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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Activities/활동가이야기

[인턴후기] 시선의 변화, 의문의 난센 그리고 값진 선물!

캐나다 교환학생 시절 난민수업을 듣고 무작정 난센을 찾았던 적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개월이 다 되었다. 그 기간 동안 나에겐 어떤 변화가 있었고, 무엇을 배우고, 느꼈을까? 내가 느끼고 배운 모든 것을 이곳에 담아내기엔 너무 길지만 가장 하고 싶은 얘기를 담아보았다. 



난민색안경 벗기


작년 5월 한글교실 자원봉사자로서 난센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 난민의 존재는 ‘불쌍함’, ‘도와줘야 할 사람’으로 나의 색안경에 비춰졌기에 뭐든 도와줘야지!! 라는 마음가짐이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끼고 있었던 색안경이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한국어 수업을 하면서 점점 친밀해지던 한 난민 분은 알고 보니 남성우월주의 성향이 강한 아프리카 사람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고집불통에 지기 싫어하는 자존심 강하신 분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그와 나 사이에 생기기도 했다. 또, 난민 사이에서도 불같은 갈등이 일어지는 광경을 목격하고 입이 쩍 벌어진 적도 있다. 무조건 불쌍하게 여겨지다가 직접 만나서 겪어보니 여느 한국 사람과 같이 자존심 강한 똑같은 사람이었구나. 당연한 것인데 왜 나는 몰랐을까. 이렇게 ‘도와줘야 할’ 난민의 시선에서 ‘보통 사람’ 난민의 시선으로 난민의 환상이 깨져버렸다. 색안경을 벗고 난민을 바라봤을 때 더욱 더 인간적인 그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 인류의 모습인 것 같다. 





난민인권센터=난민의심센터?



처음 난센에서 인턴으로서 인수인계를 받고, 내부 강의를 들으면서, 활동을 하고, 회의시간에 나오는 말

들을 들으면서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바로 ‘의심’이다. ‘왜 난민인권

센터에서 난민을 의심하지?’ 선의로 찾아오는 것이 아닌 자신에게 유리한 이익을 남기기 위해 난센에 도움을 요청하시는 분들도 있기에 그 사람이 난민인지 아닌지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객관적인 판단까지는 좋은데 객관적이기 때문에 생기는 의심이 문제다. 의심을 풀려면 증거가 있어야 한다. 증거를 가지고 오면 또 의심을 한다. 증거로 가지고 온 문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의심이 끝이 없다.  22년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상대방을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에 익숙치 않았다. 타인과 대화를 할 때, 가령 낯선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에도 그 사람의 말을 들어주고 추임새를 넣어주고 맞장구 쳐주는 것,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화는 익숙했지만, 난센 인턴으로서 도대체가 그 사람이 진짜 난민인지 가짜 난민인지 판단하기가 힘들었고, 인터뷰 과정에서 나오는 난민분들의 진술에 어느 정도 일관성이 있으면 믿음이 갔고 이해할 수 있었다. 믿음이 갔었기에 일부러 물어보지 않았던 사항도 있었다. 당연, 이 때문에 초기에 인터뷰 지적을 많이 받았던 기억이 있다. “가람씨, 이런 것, 저런 것도 물어봐야 해요. 난민 인터뷰는 완벽! 해야 해요.”  한 달, 두 달, 지내다 보니 왜 완벽하게 인터뷰를 해야하는지 여러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지만 그래도 가끔 너무 지나치게 의심하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1등급 난민?




내가 맡았던 케이스들은 전부 ‘사유가 약하’고, ‘증거가 불분명’한 케이스다. 이쯤에서 두 번째로 난센에 이해가 가지 않았던 부분은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난민들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이것 또한 ‘인권’적인 측면에서의 또 다른 소외라고 생각한다. 법무부가 주장하는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충분한 근거’는 정말 ‘커’야 한다. 법무부의 의견, 방식에 따라서 난민인권센터도 마치 상품을 등급화 시키듯 ‘정확한 사유와 증거’에 따라 난민들을 분류 시켜 놓는다.  왜, 도대체 왜, 난민‘인권’센터에서는 정확한 증거가 있어야지만 1등급 난민이 되는 걸까? 난민이라는 소외된 집단 중에서도 더욱이 소외된, 사유가 약하고 증거가 불명확한 난민들을 더욱이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닌가?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목숨 바쳐서라도 인정받게 해야 된다는 말도 맞지만, 그럼 ‘가능성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지?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또 소외를 당하는 거 아닌가? 또, 이길 수 없을 것처럼 사유가 약한, ‘최하등급’의 난민을 소송에서 이기게 만드는 변호사가 진짜 'TOP'변호사 아닌가? 난민과 웃는 세상을 꿈꾸고,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는 난민인권센터에서 소외 아닌 소외를 또 만들어내는 것 아닌가? 



 




Hello my dear!


 

난센에서 일하면서 얻게 된 가장 값진 것 중 하나는 아프리카 친구들이다. 그들의 케이스 담당자가 아니어도, 박해 사유나 배경을 듣지 않아도, 그들과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항상 가보고 싶었던 곳 ‘아프리카’ 이야기를 꺼내면 그들도 나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던 것 같다. 본국에서 떠올리기 싫은 상처를 받은 적이 있지만, 보통 사람이 그러듯 그 친구들도 자신이 먹었던 음식, 과일, 자연, 동물 등등을 얘기해줄 때면 고향에 대한 향수가 가득한 사람들이다. 한 친구와는 이번 년도 9월에 아프리카로 여행을 가기로 했지만, 그게 현실이 될지는 모르겠다. 난센에 방문하실 때마다, 가끔 안부전화가 올 때마다, “Hello my dear!!"을 외치며 반가움을 표시해주는 분도 있다. 캐나다에서 9개월 동안 공부했을 때보다 난센에서 난민으로부터 듣는 ”dear"이 훨씬 더 많았고, 그랬기 때문에 나는 “dear"라는 단어가 그리도 달콤하고 따뜻한 단어인지 몰랐다. 그 분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나는야 난민인권활동가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친구들 중 한명이 나에게 말했다. “너 남자친구 안 만들어? 혹시..난민이랑 사귀는 거 아니야??”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들이 하나같이 빵 터지게 웃는다. 그냥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았다. 같이 즐거워하는 분위기에 찬물 끼얹지 않을 것 같은 표정과 말투로 “그 말 취소해, 이래 봐도 나 난민인권활동가야!” 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사실 이 글을 읽고 있을 정말 오~래오래 활동하신 난센 김성인 국장님을 포함한 다른 활동가들을 생각하면 내 스스로를 “난민인권활동가”라고 말하기엔 정말 부끄럽고 부끄럽지만,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나오는 차별이 섞인 말이 나오면 이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나를 발견했다. 난센을 나오더라도 인권에 대한 인식, 사명감은 단단히 박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