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독재의 추억
"권력은 칼집없는 칼이다. 칼은 무엇이든 벨 수 있는 힘이 있다. 하지만 칼집이 없기 때문에 함부로 휘두르면 결국 그 자신도 다친다."
모 사극에서 본 대사였다. 권력의 속성을, 특히 한 사람이 모든 권력을 가지고 휘두를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이렇게 잘 정의한 대사도 없을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수많은 독재자들이 있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국민의 손에 응징당하거나 자신을 쫓아내기 위한 또다른 쿠데타에 의해 쫓겨나서 쓸쓸히 죽었다. 뻔히 예상되는 독재의 결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결말을 그대로 걸었다. 왜일까? 왜 그 불행을 반복했던 것일까?
권력을 가진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두려움의 연속이다. 권력의 아이러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졌지만, 반대로 그 힘을 가졌기 때문에 빼앗길까봐 두려워한다. 처음에는 누구나 조국의 미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하지만, 그 초심은 뒤로 빠진다.
힘을 가지고 무엇을 할지에 대한 고민은 어느새 사라진 채, 힘 그 자체만을 위해 살아간다. 누군가 자신이 가진 그 힘을 빼앗으려 하지 않을까 큰 두려움에 빠진다. 그러다 보니 정적에 대한 철저한 숙청과 학살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경제적 독점은 부가서비스다. 쾌락에 쾌락을 거듭하고 두려움에 두려움을 거듭하며 취하다가 길을 잃는 것이다.
명연기자 김갑수씨가 연기했던 모 사극 속 최충헌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고려 무인집권자였던 최충헌은 그 이전의 집권자 이의민을 몰아내고 20여 년 이상의 장기집권을 했다. 그 과정에서 친동생을 죽이고 조카의 뒤꿈치를 잘랐으며, 2명의 왕을 폐위시켰다. 그에게 도전한 사람은 누구라도 철저하게 응징당했다. 그가 움직이면 호위병력만 수천명이 넘었고, 그의 집은 왕궁보다 더 컸다. 독재자가 누릴 수 있는 쾌락은 모두 독점했던 것이다.
하지만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젊은 시절의 최충헌 환영이 찾아와 그를 꾸짖는다. 젊은 최충헌은 늙은 최충헌에게 이의민의 횡포를 끝내고 어려움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겠다는 그 다짐은 어디로 사라지고 권력의 단맛에 취한 초라한 노인만이 남았다며 한탄한다. 이럴 줄 알았다면 역적의 오명을 쓰더라도 고려왕실을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열었을 것이라고 후회한다.
훗날 역사는 최충헌의 이름을 역사서의 '반역자 열전'에 기록해 후세에 전했다. 편히 누워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 이름은 역사에 '반역자'로 남은 것이다. 독재의 오명이다.
#2. 이디 아민
포레스트 휘태커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의 영예를 안긴 <라스트 킹>(2006)이라는 영화가 있다. 원제는 < The Last King Of Scotland >이다.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을 다룬 영화였다. 독재자 1인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 아니라 나름의 패기와 객기를 가진 젊은 서구인의 개인적 시각에서 바라본 독재자의 모습을 그렸다는 점이 신선했다.
<라스트 킹> 속 이디 아민은 독재자의 탄생부터 몰락에 이르기까지 명확하게 변화한다. 이디 아민과 우연히 만나 그의 호감을 얻어 개인주치의로 고용된 니콜라스 개리건(제임스 맥어보이)의 눈으로 본 초기의 이디 아민은 유머와 열정이 넘치며 대중과도 완벽하게 호흡하는 준비된 정치인이다. 매력적인 대중정치인의 요소를 그대로 갖춘 통치자라고 할 만했다.
하지만 그 역시 모든 것을 갖추었기 때문에 두려움에 떨 수 밖에 없었다. 쿠데타로 집권했다는 태생적 약점은 국제무대에서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한계로 작용해 서방세계의 감시어린 시선 한 가운데에 노출될 수 밖에 없었으며, 아프리카 대륙의 많은 나라들이 흔히 그렇듯 역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세력도 실제로 존재했다.
그런 위험을 이겨내는 방법은 사실 간단하다. 통치자로서 해야 할 본질적인 임무가 무엇인지 철저하게 성찰하며 그 시대에 맞는 미래를 열어가는 것이다. 뻔한 이야기지만, 가장 궁극적인 답변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의 시야는 그리 넓지 않다. 화려한 금빛이 마음의 맑은 창을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만 보이게 만든다. 그래서 이디 아민 역시 뻔한 길을 걷는다. 점차 그는 철저하게 정적을 숙청하며 반대세력을 학살한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나날이 줄어들어 의심은 더욱 커지게 되고, 그 의심만큼 많은 사람이 죽는다. 본질적인 고민이 빠진 뻔한 독재의 길이다.
<라스트 킹>은 아프리카 대륙을 소재로 한 다른 영화처럼 휴머니즘을 제시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이디 아민에 초점을 맞춰 그의 성격이 어떻게 증폭되며 그 증폭의 크기에 따라 어떻게 파멸해나가는지, 냉정하게 조명할 뿐이다. 그를 관찰하는 젊은 서구인 의사도 객기에 취해 이디 아민의 아내와 불륜에 빠짐으로써 2인자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쾌락을 맛보다가 수렁에 빠진다. 그 수렁은 결국 두 사람 모두를 위기에 빠트린다.
포레스트 휘태커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이디 아민으로 변신한다. 정열과 잔인함의 경계선에서, 호탕함과 의심의 경계선을 유유히 오가며 권력을 한 손에 틀어쥐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불안한 삶을 사는 한 인간을 조명하는데에 집중한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본질이 엿보인다. 아프리카 대륙을 지배하는 가난과 질병과 내전, 그럼으로써 발생되는 숱한 살인과 폭력 등이 비롯되는 가장 원초적인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가진 것을 잃을까봐 두려움에 빠진 한 인간의 나약함으로부터 비롯되는 비극이다.
#3. 혹세무민의 끝
앞서 <라스트 킹>이라는 제목을 소개하면서 굳이 영문 원제목을 붙인 이유는 그 영문 원제목에 이디 아민의 독재 형태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를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왕이라고 과시했다. 연설 도중 자신이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왕으로 추대됐다고 허황된 거짓말을 한 것이다. 혹세무민이다. 독재자의 대중선동이 당시에는 그럴듯하게 들릴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뻔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 대륙을 함부로 침범해 식민지로 착취했던 유럽의 역사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동시다발적으로 많은 나라들이 독립했다. 하지만 나라별로 가졌던 다양한 특성을 외면한 채 자신들의 편의에 맞게 국경을 확정하고 몰아치듯 독립을 확정지음으로써 혼란을 불러왔다.
독립 이후의 혼란은 결국 독재자들의 출현을 불러왔다. 그들은 각각 자신의 탐욕만을 채웠을 뿐이다. 그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비극을 맛보았다. 누군가는 목숨을 잃었고, 누군가는 끔찍한 폭력의 희생자가 됐다.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으며, 심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아이들은 굶어 죽어가고 정부군과 반군은 모두 그 아이들을 징집하지 못해 혈안이다. 소수의 탐욕을 위해 다수가 영문도 모른채 희생되는 혹세무민의 비극이다.
이디 아민은 결국 자신을 쫓아내기 위한 쿠데타군에게 패배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로 도망쳤다. 그에게 남은 것은 작은 빌라 한 채였다.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조건 아래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제공한 것이다. 질병에 시달린 그는 결국 조용히 숨을 거둔다.
8년간의 광폭한 독재는 3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잃는 끔찍한 결과와 함께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우간다의 혼란을 남겼다. 모두를 잡아먹는 비극에 불과했던 것이다. 모든 것을 쥔 자의 탐욕이 낳은 결과다. 이디 아민은 역사를 수놓았던 수많은 독재자들이 그랬듯 오명만을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79년 마침내 그가 무너졌을 때, 기쁨에 찬 군중들이 거리를 매웠다. 그의 정권은 30만명 이상의 우간다인을 살해하였다. 아민은 2003년 8월 16일 사우디 아라비아 망명 중에 사망하였다. 그가 꿈을 꿨다는 날짜는 아무도 모른다."
(박형준 활동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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