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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Data on Refugees

[NY TIMES] 이상적인 난민촌을 건설하는 방법 I

이상적인 난민촌을 건설하는 방법 I

 

MAC McCLELLAND. 뉴욕타임즈 2013.02.13.


시리아 국경 근처 터키에 위치한 난민 캠프 킬리스. 뉴욕 타임즈의 토비아스 허츨러(Tobias Hutzler)


외부인의 눈으로는 터키 킬리스의 시리아 난민들을 위한 임시 거처는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곳으로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감옥 같아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터키 전 지역에서 올리브 숲을 찾아볼 수 있지만, 이곳 난민촌에서만큼은 찾아보기 힘들다. 아치형 철교(사진 오른쪽 위 : 역주)는 시리아로 통하는 관문을 의미한다. 그 오른쪽으로 “터키 공화국 총리실 산하 재난 및 긴급상황 관리 수용 시설”이라 알려진 시설물이 들어서 있다. 높은 관문이 그곳으로의 입장을 막고 있고, 가시 돋친 철조망이 그 벽을 두르고 있다. 그 주위로 경찰관과 사설 경비원들이 서성이고 있다.

 

세계의 많은 피난민들이 열악한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킬리스 난민촌의 상황은 우리가 짐작하는 난민촌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이곳은 난민촌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정돈된 상태를 보여준다. 난민촌 입주자들은 금속 탐지기를 통과하기 전에 난민촌 입장을 위해 자신의 지문이 새겨진 카드를 스캔해야 하며, 그들이 지닌 모든 물품을 엑스레이 기계에 통과시켜야 한다. 입장 이후 보이는, 2,053동의 똑같은 컨테이너들이 정렬된 난민촌 안쪽의 풍경은 건실해 보이기까지 한다. 허름한 난민용 텐트는 이곳에 없다. 썩은 쓰레기나 하수 같은 냄새 나는 것들도 없다. 이런 환경에선 난민촌에서 주로 벌어지는 물자부족 현상이나 입주자 간 갈등이 일어날 것 같지도 않다.


킬리스의 입구에서. 뉴욕 타임즈의 토비아스 허츨러(Tobias Hutzler)


2011년 4월 29일, 263명의 시리아 내전 난민이 터키 국경을 넘었다. 만 하루 만에 터키 정부는 남부 하타이(Hatay) 지방에 긴급 텐트촌을 세웠다. 또한, 삼 년이 안 돼서 약 500마일 길이의 시리아 국경지대에 21만 명을 수용하는 22개의 캠프를 세우기도 했다. 2012년에 개방한 킬리스 난민촌은 컨테이너가 공급되는 여섯 개의 난민촌 중 하나이다. 컨테이너는 유입 난민들에게 더욱 나은 거처를 마련해 준다. 취재팀이 지난 8월 방문했을 때엔, 킬리스 난민촌은 이미 만원(滿員)이었으며, 많은 시리아 난민들이 난민촌 밖에서 진을 치고 입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취재팀이 난민촌에 입장했을 때, 터키 가지안테프(Gaziantep) 근교의 아파트에 거주하는 시리아 난민출신 통역관 아흐마드 아주즈(Ahmad Ajouz)는 굳이 “정말 깨끗하다.”란 말을 통역할 필요가 없었다. 새 벽돌로 가지런히 정돈된 길거리에서 터키인 청소부들이 하는 일은 단순히 도로용 청소 트럭을 정비하는 일뿐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트럭 한 대가 물보라를 뿌려대며 길거리를 문지르며 청소하던 것이 생각난다.

 

놀라움은 청소차로 끝나지 않는다. 웬만한 도시 근교와 비등한 수준의 가로등 개수, 맥도날드 어린이 방 수준의 놀이터들, 전기 및 배관 작업이 가능한 기술자들, 소화전 등 난민촌의 모습이라 믿기 힘든 것들이 이곳 킬리스 난민촌엔 있었다.



임시로 세워진 카페와 새 가게.뉴욕 타임즈의 토비아스 허츨러(Tobias Hutzler)


몇몇 큰 구조물들이 난민촌의 학교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중 첫 번째는 올리브 유치원이었다. 취재팀이 방문했을 땐 아이들이 아직 수업을 들어오지 않았었다. 반짝거리는 타일 바닥을 지나 넓은 복도로 들어서자 목소리가 울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의 한 장면이 터키의 국기들과 함께 벽을 수놓고 있었다. 그 가운데 “환영합니다.”라는 글이 적혀있다.

 

금발에 붉은 립스틱을 바른 26세의 터키인 원장 굴킨 도간(Gulcin Dogan)은 한 교실 앞에서 우리 취재팀을 맞아 주었다. 그녀의 설명을 따르면, 유치원은 두 층으로 이뤄져 있으며 각 층이 약 450명 정도의 한 학년을 수용한다고 한다. 심리학을 전공한 그녀는 원장직과 더불어 아이들을 위한 상담사 역할도 맡고 있다. 많은 아이들이 심리치료 등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다음 수업시간이 끝나자, 학생들이 교실로 돌아왔다. 창문으로부터 아이들이 낭독하고 손뼉 치는 소리를 여러 번 들을 수 있었다. 시리아 사람들의 요청으로 2,225명의 학생이 남녀분반으로 수업을 듣고 있다. 한 시리아인 교사는 이곳 킬리스 캠프의 학교가 시리아 내의 공립학교보다 더 낫다고 인정할 정도다.

 

필자와 같은 호텔에서 묵는 한 폴란드 외교관은 필자가 다음날 킬리스 난민촌에 대해 언급하자 “이곳은 세계에서 제일 좋은 난민촌입니다!”라며 감탄했다. 옆에 있던 이탈리아인 공무원은 그 의견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엔난민기구 관계자들, 학회 관계자들, 심지어 난민촌 내 난민까지, 어느 누구도 킬리스 난민촌의 삶의 수준이 예외적으로 높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나중에 킬리스 난민촌의 수준 높은 설비에 대한 보고서를 한 난민 전문가에게 보여주고는 “전례가 없다.”라는 대답을 들었다.

 


한 컨테이너 밖에 있는 난민 아동. 뉴욕 타임즈의 토비아스 허츨러(Tobias Hutzler)


한 터키인 공무원은 대다수의 터키 공무원과 마찬가지로 언론에 발설할 자격이 없음을 이유로 익명을 요구하면서, “당신들은 신대륙을 다시 발견한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고통 받는 난민들을 위한 당연한 조치일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킬리스 난민촌이 여느 난민촌과 다르게 시설물이 잘 갖춰져 있을 뿐만 아니라, 터키 스스로 예전부터 모든 사건에 조치를 취해야 할 의무를 벗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14,000명의 킬리스 거주민들은 난민이 아니라 터키의 “손님”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용어적인 표현뿐만은 아니다. “1951년 난민 지위에 관한 협약”은 난민들을 위험한 본국으로 강제 송환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그들의 일자리, 보금자리, 여행, 그리고 공적 보조를 보장하라는 내용을 포함한다. 터키는 협약에 가입했지만, 당시 “지리적 한계”를 이유로, 오직 유럽에서 발생한 난민만을 수용하는 역할만 했다.

 

터키와 시리아 양국 간 이미 열려있던 국경과 체크포인트 간의 간극, 그리고 내전의 불길이 번질지도 모르는 상황적 요소를 고려했을 때, 터키정부가 시리아 내전 난민의 유입을 거절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터키인들이 인종적, 문화적 연대감 때문에 난민을 받아들였던 역사를 미루어 보아, 대다수 시리아 국민이 수니파 무슬림이라는 사실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실제로 터키는 1989년에 30만 명의 불가리아 난민을, 90년대 초엔 25,000명의 보스니아 난민을 받아들였다. 정확한 이유가 무엇이든, 터키가 전쟁으로 고통 받는 이웃에게 손을 내민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격전이 벌어지거나 테러에 대한 공포감이 고조됐을 때의 국경지역의 간헐적인 폐쇄를 제외하고는, 시리아 난민 누구든 여권만 있다면 국경을 넘을 수 있다. 차량의 출입 역시 자유롭게 이뤄진다. 음식물과 기타 물품들을 보따리나 바퀴달린 여행용 가방에 넣고 다니는 시리아 난민들의 모습은 이곳 킬리스 난민촌에선 매일 같이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터키는 쿠르드족이 포함된 시리아 쪽 국경 충돌지역에 방벽을 세우고 있으며, 최근에 알레포(Aleppo)에서의 집중 포격 사태로 대량 유입된 난민들에 대해 여권을 소지하지 않은 경우 난민촌 입장을 불가케 하는 등 난민촌의 치안유지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킬리스에 있을 때엔, 여권을 소지하지 않은 난민들조차 체크포인트나 올리브 숲 등에 자유롭게 드나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킬리스 근처에 있는 시리아-터키 국경을 건너는 중. 뉴욕 타임즈의 토비아스 허츨러(Tobias Hutzler)


왜 터키는 난민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까? 전 세계의 다른 난민촌과는 다르게 킬리스는 유엔난민기구에 의해 운영되지 않는다. 대신에, AFAD(Turkey’s Disaster and Emergency Management Presidency)가 유엔난민기구에 캠프관리에 대한 자문을 구하면서 스스로 난민촌을 설계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난민촌 안에는 터키 정부 소속 직원들을 배치해 놓았고, 적은 수의 NGO만을 받아들여 단순한 지원 임무만 수행토록 하였다.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국제적 기부를 제외하고는, 재정적·행정적 책임이 모두 터키 당국의 책임으로 위임된 것이다.

 

이러한 방식에 큰 비용이 발생한다 할지라도 터키인들에게는 국내외의 경제 인구를 제어할 수 있는 척도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된다. 난민촌은 전형적으로 수많은 NGO에 의해 운영되며, 상호 공조가 잘 이뤄지지 않는 경우엔 지원의 사각지대나 중첩현상이 생기기도 한다. NGO의 요원들은 그들끼리 또는 지역 대표들과 갈등을 빚기도 한다. 수많은 국가에서 밀려들어 온 각각의 단체가 가진 서열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다. 터키정부는 이런 전형적인 방법으로 난민촌을 운영하면 상황이 복잡해질 것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곳저곳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게 된다면, 그것은 안정보다는 혼란이라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몇몇은 터키인들이 모험을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시리아 내전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브루킹스 연구소 터키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케말 키리스키(Kemal Kirisci)는 “터키가 난민캠프에 공을 들여 투자한 이유를, 중동에서 허브역할을 할 시장을 건설하려는 터키당국의 의중에서 찾아야 합니다. 시리아인들은 어쨌든 터키로 올 것이었고, 난민촌 안에서 지내게 될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 갈 때에는 그들 한 명 한 명이 터키의 친선대사가 될 것입니다.”이라고 했다. 터키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지정학적 무대에서 터키가 가지는 기대역할도 함께 올랐다. 그는 이어서 “터키인들은 국제사회에 자신들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킬리스 캠프는 그러한 열망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시리아 내전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 가정한다고 해도, 터키가 가져갈 이득은 비용에 상응할 것입니다.”이라고 덧붙였다.

 

난민들이 수용국에서 일시적으로 머무른다는 사실은 상식처럼 통한다. 하지만 전 세계 1,540만 명의 난민들은 적어도 5년 이상을 난민촌에서 지내는 것이 현실이다. 터키가 컨테이너 난민촌을 최초로 건립한 이래로 시리아 내전은 계속해서 악화됐다. 올해 말까지 1,500만 명의 시리아 내전 난민이 터키로 유입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터키인들은 할 수 있는 한 최고로 공을 들여 난민촌을 건설했다. 그러나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난민촌이다. 또한, 만약에 난민촌이 수 년 동안 난민들의 고향을 대신했을 경우, 그래서 심하게는 그들의 귀향을 방해할 수도 있다면, 좋은 난민촌이 마냥 좋다고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30세의 루바 바크리(Rouba Bakri)는 2012부터 킬리스 난민촌에서 지냈다. 그녀는 필자를 집으로 초대하며 “완벽하다.”라고 말했다. 그녀의 집은 난민촌 내 다른 사람들의 집과 마찬가지로 가로 23피트 세로 10피트 크기에 세 개의 방을 가진 컨테이너이다. 현관문을 잠글 수도 있다. 화장실은 개별의 배관을 통해 온수가 공급되며, 부엌에는 냉장고와 스토브까지 있다. 거실에는 긴 쿠션과 베개가 벽에 기대고 있으며, 컬러 TV에서는 카툰 네트워크가 방송되고 있다. 필자가 바크리에게 몇 개의 TV 채널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웃으며 “엄청나게 많아요. 한 천 개?”라고 답했다.

 

킬리스 난민촌에 처음으로 들어서며 알게 되는 것은, 상당수의 컨테이너에 위성 접시가 달려있다는 것이다.



컨테이너 안에서의 킬리스 주민들.뉴욕 타임즈의 토비아스 허츨러(Tobias Hutzler)


바크리의 컨테이너에는 12명의 식구가 산다. 그녀의 남편, 시부모, 3명의 자녀, 3명의 시동생과 그중 한 명의 아들, 그리고 조카, 게다가 바크리가 시리아에서부터 가져온 세 개의 새장 안의 15마리의 카나리아까지. 카나리아들은 바크리의 집을 파괴할 만큼 강력했던 박격포 공격에서도 살아남았지만 더는 노래하지도, 알을 낳지도 않는다.

 

킬리스 난민촌의 많은 난민과 마찬가지로, 바크리는 시리아 정부군과 반군, 또는 반군들 서로 간 격전을 벌이던 시리아 북부에서의 집중포격을 피해 달아났다. 그리고 전 세계 많은 난민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스스로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난민촌에서는 가족의 규모와 상관없이, 무기력함이 성행한다. 요리와 청소 등을 제쳐놓고는 막상 할 일이란 게 별로 없다. 대부분 걸어서 5분 거리 내에서 모든 용무가 끝난다. 돌볼 가축도 가꿀 정원도 없다. 그런 무기력함을 해소하기 위해, 바크리는 난민촌의 세탁소에서 무급으로 일하고 있다. 세탁소는 각각의 난민촌 구역마다 하나씩 있는데, 거주민들은 세탁물을 한 주에 2번씩 내놓을 수 있으며, 얼마 뒤 무료로 회수할 수 있다. 자신의 거주 구역인 C세탁 구역에서 일하고 있는 44세의 시리아인 자원봉사자 말락 자말(Malak Jamal)은 자기 일에 만족스러워 하며 “문제없어요. 난민촌의 모든 것이 좋아요.”라고 말했다. 세탁소 뒤에는 활동 센터가 있다. 한쪽 방 안에는 10개의 큰 직기가 있다. 터키 사람들은 이곳에서 직조기술을 가르친다. 다른 쪽 방은 뷰티살롱으로 사용되던 중이었는데, 이후 바느질 워크숍 장소로 사용될 예정이었다.

 

바크리의 시아버지는 담배연기를 들이키며 “터키 정부가 나쁘다고 말하는 시리아인은 거짓말쟁이이며 개와 같은 사람이에요.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하면 불평하기 시작합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컨테이너 안으로 그의 가족이 떠밀렸을 때 그 역시도 그런 불평가들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잘 이해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이곳에 오면서 단 열흘만을 묵을 생각에 보라색 줄무늬 티셔츠 한 벌만 들고 왔다. 하지만 2년 반의 시간이 흘렀다. 그에겐 돈도 음식도 없다. 그는 “터키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들이 이런 호의를 베풀 이유는 어디에도 없거든요.”라고 말했다.




다음 내용은 "이상적인 난민촌을 건설하는 방법 II" 에서 이어집니다.



원문 출처: http://www.nytimes.com/2014/02/16/magazine/how-to-build-a-perfect-refugee-camp.html

번역: 한형종 (난민인권센터 통번역 자원활동가)

감수: 이나경 (난민인권센터 인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