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활동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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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센에서 ‘활동가’로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활동가’... 저는 문서를 다룰 때 보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즐겁습니다.
어떨 때는 사람이 더 벅차지만,
그래도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것 보다는 누군가를 만나야
비로소 머리 속이 환기가 됩니다.
난센에서 일하기 전에는 피부색이 다른 '아기'를 볼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가정방문을 하게 되면서 난민 아동들을 만나게 되는데,
정말 정말 귀엽습니다.
그와 동시에, 아동의 가정이 처한 현실적 상황을 되짚어보며
풀리지 않는 수많은 문제들을 머리 속에 우겨 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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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곳도 조금 쯤은 즐거울 수 있는 곳인가 봅니다.
두통이 밀려와 더 이상 업무를 보는 것이 어려워질 때가 있지만,
요즘은 사무실에 있다보면, 미드 오피스(The Office)가 연상되기도 하고
특히 국장님을 보고 있으면 한국판 마이클 스캇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오늘 (그 분은) 가장 적극적으로 만우절을 즐기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전 활동가 두 분이 오늘 난센을 방문하셨습니다 :D
보통 같으면 하던 일을 다 제끼고 쫄래 쫄래 따라가
(비록 앉아만 있더라도) 대화에 끼어 있는데,
오늘은 (밀린 업무 때문에!!) 중간에 2층으로 올라와야 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싶었는데 너무 아쉬웠습니다.
*
벌써 일 년의 4분의 1이 지나갔습니다.
막연한 설레임을 가지고 뒤늦게 난센의 소속원이 되었고,
삶에 찾아온 새로운 변화에 반응하며 각종 문제들이 잊혀지는 듯 했는데요.
시간이 지나고 보니, 잠시 보류되었던 것 뿐이더라고요.
몰랐던 이슈들에 눈뜨고 생각과 다른 현실을 접하게 되면서,
내 안의 그릇이 조금씩 커져가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요즘은 일과 내 생활을 적절히 분리시켜야 겠다는 생각과,
평소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제도나 법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욕구가 생깁니다.
요즘은 페이스북 뉴스피드 체크에 공부는 뒷 전이 될 때가 많네요.
활동을 하며 다양한 종류의 벽을 마주하게 됩니다. 어떤 벽은 굉장히 두껍고 높아서 그 벽을 깨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하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벽은 이제는 .. 100미터 떨어진 곳에서 뜀박질만 잘하면 가뿐히 넘어갈 수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만만하게 보다가 자칫 발을 헛디뎌 세게 부딪혀 버릴 때도 있고..
또 그렇게 부딪히면서 벽을 알아가기도 하는것 같습니다.
벽을 알아가는 과정은 힘들 때가 대부분이지만 그만큼 벽에 대응할 수 있는 강한 체력과 정신을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또 무엇보다도 누군가와 그 벽을 함께 깨고 넘어가기 위해서는 제가 그 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활동가로서 가장 무서운 벽은 '그 존재를 알지 못하는 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지난 달 마주한 벽들은.. 저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생명과 자유가 소비되어지고 있는 현실을 알려주었고,
국적 사이에서, 또 단체와 난민 개인의 관계에서 존재하는 무거운 권력을 드러내 주었습니다.
누가 박해의 위험으로부터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는가?
누가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는가?
누가 본국에서의 박해를 입증하고 난민지위를 인정 받을 수 있는가?
누가 성실한 변호사를 선임하고 소송에 승소할 가능성을 얻을 수 있는가?
누가 본인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가?
즉 누가 이 지구상에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며 자신의 생명과 자유를 지킬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그 벽은 '돈 있는 사람' 이라고 이야기 했고
그 벽이 하도 단단하길래 꽈당, 넘어졌습니다.
왜 위험한 상황에서 다른 가족 구성원은 함께 탈출하지 못했는지.
왜 오래도록 떨어져있는 자녀가 부모가 있는 이곳으로 올 수 있는 비자를 받지 못하는지.
왜 본국에서 받은 박해를 입증할 수 있는 서류를 구할 수 없어 난민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는지.
왜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해서 소송 진행을 하지 못하는지.
왜 이미 기한이 훌쩍 지난 여권이 유일한 신분증명서이고 이곳에서 유령처럼 지내야하는지.
이 모든 위기 대처에 대한 기동성의 조건들은
마음 먹은대로 그 조건을 획득할 수 있는 권력이 주어진 -소위 세계의 상위 10%인- 대부분의 한국인 중 한 명인 저에게 자세히 보이지 않는 벽이었던 것 같습니다.
온 몸의 세포를 동원하여 그 상황에 제 자신을 대입시켜보아도 아마 그 입장이 되지 않으면 영원히 알지 못할 것 같습니다.
무겁고 무거운 또 촘촘하고 촘촘한
권력의 포위망이 항상 함께하고, 생명과 자유를 지킬 권리까지도 앗아갈 수 있다는 것...
아직도 이곳에서 다양한 주체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자명한 권리에 대해
많은 이유와 설명을 요구받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설명을 모두가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없다는 것도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아마도 아직도 얼마만큼의 두께인지, 얼마만큼의 높이인지 알기 위해서는 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해야할일이 참 많이 남은 것 같습니다. 일 복이 많은 것 같습니다. ㅋㅋ
보이지 않는 벽을 함께 헤쳐나가기 위해서 .
ⓒ The Refugee Art Project
3월, 난센에 있은지 벌써 석달이 지났습니다. 지난 달 활동가 이야기에서 언어로 인한 괴로움, 고민 같은 것을 털어놓았는데, 아직도, 여전히 언어 때
문에 괴롭고, 힘이 듭니다. 여전히 이 개같은 추상적인 언어로 구체적이고, 명확하고, 더 실체에 가까운 실체를 더듬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고 발버둥을 쳐도 자꾸만 손까락 사이사이로 잡히지 않고 빠져나가는 듯한 이러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문장을 쓰고 작성된 문서를 저장을 하고 인쇄를 해서 물리적 실체를 남깁니다. 이 추상적이고,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는 이따위의 가볍디 가벼운 언어의 무게 때문에 우리는 "썸"도 타고, "츤데레"에게 매력도 느끼는 것이겠죠. 이렇게 무한히 변하는 의미의 작용 과정 때문에 우리의 삶은 풍요롭고 새롭고 그런거겠죠. 그런데 이게 난센의 활동가로서 제가 직면해야하는 구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측면에서는 정말 괴롭습니다. 특히 영어로 작성되어 있는 난민신청서를 읽고서 그것을 다시 한글로 정리해서 작성하려고 하면, 내가 쓰는 이 단어가 신청자가 말하고자 하는 그 의도, 의미와 비슷하기라도 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으앙. 호잉. 우왕. 끝.
처음 만나는 분들로부터 종종 괜찮은 사람 취급을 당하곤 합니다.
직장이 난민단체라는 이유만으로.
내 안엔 여전히 극복되지 않는 충돌 지점이 있습니다.
난민단체를 시작하면서도 가지고 있었던,
활동을 하면서 새롭게 쌓여가는 차별적 요소도 있습니다.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난민, 외국인 그리고 다문화 전 영역에 걸쳐.
인권, 환대를 당위적으로 말하기가 점점 겁이 납니다.
양심에도 찔립니다.
그렇다고 공적인 자리에서 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인권이나 난민 이야기가 나오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모범답안을 말합니다.
연차가 늘어 가면서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도 정점을 찍고 있습니다.
내 안에 인권차별적 요소가 있는데도 의식 있는 인권활동가인척하는
저는 쇼윈도 인권활동간가 봅니다.
난센을 시작하면서부터 한결같이 고민하는 부분은 바로 관계입니다. 난센은 관계를 통한 난민들의 회복을 지향한다고 생각했는데 난민들과 마음을 터놓는 관계를 맺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케이스매니저와 클라이언트라는 역할이 설정된다는 한계도 있었고요. 요즘 느끼는 건 결국 관계란 시간에 달려있다는 사실입니다. 난센에 찾아오는 수많은 난민들 중 어떤 사람들과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생기게 되고, 그렇게 몇 번의 계기를 거치며 함께 보낸 시간들을 관계라고 지칭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이들과는 그러한 계기들이 좀 더 많이 생길수도 있고, 어떠한 이들과는 그러한 계기들이 덜 생길 수도 있고요. 계기가 생긴 이들이 편히 깃들었다 떠날 수 있도록, 나무처럼 이 공간을 잘 지키고 싶습니다.
난센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함께 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는 점점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처음 난센에 발을 들였을 땐 난센에서의 관계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난센을 그냥 '직장'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는데, 각각 다른 목적을 가지고 모이는 '직장'이기도 했으니까요. 시간이 흐르면서 함께하는 이들을 점점 더 알아가고 있습니다. 잘 이해하지 못할 때도 많지만, 그래도 제가 이들을 '알고'있고, 이들이 저를 '알고'있다는 신뢰가 생깁니다. 그래서 시시콜콜한 이야기에서부터 깊은 고민들까지 나눌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있는 그대로 저를 드러낼 수 있는 안전한 곳이라는 사실에 감사합니다.그 안전함을 이 곳에 찾아오는 이들에게도 전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4월 1일 만우절을 난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 역시 충족하며 그렇게 만족스러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승화하게 하는 누군가가 있어 즐겁고, 활동하는 과정 과정에 의논할 사람들이 있어서 든든하고, 더 나은 난센을 그리기 위해 때로는 민감하면서도 서로의 진심을 이해하며 다양한 의견이 오가는 시간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동료들에게 어떤 음식을 해주면 좋을까’ 고민하는 그들이 정성을 담아 매일 매일 요리하는 밥을 먹는 것은 저의 하루의 큰 활력소가 되고 있어요~~!!
난센 문 앞의 나무에 노랗게 작은 꽃이 피더니 며칠 전부터는 연두빛 이파리도 보입니다. 오다가다 보면 나무에 하얀 목련이, 노란 개나리가, 벚꽃도 스멀스멀 나오고 있네요. 학교엔 새학기가 시작되고, 1월에 미처 파이팅을 못한 사람들은 겨울이 가시고 봄이 돌아오는 이 무렵 새로운 맘으로 올 한해를 계획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말예요, 또 어떤 곳에서는 희망적인 말을 건네는 것이 참 조심스럽습니다. 활동가 이야기 공간을 빌어 동그라미씨, 네모씨, 세모씨의 상황을 알리고 싶어 맘이 급해지네요.
저는 동그라미씨를 외국인 보호소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동그라미씨는 비자가 없이 1년 2개월을 미등록 체류하였다는 이유로 구금되었어요. 그는 당시 난민신청자였음에도, 심지어 미등록 체류상태를 해소하고자 자진하여 신고하였음에도, 자발적으로 찾아간 그 자리에서 바로 그렇게 구금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려 1년 4개월 째 구금된 상태로 있습니다. 구금 처분은 과도해서 위법하다는 주장은 "주권국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행정청의 폭넓은 재량권"을 이겨내지 못해 1심에서도 배척되고 2심에서도 배척되었습니다. 쇠창살 안의 밀폐된 공간에서 말도 안 통하는 사람들 15-20명(그마저도 친해지려 할 즈음에 방배정이 임의로 바뀌어서 또 모르는 사람들로 공간이 채워집니다)과 내가 언제쯤엔 구금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예측도 못하는 상황으로, 하루 종일 반경 50미터의 공간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삶, 상상이 되질 않습니다. "인간의 존엄성" 이분들에게도 적용되고 있는 거 맞나 싶어요.
네모씨는 외국인보호소에서 약 1년 6개월가량 구금되어 있다가 대한민국을 떠났습니다.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두려워했던 그는 추방되는 과정에서 다른 나라로 이탈하였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고, 기반도 전혀 없고, 수중에 돈도 없는 상황에서 도착한 낯선 나라, 그곳에서의 삶은 어떠한지 걱정하며 물었을 때 그는 그럼에도 “자유가 있어 좋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그곳에서도 체류자격 없이 살 수는 없기에 가족이 살고 있는 제3국으로 가기위한 준비를 하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희망 가득한 이모티콘으로 그의 새출발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 네모씨와 다시 연락이 되어 그에게 가족에게 가는 계획은 어떻게 되었느냐 물었더니... 그는 한국에서 구금되어 있었던 사실 때문에 제3국에서 비자를 받을 수 없게 되어 “So depressed”되어 있다고 하네요. 아..... 진짜.......
세모씨는 매우 활동력 넘치고 불의를 못 참는 사람이에요. 그도 외국인보호소에 구금되어 있습니다. 외국인보호소에서 권리를 열렬히 주장하다가 독방에도 몇 차례 들어갔다 왔습니다. 그는 외국인보호소를 “Prison”이라 칭합니다. 세모씨는 아직까지도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에너지를 잃지 않고 노력하고 온갖 가능한 방법을 다 시도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번번이 결과는 좋지 않네요. 외국인 구금에 대한 제 생각이 무기력함과 매너리즘에 빠져 들 때쯤이면 그는 제게 문제의식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며칠 전 생일이었던 것을 알고 생일 축하를 하였더니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올해는 “죽은 해”라고 표현하였죠. 참... 적극적으로 호응하며 "그래 맞아" 할 수도 없고, "아니야 그렇지 않아" 할 수도 없어 저도 그저 쓴웃음만 지었습니다.
한국으로 오게 된 이들에게 “한국은 참 살만한 나라야”하고 싶은데, 정말 점점 더 소극적이고 부정적으로 변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저 How are you와 Take care이라는 말만 엄청 입에 붙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또 새로운 마음을 먹어볼 만한 계절이니까, 4월에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부딪혀 보아야지 싶습니다. 안 되어도 쉬이 포기하지 않고, 전화기를 들고 여기 저기 길을 찾아보고 문의하고 있는 난센 동료들을 보면서 많이 느끼고 배우는 것 같습니다. 4월에는 파이팅을 건네면서도 부끄럽지 않게 조금 더 부지런하고 빠릿한 나를 바라며~~ 우왕. 나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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