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은지
A씨가 난센에 놀러온 날, 새로 산 듯 깨끗한 신발을 보고 봉봉이 물었습니다.
"운동화 샀어요?
A씨가 답했습니다.
"네 야한 운동화"
봉봉이 놀란 얼굴로 물었습니다.
"네?? 야광이요??"
A씨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화이트 운동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얼마 전 만난 지인으로부터 난센에서 활동하고 난 뒤 제가 많이 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땐 농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농담도 많이 하고 가벼워진 것 같다고요. 예전에는 사람들을 만나면 진지하고 의미있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느꼈었는데 지금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삶의 무게가 더 무거워졌기 때문인지, 삶이 무거운 사람들을 만나 무거운 이야기를 잔뜩 들어야 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키득거리고, 주변사람들과 제 자신에게 행복한지를 묻는 횟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더 가볍게, 더 즐겁게, 많이 많이 웃으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이다은
주말을 앞둔 금요일 오후, 다소 무거운 공기로 가득찬 사무실을 홀로 지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샛노란 단풍나무의 꼭대기가 오렌지빛 햇살을 받아 더욱 노랗게 물듭니다. 몇 차례의 문의전화를 받고 나니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조용히 문이 열립니다.
“당신이 한주(가명)씨인가요?”
“네.”
“가리봉동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요. 커피, 차, 물 중에 어떤 거 드실래요?”
“전 괜찮아요.”
우리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습니다. 차 사고가 났는 데 어찌어찌하여 500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벌금을 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벌금을 냈는데도 불구하고 외국인등록증을 뺏기고 ‘강제출국명령서’를 받았고, 이로 인해 다니던 직장까지 잃은 것이었습니다. 난민신청을 하고 아직 아무런 결과도 받지 못 했기에 한국에 더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강제출국에 관한 법률조항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나중에 연락을 주기로 하였습니다. 면담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한주가 말했습니다.
“저기 있잖아, 나 예전에 사기를 당한 적이 있는데 그 사건 때문에 경찰에서 최근에 연락이 왔어. 온통 한국어로 되어 있어서 이해하기 힘든데 혹시 전화해서 한 번 물어봐줄래?”
“그래. 당연하지.”
경찰서에 전화해보았더니 피의자는 현재 형사재판을 받는 중이고 곧 있으면 재판결과가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기 당한 돈을 돌려받기 위해서 두 가지 방법이 있는 데, 하나는 법원의 배상명령제도를 활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소송을 제기할 경우 소송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일단 배상명령제도를 적용할 수 있는지 알아봐야 했습니다. 설명하기에 조금 복잡하고 법률용어가 난무하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하면 좋을 지 잠시 고민하다 말했습니다.
한주와 나는 각자의 영어로, 눈빛으로, 표정으로, 몸짓으로 서툴지만 천천히, 아기가 걸음마를 떼듯이 대화했습니다. 내가 들은 것이 맞는 지 되물어 확인하고, 내가 말한 것을 한주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물어봅니다. 우리는 더듬더듬 말하고 되묻고를 반복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제 3언어가 느릿느릿하게 형성되어갈 무렵 한주가 말했습니다.
“사실 나는 돈을 돌려받고 싶은 생각이 없어.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그 사람이 법의 대가를 치르는 일이야.”
“그거 알아?(웃음) 이건 내가 미국에 간 지 얼마 안됐을 때 겪은 일인데, 너처럼 사기를 당한 적이 있어. 영어를 잘 못하고 쉽게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었어. 정말 끔찍했지. 돈은 둘째치고 그 사기꾼이 꼭 처벌받기를 원했어. 지금 네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아.”
한주가 웃었습니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내 이야기를 주절거리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얼굴이 조금 빨개졌습니다.
“너는 좋은 사람인 거 같아.”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너한테 무얼 바라고 하는 말이 절대 아니야.(다급) 네가 이 일을 계속 한다면 나중엔 더 좋은 활동가가 될 거라고 생각해.”
예상치 못한 과분한 칭찬에 괜히 어색해서 또 내 이야기를 주절거렸고 한주는 어둑어둑해져서야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주말을 앞둔 어느 금요일 밤, 광란의 불금(!)을 보내지는 못했지만 마음이 따뜻해지는 밤을 보냈습니다. 퇴근길에 조심스레 내뱉은 숨은 어슴푸레한 밤공기 사이로 가볍게 흩어졌습니다.
오늘의 선곡은 검정치마(The Black Skirts)_EVERYTHING
이슬
사무실 안에서는 하루가 정말 금방 흐르는데, 그렇게 하루하루 지내다 보니 벌써 6개월을 난센과 함께 지냈습니다. 돌아보니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난센도 그렇고 숨을 헐떡이며 가는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쁘게 숨쉬면서 버티고, 버티다가 길이 보이고, 또 견디고, 길이 뚫리고. 그러다 다 같이 물 한 모금 마시는 순간들로 6개월이 지난 것 같습니다. 지금이 쉬어야 할 때인지, 버텨야 할 때인지도 모른채로 시간은 정말 금방도 지나갔네요. 그런데 참 잘 온 것 같아서 다행이지요.
저는 일정한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난센에 와서는 ‘구성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게 사람 사는 공동체’라는 것을 낯설게 배우고 있습니다. 여러 번 안정적이지 않다고 느꼈던 순간들이 있었음에도 행복한건, 아주 열심히 서로를 인정하고 세워가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서입니다. 그래서 ‘변할 수 있고, 그게 이상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기쁘게 알아가고 있습니다. 난센이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건 그런 것인 것 같고, 가까이서 배울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책을 읽다가 “우리는 늙고 사물은 부패합니다. … 우리가 만들어 낸 제도들은 곧 시대에 뒤떨어지고 효력을 상실합니다.”라는 구절이 이상하게 낯설었습니다. 저 구절들의 ‘우리’를 ‘나’로 바꾸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인 것 같아요. 내가 가진 틀과 관점도 낡을 수 있다는 게요. 그런 저에게 멈추지 않고 살아있는 공간을 만들어 내는 난센은 참 선물과도 같네요.
얼마 남지 않은 올해도 난센에서 일어나는 이런 일들이 한국 사회로도 넓혀져 가기를 바라면서… 3년이 지나면 풍월을 읊는다는 서당개처럼…후후후… 사무실을 지켜봅니다.
김지예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바쁘고 정신 없는 난센 사무실에 전화가 한 통 걸려옵니다.
“네 난민인권센터입니다.”
“나는 사라(가명)에요, 도움이 필요해요!”
사라님은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한 후 가족들로부터 살해협박과 폭력을 당했고 이를 피해
2011년 한국에 입국해 난민신청을 하였습니다. 이 후 교회에서 만난 한 난민신청자였던 지금의
배우자를 만나 귀여운 첫째 아이 아미(가명)를 낳았고 재클린(가명)이란 천사 같은 어린 여동생이
올해 4월에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이미 아미의 아버지는 난민신청이 전부 기각되어 일할 수 있는 비자를 뺏긴 채 출국유
예를 받은 상태이며, 어머니는 1심에서 패소하여 겨우 항소비(약 30-40만원)를 마련해 소송을 진
행 중이지만, 어린 아미의 경우 소송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소송을 진행할 수가 없어
비자연장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문제는 아이들이 아프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난민신청인에게 의료지원을 해주는 병원이 있지만
문제는 아미의 경우 아이의 신분을 증명할 서류가 없다며 유일하게 희망을 걸었던 병원에서 지원
불가 통보를 받은 것입니다. 3일 동안 잠도 못 자고 열에 들끓고 토를 해댔다는 아이를 안고 병원
으로 달려온 엄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부모 잘 만나는 것도 능력인 사회인데 두 난민 부부에게서 태어난 아미가 잘못한 거겠죠.
아니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학교 문턱 한 번 밟아보지 못한 채 친척들에게 노예처럼 부려지다가 유일
하게 자신을 품어준 교회사람들로부터 따스함을 느낀 사라님이 잘못한 거겠죠.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돈 없이 한국에 들어와 감히 우리들 틈에 섞여 살려고 했던 저 까만 피부의 저들,
저들의 존재자체가 그냥 잘못이었겠죠.
고은지
거듭하여 시국 선언을 읊조리게 되었던 10월 한 달,
개인적으로는 남편과 함께 살아가며 제 안에 기생하고 있는
비릿한 규범들에 대해 발견/깨어갔던 시간이 되었습니다.
공부를 게을리 했다는 생각에 수치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난민으로 분류되어지고 자신을 난민으로 설명해야만 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위해 싸워나가야 할 것들이 산더미 같은데,,,
싸우기 위해서!! 읽지 않던 텍스트들을 곁에 끼고 있습니다.
수치심을 안고, 게으르지만 게으르지 않으며 공부해 나가고 싶어요.
최근 활동가의 2차 트라우마를 주제로 난민 지원 네트워크에서 교육이 진행이 되었습니다. 난센에서 많은 이들의 이야기들을 거듭하여 들었던 것이 얼마나 스스로 안에 쌓여 있고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 구체적으로 깨닫게 되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계속 싸워나가려면 긴급히 쉬어야 할 때라는 것을 알지만 난센의 상황을 생각하면 쉬기가 어렵기도 합니다.
가족과 동료의 도움을 듬뿍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같이 밥 말리를 같이 듣고 싶습니다.
그가 이야기했던 것 처럼,
웃으며 그 때를 기다릴 수 있기를 바라고, 바랍니다.
어떤 인종은 우월하고, 어떤 인종은 열등하다는 철학이
완전히 폐기되고 영원히 버림받을 때가지
전쟁은 어디에나 있다.
어떤 국가에서건, 일등 계급과 이등 계급의 시민이 사라질 때까지,
인간의 피부색이 눈동자 색보다 중요하지 않게 될 때가지
나는 전쟁이라고 말할 것이다.
인종과 관계없이 모든 인간에게 기본적인 권리가 동등하게 보장될때까지
나는 전쟁을 말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이 비열하고 불행한 체제와
아동학대, 그래, 아동 학대와
피지배 계급을 억누르는 굴레가 완전히 파괴될 때까지
모든 곳은 전쟁이다.
우리 앙골라와 모잠비크, 남아프리카의 형제들
모두가 안고 있는
이 비열하고 비참한 체제와
하층민을 억누르는 굴레가
무너지고 완전히 파괴될 때까지
모든 곳은 전쟁인거야
전쟁이야
아프리카 대륙이 평화를 모르는 한
우리 아프리칸들은 싸워야해
우리는 이길거야. 우리는 확신해
악을 넘어선 선의 승리를
악을 넘어선 선의 승리를
악을 넘어선 선의 승리를
최준
을씨년스러운 날이 이어지니 마음도 쓸쓸해집니다. 추운 날씨 탓이라기보단, ‘의심’하고 ‘불온’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혹은 권력)라는 집단에 향한 불신은 내 안에서 날로 커지고 국가의 보호에서 벗어난 난민을 조력함에서 인간적인 감정 혹은 연민이 앞서게 되어 이성적 판단이 흐려진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감정조차 현실 문제를 온전히 직시하기엔 아직도 한 참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와 현재 이 땅에서 이뤄지는 통치 권력의 폭력적인 행위만큼 (혹은 보다) 악한 행위가 지금도 국가의 역할을 실패한 여러 지역에서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난센에 찾아오시는 분들이 겪는 위험을 상상해보고 짐작해보기만 했다면,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 내 곁에서 일어남을 보며 어떠한 위험도 발생할 수 있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가능할 수 없다고 믿었던 일이 실제로 발생할 때 그들의 불안은 나에게 전이되고 그들의 위험은 나에게도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위험의 공감이 이렇게나 생생한 이유는 국가 내에서 이뤄지는 정치 조작 사건에 대한 피해를 호소하는 분이 찾아왔을 때 그들의 주장이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는 ‘자백’의 내용과 유사하기 때문이고. 자신의 신념을 보호해주기는커녕 되려 가해자 집단의 폭력을 눈감아주는 국가의 사례를 접하며 정치적 대의(代議)를 상실한 국가의 위험성을 나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 상황이 제가 경험하는 무기력의 모든 이유는 아니겠지만 저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온’할 길을 찾아가려 합니다. 을씨년스러운 이 날이 을사년에 겪은 찬탈의 위기까지는 아니라는 것이,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에 기반을 둔 통치는 아니란 것에 안위할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개인의 권력을 위협하기 때문에 ‘불온’의 위험성을 지적하려 하겠지만, 저는 저와 우리의 ‘안전’을 수호하기 위해 불온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모든 종류의 ‘불온’이 필요한 때이지만 결국 올바른 방향의 ‘불온’ 또한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2016년 11월의 겨울, 스산한 바람에 작은 촛불은 위태할지라도 우리의 바람은 흩날리는 굵직한 불씨가 되어 타오를 것입니다. 나와 그들의 안전을 위해 ‘불온’의 아침은 밝은 햇살과 함께 오늘도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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