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학을 전공했지만 사회 문제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아이러니하게도 국제 정치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다. 정치는 복잡하고 미개하며 소수에게만 필요한 영역이라 생각했었다. 하물며 내 인생의 첫 ‘정치 활동’을 군 생활 도중에 참여한 2012년 대선으로 볼 정도이다. 이렇게 정치는 국가의 역할을 설명하는 단어에 불과했었다.
정치의 개념이 국가(통치)를 넘어 윤리(정의)와 경제(배분) 등의 의미로 새롭게 다가오면서 유의미한 정치 행위가 살면서 수 없이 이뤄져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치의 몫을 국가에만 맡겨버리는 ‘정치 활동’과 그 몫이 나에게도 유효하여 내가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서로 연결되면서도 굉장히 먼 거리에 위치할 정도로 정치의 모습이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좁은 의미에서 ‘정치 활동’이란 다른 이에게 위임된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한정적인 행위에 국한된다면,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이란 다른 이에게 영향을 주는 모든 보편적 행위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난센에서 만난 난민과 활동가는 나에게 모두 ‘정치적’이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을 나의 상황에 빗대어 보고, 다른 이의 관심이 나의 관심거리가 되어가는 ‘정치적’ 행위를 끊임없이 주고받는 곳이었다. 본인만이 홀로 남성 활동가였던 난센의 특수한 상황 때문인지 모르지만, 이전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 성평등과 여성의 권리와 같은 주제들이 이미 내 관심 영역에 깊이 자리 잡아갔다. 그 밖에 난민과 관련하여 생존, 노동, 교육, 아동에 대한 권리, 다른 활동가가 옹호하는 친환경의 ‘녹색’ 권리 등도 새로운 관심 분야가 되었다.
나의 ‘정치적’ 행위는 도입 단계에 머무를 뿐, 아직 삶으로 살아가는 것까지는 멀었다. 단지 이전에는 손가락 하나로 스쳐 지나갔을 여러 뉴스와 글이 이제는 내 손가락과 눈길을 머물게 하며 이후 재차 곱씹어보게 하는 단계에 다달았을 뿐이다. 난민 사유 중 하나인 여성 할례는 아직도 생소하지만 나의 ‘정치적’ 관심의 반경에 새롭게 진입한 주제 중 하나이다. ‘여성’이란 단어에서 한 발짝 물러서게 했었고, ‘할례’라는 단어에서 주저하게 되었던 주제인데 기회가 생겨서 여성 할례에 관한 다큐 영화인 김효정 감독의 <소녀와 여자>를 시청한 적이 있다.
영화를 보는 도중 저절로 미간을 찌푸리게 된다. 과한 장면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화면에 보이지 않는 상황이나 사실을 내포하는 대사 때문에 얼굴이 저절로 찡그려진다. 스페이스 바를 누르며 화면을 정지하고 재생하고를 반복한다. 오른쪽 화살표를 눌러 뛰어넘기를 할까도 생각해보았지만 내 감정 소모를 비축하자고 상황의 심각성을 내 맘대로 편집할 수는 없다. 나 같은 외부인이 보기에 할례 행위는 실제적인 효력 없이 단지 상징성만 존재하는 의식처럼 보이지만 그 작은 차이는 이후에 겪게 되는 피해와 대우의 크기에 비할 수 없다.
할례의 여부는 차별을 조장하고 성숙함의 기준으로써 이용된다. 할례의 결과로 개인의 지위와 자존감이 보존되고 공동체의 소속감이 증대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내외부의 멸시에서 오는 지속적인 고통보다는 개인의 신체를 잘라내는 일시적인 극심한 고통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할례에 대한 믿음은 사실 집단 최면과도 같아서 전통이라는 미망 아래 치러지는, 개인성을 파멸하는 집단적 합의에 불과하다. 할례는 개인에게 고통만을 요구하는 것을 넘어 성의 착취이고 여성에 대한 혐오 행위이다. 할례만 그럴 뿐인가?
난민 문제는 모든 주제가 포함되어 다양하고 복잡하다. 할례와 같은 생소한 주제부터 실제로 우리의 일상에서도 발견되는 주제까지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생소한 주제는 저절로 마주칠 수 없는 주제이기 때문에 인식과 관심이라는 ‘정치적’ 행위로 시작해야 한다. 주제를 인식하는 단계는 그들이 실제로 경험한 일을 상상 속에서 재현해 보게 한다. 인식의 한계 때문에 정치의 몫은 참여까지 이어진다. 참여는 책임을 포함하기 때문에 강요될 수 없고 오롯이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그 책임은 우리의 상상 영역에 침범하여 우리를 괴롭힌다. 마음의 문을 열어 그들을 공감하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가끔은 쓰나미처럼 덮쳐오는 그들의 상황이 너무 치명적이기도 하다. 상황의 잔상이 나의 삶에 불안으로 이어지는 것을 조금이라도 방지하기 위해 방파제 역할을 할 수 있는 마음의 문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일상에서 마주하는 주제는 정치의 몫으로 인정과 변화를 요구한다. 이미 차별이 내재화되고 혐오가 일상화된 문화에서 나의 차별적인 단어는 다분히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발견은 너무 자연스러웠던 무지함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고 차별을 옹호하는 나의 모습이 불편함을 넘어 죄책과 두려움을 일으키게 하였다. 난센의 다른 활동가들과 생각을 공유하고 대화하며 이전에는 언어화하지 못했던 나의 폭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지적해줄 때까지 이해할 수 없던 언어들을 발견하면 그것이 가진 구조적인 의미를 되새겨보고 대안적 언어의 사용을 고민하게 되었다. 언행을 조심하되 존재하는 차별성을 들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렇게 1년 동안 삶에서 내가 가진 정치의 몫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다. 난민 문제가 글로만 읽히는 제3세계의 뉴스가 아닌 삶으로 이해하고 참여해야 하는 또 다른 나의 이야기라는 사실과 일상의 문제는 타자가 아닌 나 자신을 끊임없이 대입해보고 고민해봐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활동가들에게도 배운 게 너무나 많다. 사람 관계를 이성애적 시각만이 아닌 사람과 사람으로 마주하는 관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고 나와 다른 모습을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했다. 함께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를 상상하게 하기도 하였고 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상과 가치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존경심까지 생겼다.
‘정치’라는 단어에만 집중하여 쓰다 보니 그것을 가능케 한 난센의 특별함을 빼먹을 뻔했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그 안에서 이뤄지는 연대는 난센을 거쳐 간 많은 사람이 추구하고 지켜 온 가치이다. 그들의 노고에 고마움을 느낀다. 존중과 연대가 있었기에 나는 내가 가진 정치의 몫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이미 2017년 다짐 중 하나인 ‘말과 글을 짧게 하자’가 깨어져 버렸으나 몇 장의 사진으로 그 설명을 대체하려고 한다. 난센안에서 ‘정치적’ 행위가 계속해서 이뤄지길 지지하고 응원한다. 그리고 나는 그 행위를 내 삶에서 연결해 나가도록 하겠다. 각자가 가진 정치의 몫이 올바르게 실현되는 그 날을 꿈꾸며 항상 나의 편이 되어 준 난센 식구들에게 감사하다는 말로 후기를 마친다.
(최준 前 활동가 작성)
나의 자리
우리의 자리
오늘도 수고
관심
경청
가족 아닌 사진
함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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