턴의 변환뿐만이 아니라, 인종주의를 통한 극우의 새로운 정치 전략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난민에 대한 인종주의는 보수의 쇄신이라는 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신/인종주의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영향을 주고 받고 있는지, 운동의 비전 안에서 인종주의 비판을 어떻게 포함할 수 있는지, 그것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이것은 생물학적 당사자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도 연결된다. 혐오와 공포가 피해/당사자를 감별하는 장치로 작동하면서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장애인, 성소수자, 난민의 혐오가 촉발되기도 했다. 피해의 원인을 생물학적인 조건으로 돌리면, 일시적으로 피해당사자가 명확해보이는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이는 생물학 자체를 통치의 수단으로 만드는 것일 뿐이며, ‘심사라는 차별구조’의 부당함을 지우고 당사자를 범죄화하는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최근 경기도 성평등기본조례를 반대하는 이들은 성별의 정의를 생물학적인 성별로 정의하는 개악안을 주장하고, 경기도의회에서 꾸려진 대책반이 이들의 의견을 받아 합의한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차별의 속성이 인종화되는 것에 저항하지 않고 인종적 차이를 권리 확보를 위한 자격으로 삼는 것은 인종주의를 영속할 뿐이다. 혐오가 특정한 집단을 향해 전략적으로 만들어지고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에서 차별의 인종화는 혐오 문제에 있어서 핵심적인 키워드가 된다.


성소수자, HIV감염인인 난민이 처한 상황을 직면하면서 기존에 해왔던 성소수자, HIV 감염인 인권운동은 피할 수 없는 질문과 도전을 받게 된다. 인권은 어디에 뿌리가 있는지, 권리의 언어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파괴되는지, 운동이 가진 책임과 밀어붙여야 하는 질문의 끝은 어디인지. 알게 되어서 너무 다행이고, 고민을 나누고 해결을 모색하는 활동을 지속하는 것으로 계속 해보겠습니다.

 

 

소수자난민인권네트워크 소개

 

소수자난민인권네트워크는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난민인권센터,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가 결성한 연대체로 다양한 활동가, 변호사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2017년 소수자난민 인권강좌 등을 개최하며 성소수자 난민과 HIV감염인 난민의 특수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였고, 「소수자 난민 권리를 위한 첫걸음: 무지개는 국경을 넘는다」 (2017) 가이드북을 제작해 난민지원단체, 출입국 등에 배포하였습니다.


난민문화제(2018), 서울퀴어문화축제(2018, 2019), 성소수자인권포럼(2019) 등에 참여하며 한국 내 소수자 난민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이들이 겪는 부당한 처우에 대해 공동 대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난민운동과 성소수자운동 영역에 알리고 연대하고 있습니다. 2019년에는 성소수자 난민에 대한 인권침해실태를 조사하고,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는 난민심사 기준을 연구 중입니다.


rainbowrefugee2017@gmail.com
https://www.facebook.com/rainbowrefugeeskr/

 

2018년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소수자난민인권네트워크 행진사진 

 

참고문헌

 

고은지(2019), ‘난민의 피로 자신의 피난처를 찾는 대한민국’, 비마이너, 2019/5/29
고은지(2019), 성소수자×hiv×난민 인권운동의 만남: 연대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성소수자 인권포럼] 자료집(미간행)
권미란(2019), 감염인난민: 실제 감염인 난민 지원 사례를 통해 소수자난민이 처한 인권침해 상황을 살핀다, [성소수자 인권포럼] 자료집(미간행)
김연주(2019), ‘난민은 어떻게 시설에 갇히는가 - 외국인보호소와 동향조사에 관하여’, 비마이너, 2019/9/18
김지림(2019), 소수자난민: 성소수자 난민에 대한 법원 판결들을 분석을 통해 성소수자 난민이 한국사회에서 극복해야할 편견들을 살펴본다, [성소수자 인권포럼] 자료집(미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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