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에는 여름휴가 기간이라면서 난센을 찾아주시는 난민분이 몇몇 계셨습니다. 어떤 분께는 난센이 고향 같을 수 있다는 게, 낯선 한국 땅 어딘가에 이렇게 올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신기하고 다행이다가도 슬프고 그랬습니다. 아는 스텝이 없는데도 정말 그냥 오신 분도 있어서 찡한 맘이 더했습니다. 가까이 아는 분들은 아니어서 멀리서 쭈뼛쭈뼛 어색해했지만, 활동가들을 특별하게 생각해주는 분들이 있다는 건 매번 마음이 좋습니다.
그~ 더웠던 여름에 어떤 분께는 마음에까지 땀나게 하는 지원 불가 소식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고마웠다고 하시며, 난센 상담실에 선풍기가 없어서 스텝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게 힘들어 보였다며, 선물로 선풍기를 보내주고 싶다셨습니다. 됐다고- 괜찮다고- 극구 사양했더니, "돈이 많아서가 아니고 행복해지고 싶어서 그런다"고 하시는 말씀에 제 눈에 땀이 났습니다.
사랑이 어디 있지, 소망은 또 어디 있지, 사는 게 뭐지 묻던 제게 이 몇몇 분들이 ‘사는 게 이런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사랑도 소망도 산다는 것도 그냥 이런 것들인가 봐요. 저는 무언가 큰 게 제 삶에 뚝 떨어졌으면 좋겠고 그래야 사는 것 같을 것 같은데, 난민분들에게도 한국에서의 삶보다 더 크고 좋은 게 생겼으면 좋겠는데, 이번 달엔 이런 작은 따뜻함 들이 저를 살게 했고… 그분들도 그랬을까요?
멍 해질 때. 스위치라도 끈 것처럼 냉랭해질 때. 순간순간 울컥하게 다시 살아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받는 게 많아질수록 드릴 게 없어 민망하지만, 자리라도 지키고 있으면 가끔은 아주 종종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도 있겠지라는 뻔뻔한 맘으로. 8월아 안녕 9월아 안녕!!!
한적한 오후 전화벨이 울립니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목을 가다듬고 수화기를 듭니다. “네, 난민인권센터입니다” 하지만 소란스런 수화기 너머에서는 “Hello?” 라며 조금 높은 음색의 약간은 거칠면서도 힘있는 목소리를 가진 한 남성이 말을 겁니다. 그제서야 “Nancen office. Good afternoon, Sir” 하고 살짝 긴장을 풀고 대답합니다.
아, 제가 생활지원을 담당하고 있는 메르다드(가명)씨이네요. 지난 2월경 메르다드의 부인께서 혼자 난센을 찾아오셨었지요. 둘째를 임신한 만삭의 몸으로 힘겹게 난센에 방문해서는 기어이 본인 몸보다 큰 옷 한 박스를 머리에 이고 집까지 2시간이 넘게 걸리는 먼 길을 떠나겠다고 고집부리시는 바람에 이를 극구 말리기 위해 부인과 한참을 실랑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발 부인을 말려달라고 메르다드씨께 전화까지 드렸는데 누가 이 부인 고집을 꺾겠냐고 난색을 표하시는 통에 큰 웃음을 나누기도 했었네요. 첫째 아이가 맨날 똑같은 외투만 입다가 이제 예쁜 옷을 입고 유치원에 다닐 수 있겠다며 기뻐하시며 집에 잘 도착했다고 걱정말라고 고맙다며 후에 메르다디씨가 확인전화를 주셨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평소에는 이메일로 소통을 해주시는 터라 의아해 하며 부인은 잘 계시는지, 오늘은 어쩐 일로 전화를 주셨냐고 조심스레 여쭙니다.
지난 4월 둘째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난민인정절차가 다 끝나 출국명령을 받고는 이제 취업허가가 더이상 나오지 않는 상황이라며 도움을 줄 수 없겠냐며 전화로 힘없이 묻던 메르다드씨. 그 후로는 한참 연락이 없길래 무소식이 희소식이겠거니 애써 생각하지 않으며 잘 지내고 계시겠지 했는데 설마 갑자기 무슨 좋지 않은 소식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을 누르고 대화를 이어갑니다.
“메르다드, 그래서 오늘 어쩐 일로 전화했어?”
“아 지예, 놀라지마, 실은 우리가 셋째를 가졌어!!”
“뭐?”
…
..
.
아침이 밝고 눈을 떴습니다. 이건 뭔가 싶습니다.
꿈이었습니다.
악몽도 이런 악몽이 없겠네 싶습니다. 무엇보다 꿈에서조차 축하한단 말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참 씁쓸해서 헛웃음이 납니다. 세상에서 가장 기뻐할 수 있는 일인 한 생명의 탄생을 맘껏 축하해 줄 수 없는 작금의 한국난민 상황은 그렇다 치고 아니 어떻게 꿈마저 이토록 지독히 현실적이지 싶어서 헛웃음만 피식피식 납니다.
하 나 참 하 참나 하
한주의 피로가 잔뜩 쌓인 금요일 오후, 인터뷰를 진행하던 중 A씨로부터 카톡을 받았습니다.
“로비에서 만나서 같이 찜닭 먹으러 가자.”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었던 터라 “미안, 오늘 저녁은 약속이 있어 T.T" 라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사무실을 나서는 길에 A씨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지금 불광역 로비에 와있어. 저녁 먹으러 가자.”
불광역이라고? 난 분명히 약속이 있다고 했는데?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불광역에 들어서자 로비에 앉아있던 A씨가 웃는 얼굴로 저를 반겼습니다. 약속이 있다 말하고 집에 가려는데, 인천에서 야간 근무를 하고 여기까지 온 이 분을 돌려보내자니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래 밥만 얼른 먹고 집에 가자.’ 스스로를 다독이며 함께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A씨는 찜닭이 먹고 싶다 말했지만 저는 별로 찜닭이 먹고 싶지 않아 닭갈비집으로 A씨를 이끌었습니다. 닭갈비를 맛본 A씨는 찜닭이 더 맛있다며, 다음에는 꼭 찜닭을 먹으러 가자 말했습니다.
식당에 있는 내내 집에 가고만 싶었습니다. 한 주 내내 신경쓸 일이 많아 잠을 잘 자질 못했거든요. 주말에도 일정이 꽉 차있어 오늘 못쉬면 주말을 또 어떻게 버틸지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밥은 또 왜 이리 느리게 드시는지, 저는 진작 숟가락을 내려놓았는데 A씨는 식사를 마칠 기미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마주 앉아 있던 한 시간 남짓 동안, 대화를 나눈 시간보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린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도대체 이 분은 언제 밥을 다 먹을까. 집엔 또 언제 가지. 오늘만큼은 제발 푹 쉬고 싶었는데. 아, 망했다.’
‘아 망했다.’
이 네 글자가, 밤샘 근무를 마치고 인천에서 불광동까지 찾아와 불광역 로비에서 저를 기다리던 이 분에 대한 제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난센에서 처음 일하기 시작했을 때 국장님께서는 관계를 통한 난민들의 회복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난센의 역할은 법률지원을 통해 난민들이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기도 하지만 언제든 찾아와 쉴 수 있는 제2의 고향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입니다. 그 말이 참 좋아서, 저도 난민들이 언제든 연락해서 기댈 수 있는 친구가 되면 좋겠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활동을 하면서 제게 친구란 제가 호감을 느끼고, 관심사를 공유할 수 있는, 제가 만나고 싶을 때 만나 마음이 통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난민’들은 각각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호감이 느껴지는 이들이 있는 반면 함께 하는 게 편하지 않은 이들도 있고, 대화를 이어갈 수는 있지만 관심사를 공유할 수는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마음이 맞는 친구들 중 ‘난민’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난민’이라는 이유만으로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그 모든 존재에게 언제든 찾아와 기댈 수 있는 고향같은 친구가 되어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아, 녹초가 된 제게 찾아와 찜닭을 먹자는 이방인에게 제가 베풀 수 있는 환대란, 그가 아닌 제가 먹고 싶은 닭갈비집으로 그를 데려가, 식사를 마치기까지 꾸역꾸역 자리를 지키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차마 그를 매정하게 돌려보내지 못하는 딱 그 정도 만큼인가 봅니다.
김성인 사무국장이 안식년을 떠난 뒤 8월의 난센사무국은 사업 중간평가와 새로운 체제 돌입에 많은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지난 상반기 동안 총회와 운영위원회 등을 통해 사무국 운영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들을 거쳐 현재 난센은 새로운 사무국장 체제를 마련하였으며 이는 9월 초부터 시행이 될 예정입니다.
그동안 사무국장 혼자서 많은 짐을 질 수밖에 없었던 구조를 어떻게 하면 함께 나눌 수 있는 구조로 바꿀까 고민 끝에 사무국장의 역할을 축소하자는 결론에 이르렀고 기존에 사무국장이 했던 역할들을 활동가들이 나누는 대안을 찾았습니다. 또 사업 이행의 전문성과 체계를 갖추기 위한 논의들을 실질적으로 이루어내기 위해 중간평가를 고민하고, 8월 한 달간 진행하게 되어 그동안의 숙원사업을 해낸 기분이 듭니다.
기대와 우려의 목소리들을 듣습니다.
두 목소리 다 반가운 목소리입니다.
난센이 과거의 아픔을 밑거름으로 더 튼튼한 조직이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목소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난센의 3세대는 예전과 같지만, 또 다른 모습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3세대의 사무국장 역할 또한 마찬가지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무국장은 조직의 전체 그림을 그려내고 방향을 제시하며 그에 대한 책임을 대부분 혼자서 지는 슈퍼맨과 같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 난센의 그림을 그리는 주체는 난센을 구성하는 평범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될 것이고,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처음 사무국장직을 이어가는 사람으로서 위 과정에서 다만 화두를 던지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성원들 스스로가 우리가 하는 활동의 의미를 돌아보고, 서로서로 보살필 수 있는 조직이 될 수 있도록…. 더디지만 '같이'가는 조직이 될 수 있도록…. 또 난센을 고민하며 함께 모여 약속했던 이야기들이 금방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잘 지켜질 수 있도록….
도움을 잘 받는 국활(사무국장 활동가)이 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사무국장이라고 불리기보다 계속 별명으로 불릴 수 있는 구성원으로 존재하기를 바라며…
단비의 일기
날씨: 선선하고 미세먼지 가득
늦게 일어났지만
무척이나 길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수리남(사실과 다른 국가)에서 온 밀러(가명).
밀러는 수리남어를 알고
나는 한국어와 영어를 안다.
밀러는 서울에서 차로 5시간 떨어진 곳에 살고
수리남어를 통역해줄 사람을 찾기 힘들다.
둘 사이의 의사소통은 한국어와 영어
단어단위로 이루어진다.
즉, 잘지내냐는 물음에 대답정도는 가능하나
이보다 길거나 복잡한 사안이면
대화하기 힘들어진다.
아니, 대화가 아니라
짧은 단어에 의문과 상상력이 더해져
오해와 불신을 낳고
최악의 경우에
이는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밀러와 나는
코오루라는 친구에게 통역을 부탁한다.
코오루는 수리남에서 왔으며 영어를 할 줄 안다.
밀러와 내가 단 한 번의‘대화’를 하기 위해서
최소 4번의 통화가 요구된다.
오늘처럼
복잡하고 급한 사안을
맞딱뜨리게 되면 모두가
스무번 이상의 통화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체류연장을 여러번 신청하였지만
이유를 모른채 계속 거절을
당하는 밀러도
바쁜 와중에
중간에서 계속 전화로 통역을
해야하는 코오루도
나는 나대로
화가 나 전화를 툭 끊어버리는 밀러와
연신 부탁을 해야하는 코오루에게
미안하고 답답하다.
모두 답답하다.
지친
밀러와 코오루와 내가
잠시나마
위로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고른
오늘의 선곡은 Coldplay_Fix You
일기 끝
밥을 먹다 말고 화장실로 가서 옷에 묻은 자국을 비눗물로 지우고 있다. 이런 비슷한 행동을 이번 달에 몇 번이고 반복했다. 언제는 지우기 모호한 바지 위치에 뻘건 자국을 남겨놓아 지우고 나서도 당혹스러웠다. 옷 자국 강박증이야 있을 수 있다 해도 요즘 들어 뭘 이렇게 자주 흘리는지 도통 이유를 알 수 없다.
행동 자체만 보았을 때는 밥을 허둥지둥 먹다가 발생한 일이다. 단지 이전과 다른 점은 흘린 다음 바로 인지한 것이 아닌 주로 언제 흘렸는지 모른 체 밥을 먹다 발견하였다는 점이고 이와 비슷한 행동이 8월 중에 다양하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테이블 닦은 휴지로 입을 닦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지하철 반대 방향을 타기도 하며, 샤워 중 클렌징폼으로 머리를 닦는 등 기억하지 못하는 여러 비슷한 행동을 했던 8월이다.
나의 급한 성격이 한몫을 한다. 최대한 시간 낭비를 안 하기 위해 뭐든지 빠르게 하려다가 덤벙 된다. 또 다른 이유로는 나의 게으름과 이유 모를 불안함도 있다. 부지런하지 못하니 시간에 쫓기고, 미뤄뒀던 것이 누적되어 많은 양의 일이 발생할 때 사람이 섬세하지 못하게 되고 단순한 것에서 실수를 유발한다.
사실 모든 할 때 제대로 하고, 쉴 때 잘 쉬면 어느 정도 조심할 수 있는 부분이다. 급하고 게으른
성격이야 쉽게 바꿀 수는 없고, 이유 모를 불안감만 잘 제어하면 9월에는 옷에 자국을 묻힐 일도 줄 것이다. 8월엔 그토록
기다리던 9월이지만 바라던 시간을 막상 맞이하니 무덤덤하긴 하다. 그럼에도 개인의
불안함은 관계에서 얻는 만족감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실천해보는 9월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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