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기 장관께.
새롭고 낯선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설레는 것이기도 하지만 공포스럽고 꺼려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장관님도 경험해보셨겠지만, 새로운 학교에 등교하는 첫 날, 모르는 사람으로 대부분인 모임에 참석하는 날 우리는 모두 약간의 설레임과 함께 긴장감을 느낍니다. 이런 두려움은 그 새로움이 자신이 선택한 경우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입모아서 '젊을 때 꼭 해봐야 하는 경험'이라고 말하는 유럽여행을 친구와 함께 간 적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풍경과 선선한 날씨는 정말 기억에 오래 기억할만한 것이었지만 여행하는 삼 주 내내 저는 왠지 모를 불편함에 몸이 무거웠습니다. 스스로가 마치 바보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여행 내내 저는 누군가의 호의를 구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여행 계획이 어긋나 새로운 교통수단을 찾아야 하거나, 갑자기 소지품을 도둑맞아 경찰서에 가거나, 단순한 편의 시설을 이용할 때도 간접적으로나마 타인의 도움에 기대야했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 언어를 하지 못하기에 상대가 영어를 하기를 바래야했고, 상대가 제시하는 정보를 무작정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거의 모든 여행자가 하는 경험이 이토록 낯설었던 이유는 제가 스스로를 혼자 설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해왔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남의 도움 없이 내 할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할 줄 알고, 사람이면 응당 그래야 한다는 생각은 낯선 나라와 모르는 얼굴들 앞에서 와장창 깨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여행자'가 아닌 '국민'의 신분으로, 한국에 가족이 있고 꾸려왔던 삶이 있는 사람으로서 결코 혼자 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어를 할 줄 알고, 한국의 관습과 문화와 사회적인 질서에 대한 지식이 있는 저는 이미 남들에 기대고 그들을 받치는 돌들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듯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 '대화'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의문이 생기면 그게 개인이든 기관이든 문제를 제기하고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원하는 바를 요구하고 다른 사람의 요구를 들을 수 있고, 누군가와 약속을 하고 이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저는 익명의 존재가 아닌 '이민혜'라는 특정한 사람이 됩니다. 저와 대화하면서 제가 약속에 자주 늦지만 이를 미리 연락으로 알리는 사람임을, 매운 음식을 싫어하지만 떡볶이를 좋아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고, 나에 대한 오해에 대해서는 제가 해명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대화는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이 질문과 대답들이 곧 저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박상기 장관께서 '박상기'로, '장관'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이런 대화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상상해보세요. 지금까지의 대화가 없던 것이 되어버리는 순간을. 내가 누구였는지 알아줄 사람도 없고, 지금 내가 하는 대화를 통해 아예 새롭게 나를 증명해야 하는 순간을 말입니다. 희박한 가능성으로 보일 수 있지만 절대 불가능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 때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상대와 나눌 대화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간으로서 서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약속을 '인권'이라고 부르며 위기의 상황에 처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자고 약속한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에는 이런 대화가 거부되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바로 4만명이 넘는 난민 신청자들입니다. 이들은 자국에서의 생명과 삶에 대한 엄청난 위협을 피해 난민 수용국인 한국에 가까스로 도착했지만, 어떤 얘기도 듣지못하고, 어떤 말도 하지 못합니다. 한국은 이들에게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이야기할 기회도 주지 않고 '가짜 난민'으로 규정합니다. SNS 속 가짜뉴스를 통해 이들은 '거액의 지원금으로 무위도식하는 사람들', '잠재적 테러리스트들', '마약중독자들'로 낙인 찍힙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름붙이기의 과정에서 난민들에게는 어떤 해명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난민법 악용을 막기 위해 난민법을 개정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애초에 난민법이 무엇이고, 이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난민 신청 및 심사가 이루어지는지, 선정된 난민은 어떻게 보호되는지 난민들에게 설명된 바 없기 때문입니다. 난민법 이해에 대한 소통이 전무한 지금 '법 악용을 막겠다'는 건 법 악용으로 보이는 경우를 지레짐작해 그들을 '가짜난민' 취급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 없습니다. 정확한 근거 없는 짐작과 추측으로 선언하고 통보하는 건 대화가 아닙니다. 그저 게으름의 표현일 뿐입니다.
저는 한국이 대화가 가능한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가짜뉴스에 휘둘리는 국민에게도, 말문이 틀어막힌 난민들에게도 결국 필요한 것은 대화의 창구이고 진짜 정보입니다. 한국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난민법을 제정한 국가라는 사실이 난민의 현실을 알아주고 그들과 대화할 의지를 보여주는 한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난민법이 그 '의도'에 맞게 난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난민의 이야기를 국민에게 전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할 수 있도록 노력해주시길 바랍니다.
난민법의 改正을 바라며,
2019년 4월 22일
이민혜 드림
최근 법무부장관은 난민제도 '악용을 막는' 난민법 개정을 발표했고 입법예고를 앞두고 있습니다. 난센은 난민 정책의 근본적인 방향 설정 없이 난민신청자들의 권리만을 제한하는 법무부의 개정안에 반대합니다. '난민에게도 사람으로서의 권리가 있다'는 난민법의 애초 의도가 훼손되지 않도록, 시민분들과 <법무부장관에게 편지쓰기> 캠페인을 진행합니다.
약 한달간 시민분들의 편지가 법무부장관께 도착합니다. 매일매일 보내지는 편지를 난센 홈페이지와 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 이 캠페인에 함께 참여하고자 하시는 분은 refucenter@gmail.com으로 문의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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