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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Activities

[태국 일기 2] 메솟에서 움피엠 캠프까지-

메솟의 두번째날(11. 19)은 메타오 클리닉(Mae Tao Clinic) 방문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병원은 1988년 버마 학생 민주주의 저항 운동 이후, 버마-태국 국경지대인 메솟 지역으로 넘어온 난민들을 위한 작은 의료 지원 센터가 시초였는데요. 하지만 지금은 설립자 신시아 마웅(Cynthia Maung)을 중심으로 메솟 지역 난민 지원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그 명성과 역할에 걸맞게 단순한 의료 지원 이상의 활동들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일반 진찰, 응급 수술은 물론 지뢰로 다리를 잃은 환자를 위한 의족 제작 및 미래의 의료 인력 양성까지 현장에서 확인한 클리닉의 역할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난센이 방문했을 당시, 대기실은 환자 및 가족으로 빼곡했지만 진료소의 안내자는 11월 7일 버마 군부가 일방적으로 진행한 총선 이후 국경 지역 사정의 악화로 유입되는 환자가 많이 줄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메솟에 거주하는 버마 난민들은 국경에서 금방 넘어온 가족 및 친구들에게 본국의 사정을 전해듣느라 바쁜 날이었습니다. 한 곳에서는 고된 산모의 산통이 새 생명의 울음으로 이어지고, 또 다른 곳에서는 응급 처치가 늦어 팔다리를 절단하는 환자의 신음이 가득한 그 곳. 바로 메타오 클리닉의 모습이었습니다.


[메타오 클리닉-환자들이 일반 진료를 위해 대기하고 있다]



메타오 클리닉을 떠난 난센은 곧 정치범 지원 협회(AAPP: Assistance Association for Political Prisoners)에 도착했습니다. 예전에 버마 군부에 의해 정치범으로 수감되었던 운동가들에 의해 설립된 이 단체는, 현재도 감금되어있는 2203명의 정치범 석방 및 가족 지원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단체의 내부에는 정치범들이 실제로 수감되어 수년간 고통의 시간을 보냈던 감옥의 모형이 제작되어 있었고, 저희 난센 일원은 당시 정치범들의 상황에 대한 공감을 얻기 위해 감옥 체험을 해 보기로 했습니다. 성냥갑만한 창문이 외부와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고, 성경 이외의 서적은 무조건 반입 금지되었던 그 곳에서 저는 처음에 벽의 갈라진 금의 갯수를 세어보기 시작했습니다. 또 창문 사이로 걸쳐진 거미줄로 머릿속 퍼즐을 엮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흰 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한기를 동반한 고독, 두려움이 엄습하기 시작했고 1000km이상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을 가족에 대한 그리움, 곧 이어 버마 군부에 대한 분노가 동시에 치밀어올랐습니다.
수많은 수감자들은 이미 혹독한 고문과 정신적 고통에 버마의 민주화를 목격하지 못한 채 유명을 달리했고, 여전히 많은 민주 운동가들은 난민 및 망명 신청을 통해 음지에서 그들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최근 버마의 군부가 아웅산 수지 여사의 가택 연금 해제라는 어려운(?) 결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AAPP의 운동가들은 과거 버마 군부의 역사를 미루어 볼 때 여전히 그 의도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버마 민주화의 열망을 간직한 채 목숨을 잃은 열사들과 기약 없이 감금되어있는 운동가들의 노력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힘을 보태야 하는 것일까요?

[AAPP 관계자와의 면담-뒤쪽으로 여전히 수감되어있는 정치범들의 이름을 손바닥에 적어 석방 요구를 하고 있는 평화 시위 포스터를 볼 수 있다]

정치범 구금의 장기화에 따른 우려를 잔뜩 않은 채, 난센은 '버마 민주화를 위한 포럼(FDB: Forum for Democracy in Burma)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하지만 난센은 이곳에서 버마 민주화 및 그 이후의 비전에 대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FDB의 관계자는 다민족 국가인 버마의 특성상 민주화에 대한 민족간 노선의 차는 있을지라도, 민주화라는 동일한 목표가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했습니다. 또한 FDB는 버마의 모든 민족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연방제 형태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민족간의 대화채널을 긴밀하게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그들은 이를 가능케하는 민주 헌법의 초안을 벌써 구상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토론을 쉬지 않고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버마 민주화에 대한 자신들의 신념과 계획을 전하는 그들의 목소리에서 난센은 버마에 찾아 올 봄에 대한 흥분과 설렘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FDB 방문 - “우리는 대화를 통하여 다민족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연방주의를 꿈꿉니다”]


8888항쟁 참여 이후 장기간의 감옥살이로 만학도가 된 FDB의 한 운동가는 난센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학생인가요? 네. 저는 이 나이에 아직도 대학교 학생회장이에요. 모든 비정상의 것이 정상인 세계에 살고있죠. 그래서 한눈에 여러분이 학생인지 아닌지 알아보기가 쉽지 않네요.”

어릴 적 철봉에서 거꾸로 매달려 생각하던 버릇이 있던 저는 운동가의 이 마지막 말의 여운이 쉽게 가시지를 않습니다. 철봉에 매달린 5분은 거꾸로의 세계가 정상이 됩니다. 하지만 그 정상의 세계에 빠져있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리 끝으로 피가 쏠리는 느낌을 견디지 못하고 바로 철봉에서 내려오게 되죠.  이 운동가는 언제쯤 철봉에서 내려와 정상의 삶에 다시 발을 디딜 수 있을까요?

 

[태국-버마 국경지대 강을 건너는 아이 - 11월 7일 버마 군부에 의해 강제적으로 치루어진 총선 이후 국경지대에 긴장이 조성되면서 하루가 멀다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무보트를 타거나 수영을 하여 도강을 시도한다]



메솟에서의 세 번째 날(11.20), 난센은 움피엠 난민촌을 방문했습니다.

메솟에서 3시간을 달리면 움피엠 난민촌에 도착합니다. 버마-태국 국경지대에 위치한 고산의 사면을 깎아 만든 이 난민촌에는 약 18,000명의 난민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나무와 짚으로 듬성듬성 엮어 만든 가옥들이 비탈진 산등성이를 지킨지 벌써 20년째입니다.


# 난민촌, 그곳에 삶이 있다

장기화된 버마 사태에 따라 움피엠 난민촌의 역사는 20년을 넘어섰습니다. 곧, 흔히 긴급사태 발생시에 마련된 천막 난민 캠프를 상상하신다면 움피엠 난민촌의 모습은 놀라울 수 밖에 없습니다. 이 곳은 난민들의 삶의 터전이자 교육 공동체이며, 하나의 마을입니다.  

[움피엠 난민촌 전경. 이런 풍경이 산과 산 사이의 골짜기 전체에 이어집니다. 그냥 산골짜기의 평범한 마을이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말이죠.]

 

[움피엠 난민촌 내부 - 빨래를 넌 가옥, 영어 학교, 여물 먹는 소가 혼재된 풍경 ]


부모가 버마에 살고있거나 없는 학생들은 기숙사에 거주하며 교육을 받고, 주변 플렌테이션 농장에 가야하는 부모들은 옆집 이모에게 자신의 아이를 맡깁니다. 교회에서는 찬송가 소리가 울려 퍼지고, 불교 사원에서는 큰스님의 설법이 이어지고, 모스크에서는 이슬람 교도들의 메카를 향한 기도가 시작됩니다.

 

# 평화속에 드리워진 어둠의 그림자, 움피엠 난민촌의 고립실태

움피엠 난민촌을 찾아가는 길은 고생의 연속입니다. 메솟 시내를 떠나 2시간정도를 달리고 나서 지그재그의 산고개를 1시간 정도 올라가야 난민촌의 입구가 나타나거든요. 난민촌의 버마 난민들은 어쩔 수 없이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고립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립된 생활을 하는 난민촌의 사람들은 자괴감에서 비롯된 심적 스트레스로 불행한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민간요법으로 제조한 '콘야'라고 하는 향정신성 물질을 복용하여 중독에 이르는 경우가 많고, 따라서 가정폭력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주변의 일부 플렌테이션 농장에서 몰래 일을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구호 물자에만 의존하는 삶을 지속하게 되고, 이는 난민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적응할 기회를 갖게 되거나 버마 민주화 이후 사회 재건 사업을 준비하는데 있어서도 심각한 장애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콘야 제조과정. 수 많은 젊은이들이 시간을 죽이고 기분전환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콘야를 사러 옵니다. 경미한 환각성 외에도 장복할 경우 치아와 위장에 매우 나쁘지만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콘야에 중독되어 갑니다.]

 

# 우리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방법은 교육뿐입니다

난센이 방문한 날, 불교를 믿는 카렌족은 다음날 있을 축제 준비로 한창 분주했습니다. 키우던  염소와 돼지를 잡고, 코카콜라를 사원 한켠에 가득 들여 놓은 이들은 넉넉한 마음으로 손님을 맞이했습니다.

움피엠 난민촌의 거주하는 버마의 민족은 5개 이상 이지만, 그 중 대부분은 카렌족입니다. 카렌족은 버마-태국 국경지대에서 게릴라 활동을 통해 버마 군부에 대항하며 자신의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난민촌의 카렌족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대대로 이어나가기 위해 버마에서도 해 오던 축제를 유지해나가는 한편, 자라나오는 세대에게 카렌족 언어를 열심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난센을 안내하던 카렌족 가이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버마의 군부는 언젠가는 물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버마의 다민족 속에서 카렌의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불교 및 기독교 어린이가 함께 어울리는 카렌족 어린이들의 모습]


움피엠 난민촌의 어린이들은 절대 다른 종교를 가지고 다른 언어를 쓰는 민족에게 배타심을 갖도록 교육받지 않습니다. 난센은 모든 민족의 다양한 정체성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민주국가 버마를 꿈꾸어 봅니다.    

 

정말 숨가쁘게 메솟 일대를 휘젓고 다닌 이틀이었습니다. 일요일에는 하루 쉬면서 메솟을 찬찬히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난센의 메솟 탐방기를 기대해주세요~ :)

 

[버마의 미래를 꿈꾸는 움피엠 캠프의 청소년들과 함께-  그래도 이들이 있기에 밝은 미래의 희망을 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