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카슈미르(Kashmir)에서의 폭력
시민들에 대한 폭력이 고질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곳, 인도령 카슈미르(Indian Kashmir).
이 곳의 인권운동가들은 공적으로 용인되고 있는 불처벌(impunity) 관행에 맞서 싸우고 있다.
1991년, 사학자인 알라스태어 램(Alastair Lamb)은 “인도령 카슈미르 지역은 더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식민지 상태로 묘사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음이 분명해 졌다”라고 밝혔다.
이 지역의 이러한 상황은 25년 동안 지속되어 왔고, 이 곳 주민들은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고통과 폭력을 겪어왔다. 그런 폭력이 카슈미르의 기억에는 상처로 남아있겠지만, 인도와 전 세계에서는 잊혀졌거나, 의도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마침내, 카슈미르의 이야기들은 새로운 소셜 미디어의 영향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지고, 공유 되고 있다. 인도 군대가 저지른 엄청난 인권 침해에 대한 증거는 신뢰할 만하고 설득력 있는 그리고 상세한 형태의 문서로 남아있다. 이러한 증거에 드러난 인도 군대가 자행한 인권침해 내용은 법적 정의에 비춰봤을 때 반인도적 범죄에 해당한다.
인도령 카슈미르는 세계에서 군사력이 가장 많이 배치 되어있는 지역 중에 하나다. 골짜기의 거의 모든 집과 가족은 실종, 총격, 적법절차에 의하지 않은 비사법적 살인(extrajudicial killings), 고문, 방화, 그리고 강간 등과 같은 군사력에 의한 폭력을 경험해 왔다. 죽임을 당했거나 불구가 되었거나, 또는 다친 사람들의 총 숫자는 아마 절대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아무도 이 잔혹한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지 않다.
사실상 1990년부터 카슈미르에서는 군인특별권한법(the Armed Forces Special Powers Act, 이하 AFSPA)과 같은 국가보안법들 때문에 반인도적 범죄로 고발된 군대 인사들에 대한 처벌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계속되는 군사력의 폭력 행위에 맞선, 정의와 권리를 위한 카쉬미르인들의 운동은 상당한 도덕적 목소리를 내고 있다. 희생자 가족들은 스스로를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라고 알리고 있지만, 실은 폭력행위의 주체가 되고 있는, 가장 모순적인 체제인 군사정권에 대항하고 도전할 용기를 애통함과 사랑을 통해 얻는다.
인도 실종자 부모들의 모임(the Association of Parents of Disappeared Persons, 이하 APDP)은 진실과 정의 추구로 하나가 된 수백명의 피해자 가족들을 모이게 했다. 1994년, 실종자 어머니들 중 한명인 파르비나 아한가르(Parveena Ahangar)가 이 모임을 만들었고, 이는 희생자들과 생존자들을 하나로 모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피해자 가족들의 관심 덕분에 APDP는 적법절차에 의하지 않은 비사법적 살인, 고문, 그리고 강간과 같은 범죄 문제들까지 다룰 정도로 확장 되었다. 그것은 또한 이런 인권 침해를 끝내며, 가해자들을 재판에 회부할 절호의 기회를 줄 법적 전략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실종과 또 다른 인권침해들에 대해 UN 최고인권위원회(UN High Commission on Human Rights)와의 협력을 통해 만들어낸 매우 상세한 문서는 이 지역에서 벌어졌던 폭력 행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다. 그것은 언제라도 카슈미르에서의 반인도적 범죄를 다루는 법정에서 기여할 증거 자료가 될 것이다. 그런 역할은 어떤 종류의 평화 정착을 위해서든 꼭 필요할 것이다.
죽일 권리
마수다 파르빈(Masooda Parveen)은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사법처리를 원하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다. 그녀의 남편인 굴람 모히딘 레구(Ghulam Mohiuddin Regoo)는 사업가이고 변호사였는데, 1998년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사업 경쟁자의 주도 하에 인도를 지지하는 과격주의자들과 군인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집에서, 그 후 “심문”의 명목으로 잡혀갔던 군대 캠프에서 고문을 당했고, 결국 사망했다. 증거를 감추기 위해, 그의 몸에는 지뢰가 매달아졌고, 그것은 폭발했다. 이틀 후 그 부서진 파편들은 집 앞 현관에 남겨졌다.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그럼에도 혼자 어린 아이들을 길러내야 했던 마수다 파르빈은 남편에 대한 재판을 요구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군대가 카슈미르의 법정들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인도 대법원으로 가기로 선택했고, 남편의 부당한 죽음에 대한 배상을 위해 청원서를 냈다. 그 청원은 대법원이 검토하기 전에 두 번이나 거절되었다.
법정에서의 군대의 냉담한 반응은 놀라운 것이었다. 군대의 사건 관련 진술에 대한 가장 적절한 해석은 결국 군대가 레구를 인간 방패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군대의 설명에 따르면, 레구가 파키스탄에서 교육을 받은 전투원이었다는 것이 심문을 통해 밝혀졌다고 했다. 군대는 “그가 (적의) 은신처로 가는 순찰대를 이끌었다”고 진술했다. “한 순찰대는 레구와 함께 은신처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는 은신처에서 50미터 못 미치는 곳에서 순찰대를 세웠다. 그가 도망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 확인된 후, 레구는 앞으로 가는 방향으로 풀려 났다. 그가 구멍을 뚫려고 노력했을 때, 그를 죽게 만들었던 폭발이 발생했다.
2007년, 대법원은 군대에게 승소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결국 군인들에게 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죽일 권리를 허용하는 AFSPA의 조항과 관련하여, 그것이 카슈미르에서 인도 규율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필수적임을 주장했다. 이제 인도인이라기 보다는 카슈미르인으로 여겨지는 마수다 파르빈은 재판 결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이 판결 이후, 인도는 어떻게 나를 인도 시민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어떤 권리로?” 그녀는 남편의 죽음에 관한 기억에 사로잡혀 있다. “그가 그들에게 대체 무엇을 했나? 그들은 그를 죽였다. 그리고 나서 그의 시신을 훼손했다.” 그녀는 정의를 위한 자신의 투쟁이 그녀가 겪은 만큼, 아니 그것 보다 더 한 고통을 받은, 그럼에도 침묵하며 무력하게 있도록 강요받는 많은 이들을 위한 싸움이라고 느낀다. 또한 인도 군대 폭력의 희생자와 생존자들의 공통된 감정을 되새기며, 삶이 다하는 날까지 정의를 위해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2012년 5월, 대법원은 파트리발(Pathribal) 가짜 교전 사건에서 다시 한 번 군부대를 처벌하지 않는 관행을 지켰다. "가짜 교전(Fake Encounter)"은 인도의 치안 유지와 반란 진압 계획의 암호화된 어휘로부터 나온 용어로, 군부의 연출된 총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널리 이해되고 있다. 다르게 말해, 결국 그것은 경찰이나 군대에 의한 적법절차에 의하지 않은 비사법적 살인을 뜻한다. 2000년 3월, 파트리발에서, 5명의 카슈미르 마을 사람들이 군대에 의해 납치되고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그 희생자들은 차티싱포라(Chattisinghpora) 학살의 책임이 있는 무장세력들로 여겨졌다. 차티싱포라 학살은 무장한 전투원들이 35명의 시크교도를 죽였던 악명 높은 사건이었다. 미 대통령 빌 클린턴(Bill Clinton)의 인도 방문 직전에 학살이 일어나면서 이 문제가 국제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다. 국제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의 2000년도 보고서에 인용된 유일하게 살아남은 목격자에 따르면, 가해자들의 정체는 약간 불분명하다. 그들은 인도 군복을 입고 있었고 학살 중에는 힌두교 슬로건을 외쳤다고 했다. 그 마을에서 반 마일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배치되어 있던 인도 군부대는 3시간이 넘게 진행되었던 학살을 막기 위해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 학살이 일어난 며칠 후, 다섯 명의 남자가 카슈미르 남부인 아난트낙(Anantnag) 지역에서 군대에 의한 "교전"으로 인해 죽었다. 군대는 살해된 남자들이 학살에 책임이 있는 “외국 무장세력들”이었다고 주장했다. 시신들은 묻혔고 책임장교들은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군대가 지역 남성 17명을 납치 했고, 군대에 의해 죽임을 당한 남성들은 무장세력들이 아니라 지역 농민들이었다는 사실이 마을 사람들의 시위로 인해 밝혀졌다. 살인은 계속 되었다. 4월 3일, 경찰은 바락포라(Barakpora)의 시위자들에게 발포하였고, 이로 인해 실종자들 중 한 명의 아들을 포함한 8명이 사망했다. 대규모 시위들이 계속 되었고,파드리발 마을 출신 주민들의 DNA 검사를 통한 신원확인을 거쳐 시신 발굴과 이에 따른 조사가 진행되었다.
2003년, 가짜 교전에 대한 조사는 중앙수사국(Central Bureau of Investigation; CBI) 으로 넘겨졌고, 이에 대한 보고서가 2006년 만들어졌다. 중앙수사국은 이 보고서를 근거로 7번째 라슈트리야(Rashtriya) 소총 부대에 속해 있던 다섯 명의 군대 장교들에 대해 납치와 살인 죄로 고소하였다.
군대의 반응은 AFSPA를 들먹이는 것이었다. 그 사건은 대법원까지 갔고, 대법원은 2012년 5월, 군대에게 장교들을 시민 법원에서 재판을 받게끔 내주거나 군법회의를 실시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했다. 오랜 후에, 군대는 후자를 택했다. 국제앰네스티는 “군대에게 군법회의라는 첫 번째 선택권을 줌으로써, 이 판결은 잠무카슈미르에서의 적법절차에 의하지 않은 비사법적 살인이라고 주장되는 다른 사건들의 기소 면제를 강화해 준 셈이다.…(중략) 대법원은 보편적이며 헌법이 보장하는 생명권을 지키는 것 대신, 면책과 같은 과도한 힘을 군대에게 주는 비상사태 법률들에 의존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AFSPA 하에서, 군 인사들은 델리(Delhi)의 중앙정부가 승인한 허가 없이는 고소 당할 수 없다. 이러한 갈등이 시작된 이후로 그와 같은 허가에 대해 기록된 사건은 없다.
카슈미르의 한 NGO가 정보 공개를 청구했으나, 잠무카슈미르의 내무성은 “잠무카슈미르의 군대 특별법 하에서 1990년부터 2011년까지 주(州)정부에게 내무부와 국방부가 고소에 대해 허가해준 바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고 단언했다.
파트리발 가짜 교전 사건에 대한 군법회의는 2012년 9월에 열렸다. 희생자 가족들과 목격자들은 공포와 협박을 받았으며, 심지어 재판이 열리는 날짜와 장소에 대해서도 제대로 고지 받지 않아 증언을 할 수도 없었다. 2014년 1월 23일, 군대는 “증거 기록은 고소된 사람들 중 누구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구체적 정보에 근거하여 이뤄진 경찰과 군대의 합동 수사였다는 점은 밝혀냈다"라는 납득할 수 없는 설명을 하면서 군법회의를 중단해버렸다.
사실상의 불처벌
경찰은 군대와 관련된 인권 침해에 연루되어왔다. 경찰 또한 그들이 저지른 폭력에 대해 처벌받지 않고 있다.
이 점과 관련된 경우는 2010년 6월, 비좁은 장소에서 17살이었던 남학생 투파일 아흐메드 마투(Tufail Ahmed Mattoo)가 최루탄에 맞고 사망한 사건이다. 그는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시위자들을 지나쳐 걸어갔다. 그들은 몇 달 전 "외국 전투원"으로 몰려 군대에 의해 납치되고 죽임을 당한 3명의 젊은 청년들을 위한 시위 중이었다.
6월 11일, 경찰과 불법 무장단체들은 최루탄을 발포하고 있었고, 경찰봉으로 시위자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투파일의 아버지인 무함마드 아슈라프 마투(Muhammed Ashraf Mattoo)는 기자회견을 준비했고, “이 사건의 유일한 ‘공적인 목격자’인 그 여성은 고통스러운 투파일의 죽음에 대한 사건을 들려준다"며 아들의 죽음을 목격한 증인의 설명을 전했다.
“그녀는 '6월 11일 금요일, 꽝 하는 소리가 났다'고 말한다. 수류탄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였다는 그 쾅 하는 소리는 '실제로 최루탄이 발포되는 소리'였다. 그녀는 그 폭발을 듣기 전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사이드 사힙 슈린(Syed Sahib Shrine)에서 가니(Gani) 기념비 쪽으로 뛰어가는 3명의 남자아이들을 봤다. 그들 중 한 명이 투파일이었다. 경찰들은 그를 바싹 쫓고 있었다. 투파일은 운동장 문으로 들어갔지만 진흙에서 미끄러지면서 멀리 갈 수는 없었다. 2명의 잠무카슈미르 경찰들은 경찰차에서 내렸고, 투파일을 잡으러 운동장으로 갔다. 경찰관들은 '널 내버려 두지 않을거야'라고 말하며 카슈미르 말로 투파일에게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경찰들은 가까운 거리에서 투파일을 겨냥해 최루탄을 발포했다.' 경찰관들은 투파일의 시신 가까이 다가왔다고 한다. 그녀는 '나는 가까스로 투파일의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던 경관의 팔을 잡았지만, 나를 잡은 경찰에게 쏘라고 명령한 다른 경찰이 나를 땅으로 밀쳤고, 내가 잡은 손을 뿌리치게 했다. 그들은 도착했을 때 탔던 같은 흰색의 경찰차로 달려갔다. 투파일은 그 최루탄으로 인해 머리가 깨져 바로 사망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투파일의 가족이 지역 경찰서로 갔을 때, 경찰은 그 사건 보고의 제출을 거절했다. 가족은 경찰에게 그 사건을 기록하고 조사하라고 지시를 내린 지역 법원으로 갔다. 1년 후, 경찰 수사가 어떤 진전도 이루어지지 못 했을 때, 가족은 특별 경찰 수사를 지시한 스리나가르(Srinagar)의 고등 법원에 진정서를 냈다.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2012년 11월, 1년이 조금 지난 후, 그 경찰 팀은 스리나가르 1심 법정에 그 범죄의 가해자들을 ‘추적할 수 없다’는 이유로, 투파일의 가족에게는 알리지도 않은 채 사건 종료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보고서 내용은 투파일의 살인자들을 밝혀낼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것이었다. 투파일의 가족이 수사 종료에 대해 알게 되어 잠무카쉬미르 고등법원에 이를 호소했다. 투파일의 가족은 투파일의 사망원인이 최루탄이라고 진술한 의사들의 검시 보고서와 같은 결정적 증거들과 목격자 증언들이 수사과정에서 무시됐다”고 한다.
경찰 수사에서 투파일을 쐈던 경찰과 대면했던 목격자는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수사 보고서는 그녀가 지목한 용의자에 대한 모순적인 설명을 근거로 그녀의 증언을 묵살해버렸다. 첫째, 목격자가 지목한 그 남자는 실제로 재단사이지 경찰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둘째, 그가 경찰이긴 하지만 사건 당일 그 지점에서 복무 중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2014년 2월 14일, 잠무와 카슈미르 고등법원은 경찰에게 투파일의 죽음에 대해 다시 수사할 것을 지시했다.
투파일의 아버지는 아들을 위한 싸움의 승패가 어디에 달려있는지 분명하게 이해한다. 그는 “나는 모든 시민들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당하게 대우받을 권리를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정의는 기본적 인권이고, 인권은 지역, 인종, 또는 언어와 관계 없이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국제사회의 침묵과 인도 정부, 법원, 그리고 군대의 적극적인 방해에도 불구하고, APDP와 같은 모임들이 전개하고 있는 카슈미르인들의 정의를 위한 운동들은 결국 국제범죄에 대한 고발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된다. 카슈미르 주(州) 인권위원회(The State Human Rights Commission, SHRC)는 많은 결점들과 부족한 자원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랫동안 처벌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범죄들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다. 그것은 국경 지역의 표시도 없는 수천의 무덤들에 대해서도 조사했다. 1990년대 초반에 벌어진 잊혀진 학살들, 그리고 쿠난 포슈포라(Kunan Poshpora)에서 발생했던 많은 강간 사건에 대해서도 재수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카슈미르의 법원들에서 새로운 고발들이 이뤄졌다.
카슈미르와 국제 재판
위와 같은 범죄들의 진상을 밝혀내고, 사법 처리를 추구하는 것에 대한 카슈미르인들의 주장은 국제인권법과 일치하는 것이다. 인권 침해의 규모와 처벌되지 않는 지속적인 관행을 고려해 볼 때, 사법 처리를 가능하게 할 유일한 방법은 국제범죄에 대한 고발을 통해서이다. 이것은 카슈미르 분쟁에 대한 합의된 그리고 평화적 해결에 있어 필수적인 부분이다.
국제법은 적어도 처벌되지 않는 관행과 국가 주권에 대한 주장으로 전복될 수 없는 이상적인 정의를 제시하고 있다. 국제법은 심각한 인권 침해의 희생자들과 전체 사회가 가지는 권리들, 즉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볼 권리, 진실을 알 권리, 배상과 또한 비금전적인 형태의 보상를 받을 자격, 또한 새롭고, 재정비된, 그리고 책임을 감당할 제도들에 대한 권리들을 인식해 왔다. 인권 침해의 가해자들에 대한 사법 처리가 카슈미르의 평화정착 과정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이 카슈미르에서 인식되어야만 할 것이다.
국제법에는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들에 대해 제한하는 법령이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20년 넘게, 전쟁, 국내분쟁, 정치적 탄압으로 인한 심각한 인권 침해 희생자들로 인해 제기된 문제점들은 국제인권 매커니즘(mechanisms)을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왔다. 과테말라(Guatemala)부터 캄보디아(Cambodia)까지 전쟁 이후의 사회들에서, 인권침해의 가해자들은 희생자들, 생존자들, 지역 NGO들, 그리고 법정들과 협력한 국제 인권사회의 개입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카슈미르는 불행한 예외로 남아있는 것이다.
1948년, 유엔이 카슈미르를 분쟁지역으로 인식하고,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이 카슈미르의 미래를 결정하는 주민투표를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가 이 분쟁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국제적으로 유지해올 수 있었던 것은 막대한 양의 지원 덕이 크다. 내란이 일어나는 것은 파키스탄의 간섭 때문이라는 인도의 입장은 그저 설명하기 편한 거짓말이다. 인도의 법규에 맞서 싸우는 과격주의자의 숫자는 몇 천명 이상인 적이 없었으며, 인도 군대에 따르면 현재 그 숫자는2~300명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인도는 전 세계 사람들로 하여금 카슈미르의 문제가 반란인 것처럼 믿게 하겠지만, 사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반란 그 자체는 카슈미르인들의 기본적인 자결권을 인정하지 않는 문제에 대한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막대한 군대의 주둔은 이 지역의 주민들로 하여금 공포에 사로잡혀 Azadi (자유를 뜻함. 특히, 잠무카슈미르주의 자결권에 몰두하고 있는 운동가들 사이에서 혁명, 자유 등의 의미로 사용됨-역자주), 즉 자유를 위한 투쟁을 포기하도록 할 것이다.
그 동안 카슈미르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을 저지당했다. 지역 카슈미르의 텔레비전 채널들은 2010년 이후로 금지 되어왔다. 인권 침해에 책임이 있는 인도 정부를 견제할 수 있는 국제사회의 진지한 노력의 부재로 인해, 이 국가 폭력과 이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어 왔던 것이다. 스리랑카(Sri Lanka)의 전쟁 범죄에 대한 수사 과정에서의 유엔의 적극적 역할과 카슈미르의 경우에서의 불간섭주의적인 태도는 뚜렷하게 대조되고 있다.
유엔처럼, 미국 또한 재판에 회부되는 범죄들로 고소된 인도의 군대 장교들이 미국 땅에 있을 때 그들을 데려올 기회들을 포기하면서, 사실상 카슈미르에서의 인권 침해들을 못 본체 해 왔다.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Barack Obama)가 2008년 선거 준비 기간동안 카슈미르 지역의 지속적인 평화를 위해서 분쟁이 해결되야 할 필요성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은 그의 발언에 대한 인도의 격렬한 반응 후 조용히 사라졌다.
미국의 외교 정책적 합의는 군대 대치 긴장도가 아주 높은 통제선(Line of Control, LoC)을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국제적인 국경선으로 바꾸어 현상태를 공식화하려는 개념 정도로 보인다. 이 제안은 분쟁의 역사와 갈등의 역학을 무시한 것이다. 통제선은 1948년의 휴전선을 나타낸다. 그곳은 인도와 파키스탄 군대가 첫 번째 전쟁이 끝날 무렵 대치했던 곳이다. 그것은 카슈미르를 인도가 다스리는 그리고 파키스탄이 다스리는 두 곳으로 나눠버렸다. 다른 분단의 현실처럼, 이것은 마을들이 나뉘어지고, 가족들이 서로 헤어져야 하기 때문에 몹시 분통한 일이다. 카슈미르 사람들은 이를 "쿠니 라키르(khooni lakeer), 즉 피의 선(line of blood)"이라고 부른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실행 가능한 제안 내용은 갈등을 부추기는 분단상황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한 제안들은 다음과 같은 단계들을 포함하고 있다. 통제선 주변의 비무장화와 자유로운 이동, 모든 정치범들의 석방,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하는 모든 업악적인 법률을 없앨 것, 국제범죄 법정과 같은 기제들을 통한 인권 침해에 대한 책임 추궁과 사법 처리, 특별하게 지정된 시간 내에 이 지역의 다양한 거주자들의 바람에 따라 지역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절차를 만들어 내는 것 등이다. 카슈미르의 정치학자 누르 아흐메드 바바(Noor Ahmed Baba)는 위의 제안들과 더불어, 카슈미르 특유의 정신으로부터 나온, 기본 원칙을 덧붙였다. 그것은 카슈미르를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서 분쟁 지역에서 평화의 지역으로 바꾸는 것이다.
슈브 마서(Shubh Mathur)
슈브 마서(Shubh Mathur)는 인도의 인류학자이다. 그녀는 기억과 정의, 인권, 폭력의 의미, 국가와 국경, 사형, 환경 윤리학, 남아시아와 그 주변 지역들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힌두교 민족주의의 일상(The Everyday Life of Hindu Nationalism)>이라는 그녀의 첫 번째 책은 [Three Essays Collective Press]에 의해 출판 되었다. 그녀는 최근 카슈미르의 실종자 가족들과 공동으로 민족학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있다. 실종자 부모 모임(the Association of the Parents of the Disappeared)에 대한 더 많은 정보는 disappearancesinkashmir.org 에서 찾을 수 있다.
출처| http://fpif.org/terror-impunity-kashmir/
번역|유윤정 (난민인권센터 통번역자원활동가)
감수| 난민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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