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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성소수자 난민, 한 톨의 의심 없이 존재를 증명하라고?

 ※ 난민인권센터에서는 난민과 관련된 시민분들의 다양한 경험과 목소리를 담고자 기고글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다립니다. 문의 : refucenter@gmail.com 




[한겨레 왜냐면] 성소수자 난민, 한 톨의 의심 없이 존재를 증명하라고?

(한겨레 2018.1.15일자 칼럼)


이나라
소수자난민인권네트워크·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활동가


양성애자인 우간다 여성의 난민 신청이 대법원에서 파기 환송됐다. 지난 14일 대법원이 이 여성이 서울고법에서 승소한 난민불인정결정 취소 소송을 파기 환송한 것이다. 가슴이 턱 막혔다. 끝끝내 대한민국은 이 여성의 삶을 거부했다. 그는 3년 전 내가 활동하는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를 찾아왔다. 난민 심사 절차와 소송을 진행하는 와중에도 종종 행사에도 참여하고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냈다. 그와의 인연 덕분에 한국에 성소수자 난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들이 처한 열악한 인권 상황을 돌아볼 수 있었다.


성소수자로서 받는 박해를 피해 한국에서 난민 신청을 하게 된 이들이 마주하는 가장 큰 벽은 바로 존재를 입증하라는 요구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모든 성소수자 난민들이 난민 심사 과정에서 ‘진술의 일관성이 없다’거나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로 난민 인정을 거부당했다. 난민 인터뷰에서 수십 가지 질문을 하고는 지엽말단적인 사실관계들의 불일치를 꼬투리 잡아 한 사람의 정체성을 믿을 수 없다고 결론내리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성소수자 난민들은 연애이력부터 성경험, 때로는 세부적인 성행위처럼 사적이고 내밀한 내용까지 진술을 강요받는다. 이런 질문들에 답해야만 성소수자라고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차별이고 모욕이다.


난민 제도를 운용하는 법무부가 난민 신청을 거부하며 대는 이유들은 성소수자에 대한 무지와 편견의 종합판 같다. 결혼이력이 있다는 이유는 기본이고, 인터넷 이용 흔적을 뒤져 이성애 데이팅 사이트를 사용한 적이 있어서 성소수자라는 말을 믿을 수 없다고도 한다. 한번은 법무부 공무원으로부터 난민 신청자가 성적 지향에 관한 이해가 없는데 성소수자가 맞냐는 질문을 듣기도 했다.


성소수자들은 복잡다단한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들이고, 다양한 삶의 경험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한 사람의 정체성을 누군가 단순화해 판별하려는 시도는 실패하기 십상이다. 한국은 물론이거니와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획일적인 삶을 사는 성소수자는 없기 때문이다. 성적 지향이나 레즈비언, 게이, 바이, 트랜스젠더 하는 개념은 최근에 서구에서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이런 개념은 지구촌 다양한 성소수자의 삶을 포괄하기 힘들다.


성소수자라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으면 그다음에는 성소수자로서 박해받을 가능성이 낮다는 핑계로 난민 신청이 거부된다. 커밍아웃 하지 않아서 안 되고, 성소수자 인권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아서 안 된다는 식이다. 지난해에 이집트에서 온 동성애자 남성의 난민 지위 인정 판결이 이런 이유로 대법원에서 파기됐다. 판결이 나온 시기 이집트에서는 공개된 장소에서 무지개깃발을 들었다는 이유로 처벌받고, 동성애자들이 모이는 카페와 술집에서 수십 명이 마구잡이로 연행되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대법원의 판결은 그에게 정체성을 숨기고 공포 속에서 살아가라는 선고였을 것이다.


성소수자 난민들은 차별적인 입증 요구 외에도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는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난민들은 흔히 자국인 공동체의 도움에 의존한다. 하지만 자국의 문화를 공유하는 공동체에서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배척당하거나 위험해지기 때문에 성소수자 난민은 철저히 고립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난민 지원 단체 일부는 보수 기독교에 기반해 공공연히 성소수자 난민이나 인간 면역결핍 바이러스(HIV)/에이즈(AIDS) 감염인을 거부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보수단체들이 난민 반대와 성소수자 반대 논리를 결합해 성소수자 난민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압력을 정부와 법원에 행사한다.


성소수자 혐오가 존재하는 한 성소수자 난민은 계속 생겨날 수밖에 없다. 한국이 성소수자나 난민이 살기 좋은 나라라서 성소수자 난민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살길을 찾다 보니 어느 순간 한국에 당도한 이들이 있을 뿐이다. 혐오 때문에 고향을 떠난 이들이 다시 혐오 때문에 삶의 터전을 찾지 못하는 악순환을 멈출 수는 없을까. 지난해 몇몇 난민 인권 활동가들과 성소수자, 인간 면역결핍 바이러스/에이즈 인권 활동가들이 소수자 난민 인권에 관심을 갖고 활동을 시작했다. 소수자 난민을 만나고 지지하는 데 도움이 될 작은 자료집도 만들었다. 성소수자 난민을 비롯해 모든 난민들이 지금과 같은 불신과 편견의 벽에 부딪히지 않고 환대받는 사회가 하루빨리 오길 바란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827848.html#csidx4d3d67546d730969e6f9fc72bdc91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