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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기고] <신인종주의와 난민> 포럼에 다녀와서

난센으로부터 ‘신인종주의와 난민 – 낙인을 짊어지는 연대는 가능한가’ 라는 포럼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참가신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포럼의 소식을 접하며 2018년도 하반기, 온라인 상의 난민반대 여론형성과 언론의 지나치게 부실한 팩트체크에 질렸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는데요. 현장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어떤 다양한 방식으로 문제를 접근하고 연대를 도모하고 있는지 무척 궁금하여, 난센 활동가 및 자원활동가님들과 함께 토론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이 포럼은 2018년도, 제주도에서 난민지위 신청을 시작한 예멘인들에 대한 소식을 접한 뒤 일어난 일련의 난민 반대 운동을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하는 자리였던 것 같아요. 난센은 이 포럼에서 작년 한해 한국의 난민정책에 대한 발표를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요, 난민과 관련된 정부정책의 모니터링과 개선을 활동의 중점으로 삼고 있는 만큼,  한국에 도착한 난민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정부의 난민 대처방식이 왜 정당화 되기 어려운지를 차근차근 설명해주셨습니다. 또한 지난번 인종차별철폐의 날에 발언하셨던 난민 활동가의 발언 영상과 작년 단식농성에 참가했던 난민 당사자 목소리 및 시민사회 연대를 담은 영상 스케치 등을 보여주셨습니다. 

 

과연 ‘난민’ 당사자들을 하나로 묶어 설명할 수 있을까?

 

글을 읽으시는 많은 분들이 이미 느끼시는 부분이겠지만, 한국 사회의 인종주의는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2018년도는 다른 해와 달리 ‘난민’ 이란 법적 지위를 둘러싼 공방이 온라인 상에서 오고 가는 걸 넘어 ‘국민이 아닌 존재’, ‘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에 대한 혐오가 거리에 등장한 때였습니다. 살아온 과정들도 한국에서의 보호를 신청하는 이유도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하나로 묶여 어떠한 (이질적이기에 해로운) 문화적 공통점이 있을 거라 취급당하는 모습은 ‘신인종주의’라는 정의에 들어맞았고요. 물론 그런 혐오의 확산을 막기 위해 여러 시민들이 십시일반 도우려 팩트 체크를 하거나 자발적으로 쉼터를 제공하고, 시민단체들이 새로운 연대를 만들어나간 시기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자리의 그 누구도 난민문제에 대하여 ‘공부가 깊다’ 라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 사회자 신지영-


이런 현상들을 사회인문학 분야에서도 2018년도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이번 포럼에 참석하면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이 난민협약에 가입한 순간으로부터 25년이나 지났단 걸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지만, 인권선진국이란 타이틀을 위해 내건 유명무실한 제도였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연구할 만한 현상 자체가 나타나는데 시간이 걸렸을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게다가 난민들 대다수는 2019년 현재에도 매우 소수이기에 더더욱 배척의 대상이 되고, 당사자들이 겪는 매우 다른 상황들과 박해, 차별의 이야기는 거의  들리지 않습니다. 포럼에서 소개된 난센의 스케치 영상조차 매우 특정한 이야기밖에 담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사자와 당사자의 경험이 없는 자리에서 난민 문제에 대해 논하는 건 너무나 많은 한계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번 포럼의 토론 시간에 난민 신청 과정에서 겪는 피해를 호소하신 이집트 국적의 여성 난민분도 계셨으나 패널 구성원으로 참석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회자 역시 한국 사회의 다른 인권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난민의 경험들을 너무 쉽게 이용하는게 아닐까 우려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감히 누가 누구를 가르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많은 난민들을 만나고 이분들이 겪는 차별과 폭력에 대해 이야기해주시는 분들 역시 많이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런 분들이 포럼해서 해주신 말들 중 인상깊었던 부분들을 좀 더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예멘 난민 ‘위기’를 통해 본 인종화와 신인종주의

 

‘인종주의: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생물학적 특징을 “본질적인 요소”로 보게 만들어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신념체계’

- 발표자 김현미 -

 

첫번째 발제자(김현미)는 난민수용반대운동이 국민 청원 형식으로 나타난 점에 주목하며, 국민과 난민을 이분화하며 권리를 분배하고 누군가를 선별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어떻게 신인종주의와 맞닿아 있는지를 주목했습니다. 그동안 쉽게 생각했듯 피부색에만 기반한 차별은 아니란 겁니다. 20세기까지 이어진 유럽 주도하의 식민지 시절, 민족 및 인종의 차이는 극복 불가능한 본질적인 차이로 해석되었고 ‘야만인’들로 인해 ‘국가의 치안’이 흔들리니 그들을 통제하고 다스려야 한다는 정치적 의견이 주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이루어진 ‘민족’에 대한 차별도 인종주의의 한 갈래입니다.

 

21세기인 지금, 난민 수용 반대의 본질은 ‘예멘 난민’ 이란 네 글자에 압축된 이슬람 혐오와 극우주의에 있습니다. 피부색이 피부색 그 자체 뿐만이 아니라 어떠한 문화적/종교적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다고 단정짓고, 그 정체성이 문제적 특징들과 관련있다 생각하는 겁니다. 난민에 대 인지가 대중들 사이에서 전무했던 한국에서 2018년도는 모든 난민들이 예멘의 전쟁을 피해 먼저 들어온 난민 오백여 명으로 규정된 순간이며, 이 난민들은 모두 무슬림 남성이라고 기사 헤드라인으로 떴고, 이 때를 기점으로 ‘난민’이란 법적 상태는 인종화되었습니다.

 

여기서 간단한 통계를 소개하자면, 전 세계 무슬림 인구 중 20퍼센트 이하가 아랍계이며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오랜 시간동안 발전되다 보니 지역마다 상당히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얀마의 불교와 일본의 불교가 다르고, 가톨릭에서 개신교가 15-16세기에 분리된 것 처럼. 그렇지만 한국에서 무슬림들은 복사+붙여넣기를 한 것 처럼, 동일한 사람들이 이루어진 집단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이와 연결된 가장 중요한 시사점 중 하나는, 타자에 대한 불안을 어떻게 국가가 스스로의 통치 권한을 강화시키는 방법으로 사용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진짜 난민’과 ‘가짜 난민’을 구별하고 국가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만 받고 나머지는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구별의 권한은 누구에게 집중되며 그런 흐름은 과연 옳을까요? 난민 관련 운동을 진행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동의하는 부분이지만, 현재 한국의 난민제도는 심사과정에서도 너무나 많은 단순 실수가 반복되는 등 난민신청자들은 제대로 된 난민인정절차와 보호정책 속에 전혀 놓여 있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난민과 국민을 둘로 나누고, 난민이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 마냥 보는건 오히려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를 거꾸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019년 3월 23일에 열렸던 <신인종주의와 난민-낙인을 짊어지는 연대는 가능한가> 포럼

 

무엇이 한국에서의 신인종주의 태도를 합리화하는가

 

‘실질적으로 누적되어 온 불평등과 각자도생의 고통이 난민 반대의 정동과 함께 가고 있음을 주목한다면, 이 때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민주주의는 단지 타자인 이들을 ‘잘 수용하기 위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오직 경제적 가치에만 종속되어 온 한국의 사회적, 정치적 패러다임을 어떻게 변화시켜 나갈 것인지에 달려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토론자 나영 -

 

첫번째 발제에 대해 토론자(나영)는 신인종주의와 연계하여 세가지의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1. 예맨 여성의 인권을 위해 (남성)난민을 이땅에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것이 성립될 수 있는 말인가?

 

2. 난민반대의 논리와 함께 비국민으로 여겨지는 대상은 누구인가? 난민을 반대하는 것에 대한 목소리를 낼 때 오로지 난민들에게만 맞춰야 할까, 아니면 비국민들이 겪는 차별과 연계시켜 사고해야 하는가?

 

3. 지금 생명정치적 인종주의가 한국에서 어떤 식으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왔는지를 돌이켜 볼때 이는 한국의 민주주의 방식에 대해 어떤 시사점을 던져주는가?

 

시민권이 없는 대상들을 한국 국가는 항상 꾸준히 차별해왔습니다. 대표적으로 한국의 다문화주의 정책은 이주민들을 노동력의 유지 및 관리, 또는 출산을 통한 재생산 수단으로만 다루었고요. 정부정책에 내재된 심각한 자국민 및 자문화 중심주의가 나중에 큰 문제로 되돌아 올 거란 비판은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2018년에 예멘 난민에 대한 혐오감이 정치화되며 과거에 있었던 비판들이 훨씬 더 극명하게 드러난거죠. 특히 이주민들을 동료 시민이 아닌, 이해가 강요되는 생존경쟁자로 바라보는 건 한국의 다문화 정책이 신인종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스스로의 무덤을 판 결과이기도 합니다. 토론자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촛불혁명에 국한되어서만 안되며, 시민운동 역시 배타적으로 보아왔던 다른 주체들, 즉 소수자들을 참여시키는 방식으로 발전해야 한단 점을 짚어주며 발표를 마무리했습니다.



차별금지법, 지금 필요한 이유

 

‘혐오하는 사람, 차별하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다. 차별해도 되는 사회가 있을 뿐이다. 국가는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논란에서 일부 차별금지 사유를 삭제함으로써, 차별당해도 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메세지를 발신하기 시작했다.’

- 발표자 미류 -

 

인종차별철폐의 날에도 왜 차별금지법제정 찬성 피켓이 등장하는지에 대한 고찰과 함께, 두번째 발표자(미류)는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의 역사를 소개했습니다. 난민들에 대해 무관심할지언정 그래도 그들이 겪은 비극을 애도해주던 주류 반응이, 치안을 위협하는 잠재적 가해자로 내모는 형태로 변화한 것을 극우 포퓰리즘이 (한국이 아닌 다른 국가들에서) 등장한 방식과 연결지어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해주셨는데요. 다만 한국 내 산재한 차별에 대한 책임은 특정 진영만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니라고 합니다. 진보진영들과 현 정부 역시, 이러한 차별이 유의미한 정치적인 의견인 마냥 둔갑하는걸 방치하는 주체 중 하나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죠.

 

난민 신청을 하는 사람들은 균일한 집단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극우 포퓰리즘은 ‘난민은 이러하다’ 라고 특정짓습니다. 몰이해가 계속될수록 난민 개개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도, 그들을 동료 시민으로 여기어 연대하는 것도 어려워집니다. 단순히 난민을 환대하는 심성으로는 난민들이 겪는 문제들을 해결하는게 불가능하며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차별적 태도를 뽑아내는게 우선되어야 합니다.



심사라는 구조적 차별

 

‘우리가 난민심사를 받는다면 다 떨어지지 않을까, 핸드폰에는 회의록 밖에 없는데. 과연 정체성은 무엇이고, 정체성을 심사한다는 권력은 무엇인가. 국민국가 안에서 태어났단 이유로 나는 내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국가경계 밖으로 나가는 순간 이건 심사대 위에 올려지며 그 결과가 생존을 가른다니. 정체성의 언어 자체가 끔찍할 때도 있다.’

- 토론자 나영정 -

 

토론자(나영정)는 먼저 퀴어활동가로서의 난민 이슈를 접하게 되었을 때의 개인적인 경험들을 바탕으로 국가의 경계와 정체성 정치(“누가 정체성을 심사하는가”)를 비판했습니다. 예를 들어, 토론자는, 트랜스젠더이기 때문에 타국에서 난민 신청을 한 사례나 레즈비언이란 정체성 때문에 본국의 처벌과 위협을 피해 한국으로 망명온 사례를 도운 경험을 이야기해주셨는데요. 그렇다면 한국이 과연 난민들을 ‘보호’하거나 ‘구원’ 해줄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한 사회일까요? 실제로 한국에서 난민심사가 진행될 때 어떤 한국인 조사관들은, ‘아이를 출산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성소수자가 아니다’, ‘바이섹슈얼은 진정성이 없다’, ‘틴더(이성애 중심의 데이팅 어플)에 가입했으니 성소수자란 말은 거짓말이다’, 등의 발언을 합니다.

 

한편 토론 중 한국의 근현대사 속 여러 차별과 비이성적인 공포에 대해 잠시 짚어주셨는데요. 터무니 없이 적은 숫자의 소수자들을 병리화하고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는 현상은 제주도에 500여명 남짓한 난민들을 대상으로도 일어났지만, HIV/AIDS 라는 질병에 대한 인식과 관련해서도 일어났었습니다. 일제 이후 미군정 시기에 만들어진 수용소들 역시 인종적 타자들을 청소하고 싶어서 세워졌고,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70년대까지 조선인은 심사에서 선별하여 돌려보냈었습니다. 위험하고, 범법자고, 더러운 사람으로 얘기되며 수용소에서 갇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려보내지는 걸 보며, 제주도에 도착한 난민들의 출도(出島)를 제한한 한국정부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했단 걸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권리가 공인되고 승인받으며, 예산이 확보되고, 또 대중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이러한 절차 속에서 승인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활동가들은 귀를 기울여야 한단 말에 공감했습니다. 법적 조항 하나 바꾸는 식이 아닌, 보다 큰 틀을 바꾸고 평등을 향해 움직이는게 인권활동가들의 바람이라는 말도 와닿았습니다. 억압과 피해를 구조적인 피해로 설명하고 이에 대한 저항으로 만들어내는 운동들 중 하나가 페미니즘이며, 그렇다면 페미니즘 역시 국가의 통치권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수렴되어선 안된단 말과 함께 발표는 끝을 맺었습니다.(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이 기고문에서 다룬 것 이상으로 훨씬 더 자세하게 발표되었고, 토론 시간에도 이 주제로 두시간 가까이 질문이 나왔으나 글쓴이의 역량부족으로 인해 제대로 소개하지 못했습니다.)

 

마치며

 

하루만에 모든 관점들이 다 등장할 수는 없었지만, 원래 예정된 강의 시간을 훌쩍 넘긴 다섯시간 반은 조용히 뒤에 앉아있던 제게도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 자리였습니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시민운동을 전개시키는 여러 방법들, 페미니즘의 여러 갈래와 ‘타자’에 대한 공격들이 시사하는 점들, 극우 포퓰리즘 및 자국민 우선주의를 통한 선동 등에 대한 이야기들. 이번 포럼은 이러한 고민들에 대한 여러 대화들이 오고 간 자리였고, 앞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흐름에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이어 간다면 참 좋겠습니다.

 

 

자원활동가 김윤정 

 

* 포럼 자료집은 다음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nancen.org/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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