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형제(兄第)
형제가 있었다. 가난한 환경 속에서 부모님의 남다른 기대를 받으며 그 어려운 사범학교 교육까지 받은 형과 그럼으로써 늘 뒷전으로 밀렸던 동생이었다. 하지만 형은 공산주의자였고 독립운동을 하면서 집안의 미래 따위는 이미 뒷전으로 내던진지 오래였다.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며 집안을 건사한 것은 결국 그 동생이었다. 그저 동생이라는 이유로 늘 뒤로 밀렸던 아픔 때문에 동생은 형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기로 마음먹는다. 우익 청년단의 감찰부장으로서 벌교에서는 힘 깨나 쓰는 유지였다.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며 집안을 건사한 것은 결국 그 동생이었다. 그저 동생이라는 이유로 늘 뒤로 밀렸던 아픔 때문에 동생은 형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기로 마음먹는다. 우익 청년단의 감찰부장으로서 벌교에서는 힘 깨나 쓰는 유지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 벌교가 공산당의 치하로 들어가면서 형은 돌아왔다. 이번에는 동생이 도망자가 된다. 형제의 운명은 늘 대한민국의 질곡과 함께 해 왔다. 다시 전세가 역전이 되고 공산주의자들이 지리산으로 숨어 들어가면서 형제의 운명은 다시 뒤바뀐다.
형은 결국 지리산에서 시신으로 돌아온다. 공산당의 처참한 말로를 보여주겠다는 듯, 형의 목은 저잣거리에 효수돼 동네 구경거리로 전락한다. 험상궂은 표정으로 나타난 동생은 형의 잘린 목을 보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미움 투성이 뿐이던 형의 비참한 마지막에 통쾌해 했을까?
아니었다. 동생은 부하들을 시켜 형의 처참한 시신을 수습하라며 크게 소리지른다. 형의 시신을 부여잡으며 오열하는 형수와 조카들을 지켜보면서 아무도 접근을 못하게 하겠다는 뜻인지, 팔을 허리춤에 가져다 대며 주변을 노려보고 있었다.
"살아서나 빨갱이제 죽어서도 빨갱이여?"
아무리 미운 형이었지만, 빨갱이였던 형이지만, 사상이 달라 도무지 화합할 수 없었지만, 이미 죽어버린 형. 그래도 형이었다는 의미었을까? 이상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태백산맥>의 염상진-염상구 형제의 이야기다.
#2. 4월의 어느날
르완다에서는 벨기에의 교활한 식민통치 정책의 후유증으로 종족 갈등이 일어났다. 식민통치의 편리를 위해 소수의 투치족을 우대하면서 후투족과의 갈등을 교묘하게 조장했고, 그 영향으로 두 종족은 서로에 대한 증오가 쌓일 수 밖에 없었다. 증오는 곧 폭력을 낳는 법. 누가 먼저 그 시한폭탄의 심지를 당길 것인가? 심지에 불이 닿는 순간, 폭탄은 순식간에 터진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알 수 없지만" 1994년 4월 6일, 역사적인 사건이 터진다. 하브자리마나 르완다 대통령과 부룬디의 은타랴미라 대통령이 탑승한 항공기가 격추돼 사망하면서, 이로 인해 심지에 불이 닿았다. 정부군과 후투족 강경파 민병대 인터함웨는 행동을 개시한다. 사람이 아닌 존재, 마냥 죽여도 좋다는 의미에서 '바퀴벌레'로 통하던 투치족에 대한 학살에 돌입한 것이다. 이로 인해 80만 명이 죽는다.
죽음의 광기 속에서 인간 본연의 휴머니즘을 유지하기란 어려운 일.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소수의 싸움은 말 그대로 사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투치족 여학생을 살리기 위한 교장의 하소연 "당신에게도 딸이 있지 않나요?"라는 대답에 정부군 대원이 날린 싸늘한 한마디는 그저 "내게는 바퀴벌레 딸은 없다"는 것 뿐. 순식간에 여학생들에게 총알이 난사된다. 저마다 꿈을 키우며 공부했을 학교는 순식간에 학살의 현장이 된다.
형제도 그속에서 모든 것을 잃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모두 잃은 형은 자신을 돕던 친구들마저 잃자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정부군 대위의 직책도 그 어떤 것도 '바퀴벌레 아내'를 두었다는 사실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살인의 광기가 번뜩이는 르완다에서 오스카 쉰들러는 없었다. 형과는 정치적으로 다른 입장이었지만,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형수와 조카들이 피신하는 것을 돕던 동생도 마찬가지로 돕던 친구들을 잃고 버림받으며 무기력해진다.
상황은 역전된다. 현재도 르완다 대통령으로 있는 폴 카가메가 이끄는 투치족 중심의 르완다 애국전선이 후투족 중심의 정부군을 몰아낸 것. 이로써 동생은 '역적'이 된다. 형은 동생의 전범재판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무엇을 봤을까? 80만명이 학살당한 끔찍한 참상보다는 커트 코베인의 갑작스러운 자살에 더 관심을 보였던 서구 열강 출신의 재판관들과 동생을 옹호하는 변호인들이 다름아닌 투치족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형은 혼란을 느낀다.
#3. 누구를 위하여 총성은 울리나
<4월의 어느날>은 <호텔 르완다>에 비하면 차갑다. 하지만 그래서 사실적이다. 영웅도 없다. 거대한 광기와 끔찍한 참상 앞에서 펼쳐지는 각각의 인간군상만이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그 흐름을 타면서 말 그대로 '바퀴벌레'를 죽이듯 사람을 죽인다. 누군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애쓰다가 무기력함을 맛볼 뿐이다. 누군가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생존에 대한 끈질긴 본능만을 믿고 이웃나라와 UN이 세운 난민캠프로 도피한다.
하지만 그래서 의미가 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오스카 쉰들러, 존 라베(일본의 난징대학살 상황에서 중국인 25만명을 구한 독일인), 폴 루세사바기나(호텔 르완다의 주인공) 등은 언제나 나타나는 사람들은 결코 아니다. 생존에 대한 강렬한 열망만이 남은 그들에게 믿을 것은 단지 그것 뿐이다.
그러나 영화에는 곳곳에 분노가 배어있다.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감독의 의문은 바로 그 지점으로 향한다. 때로는 직접적으로 제시한다. 각국의 시민권자들만 호송하는 탈출 트럭의 행렬은 세계가 한목소리로 말하는 '구호'가 과연 박해와 전쟁의 참상에 직접 노출되는 당사자들에게는 향하고 있는지, 그 끔찍한 상황을 만든 장본인은 도대체 누구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선진국이 보낸 탈출 트럭의 탑승자는 어디까지나 '자국의 시민권자'로 특정돼 그외에는 누구도 탈 수 없었기 때문이다.
9.11 테러에 대한 음모론 다큐멘터리 <루스체인지>가 제기했던 근본적인 의문을 돌이켜 볼 수 밖에 없다. 연출자 겸 내레이터 딜런 에이버리는 문제제기를 마무리하며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벌였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명분이 도대체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면서 마치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듯 첨단무기로 이라크 군인들을 죽이는 미군의 전쟁 형태를 시퀀스로 제시한다.
인간이 인간이 아니라 그저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을 만드는 사람들이 누구냐는 포괄적 의문 속에서 딜런 에이버리는 9.11 테러의 진정한 범인이 누구인지에 대해 선언한다. 펄럭이는 성조기와 함께 그가 제시한 답변은 "이 나라(미국)를 쥐고 흔들 수만 있다면 무슨 짓도 마다하지 않을 한 줌의 반역자들"이다.
#4. 우리의 좁은 시각에 대한 자성
선진국의 이중적인 대외정책과 소수의 이익을 위한 전쟁이 일어나면서 약소국의 수많은 사람들은 언제든 희생될 수 있다는 위험한 가능성이 남는다. 염상진-염상구 형제는 무엇 때문에 서로를 더욱 증오하며 형제 간에 총구를 들이댔는가? 르완다의 형제는 무엇 때문에 엇갈렸으며,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전범이 됐는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왜 전쟁의 참상이 벌어졌는가?
<4월의 어느날>은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위해 학살을 소재로 하는 보통의 영화들과는 달리, 앞서 이야기했듯이 직접적으로 휴머니즘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리얼리티를 얻었다. 하지만 분노가 지나치게 컸기 때문일까?
후투족과 투치족이 서로 화해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지 않고 오로지 폭력으로 대응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자성하지 않고 침묵할 뿐이다. 외세를 비난하면서도 또다시 외세에 의존하려는 희미한 균열이 엿보인다. 그들 스스로가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짚어보지 않는 오류로 연결되는 것이다.
1960년 4월의 전국적인 항거와 1980년 5월 광주의 희생, 1987년의 6월 항쟁이 우리에게는 소중한 교훈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버마 등 각지의 난민신청자들이 한국을 선망하며 찾아오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선배'라면 마땅히 후배에게 소중한 경험을 전해줄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결코 우리만의 세상이 아니다.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필연적으로 저 멀리서 찾아오는 난민과의 접점이 있다. 우리가 값싼 가격으로 즐겨찾는 달콤한 초콜릿, 그 초콜릿에는 저임금 착취노동을 당하는 아프리카 대륙의 어린이들의 눈물이 배어있다. 생활 필수품인 운동화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미 그들의 피와 땀으로 혜택을 입고 있는 것이다. 이미 유명한 이야기다. 그렇듯 흔하게 듣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고민했는가? 한번쯤 자성할 부분은 아닐까.
"결국, 우리는 적들의 말이 아니라 친구들의 침묵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살아서나 빨갱이제 죽어서도 빨갱이여?"
아무리 미운 형이었지만, 빨갱이였던 형이지만, 사상이 달라 도무지 화합할 수 없었지만, 이미 죽어버린 형. 그래도 형이었다는 의미었을까? 이상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태백산맥>의 염상진-염상구 형제의 이야기다.
#2. 4월의 어느날
르완다에도 이런 형제가 있었다. 후투족 형제인 그들, 형은 정부군 소속이었지만 투치족 아내를 두고 있었고, 동생은 反투치족 정치성향의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며 인기를 얻는 방송인이었다. 입장이 다를 수 밖에 없는 형제였다.
르완다에서는 벨기에의 교활한 식민통치 정책의 후유증으로 종족 갈등이 일어났다. 식민통치의 편리를 위해 소수의 투치족을 우대하면서 후투족과의 갈등을 교묘하게 조장했고, 그 영향으로 두 종족은 서로에 대한 증오가 쌓일 수 밖에 없었다. 증오는 곧 폭력을 낳는 법. 누가 먼저 그 시한폭탄의 심지를 당길 것인가? 심지에 불이 닿는 순간, 폭탄은 순식간에 터진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알 수 없지만" 1994년 4월 6일, 역사적인 사건이 터진다. 하브자리마나 르완다 대통령과 부룬디의 은타랴미라 대통령이 탑승한 항공기가 격추돼 사망하면서, 이로 인해 심지에 불이 닿았다. 정부군과 후투족 강경파 민병대 인터함웨는 행동을 개시한다. 사람이 아닌 존재, 마냥 죽여도 좋다는 의미에서 '바퀴벌레'로 통하던 투치족에 대한 학살에 돌입한 것이다. 이로 인해 80만 명이 죽는다.
죽음의 광기 속에서 인간 본연의 휴머니즘을 유지하기란 어려운 일.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소수의 싸움은 말 그대로 사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투치족 여학생을 살리기 위한 교장의 하소연 "당신에게도 딸이 있지 않나요?"라는 대답에 정부군 대원이 날린 싸늘한 한마디는 그저 "내게는 바퀴벌레 딸은 없다"는 것 뿐. 순식간에 여학생들에게 총알이 난사된다. 저마다 꿈을 키우며 공부했을 학교는 순식간에 학살의 현장이 된다.
형제도 그속에서 모든 것을 잃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모두 잃은 형은 자신을 돕던 친구들마저 잃자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정부군 대위의 직책도 그 어떤 것도 '바퀴벌레 아내'를 두었다는 사실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살인의 광기가 번뜩이는 르완다에서 오스카 쉰들러는 없었다. 형과는 정치적으로 다른 입장이었지만,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형수와 조카들이 피신하는 것을 돕던 동생도 마찬가지로 돕던 친구들을 잃고 버림받으며 무기력해진다.
상황은 역전된다. 현재도 르완다 대통령으로 있는 폴 카가메가 이끄는 투치족 중심의 르완다 애국전선이 후투족 중심의 정부군을 몰아낸 것. 이로써 동생은 '역적'이 된다. 형은 동생의 전범재판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무엇을 봤을까? 80만명이 학살당한 끔찍한 참상보다는 커트 코베인의 갑작스러운 자살에 더 관심을 보였던 서구 열강 출신의 재판관들과 동생을 옹호하는 변호인들이 다름아닌 투치족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형은 혼란을 느낀다.
#3. 누구를 위하여 총성은 울리나
<4월의 어느날>은 <호텔 르완다>에 비하면 차갑다. 하지만 그래서 사실적이다. 영웅도 없다. 거대한 광기와 끔찍한 참상 앞에서 펼쳐지는 각각의 인간군상만이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그 흐름을 타면서 말 그대로 '바퀴벌레'를 죽이듯 사람을 죽인다. 누군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애쓰다가 무기력함을 맛볼 뿐이다. 누군가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생존에 대한 끈질긴 본능만을 믿고 이웃나라와 UN이 세운 난민캠프로 도피한다.
하지만 그래서 의미가 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오스카 쉰들러, 존 라베(일본의 난징대학살 상황에서 중국인 25만명을 구한 독일인), 폴 루세사바기나(호텔 르완다의 주인공) 등은 언제나 나타나는 사람들은 결코 아니다. 생존에 대한 강렬한 열망만이 남은 그들에게 믿을 것은 단지 그것 뿐이다.
그러나 영화에는 곳곳에 분노가 배어있다.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감독의 의문은 바로 그 지점으로 향한다. 때로는 직접적으로 제시한다. 각국의 시민권자들만 호송하는 탈출 트럭의 행렬은 세계가 한목소리로 말하는 '구호'가 과연 박해와 전쟁의 참상에 직접 노출되는 당사자들에게는 향하고 있는지, 그 끔찍한 상황을 만든 장본인은 도대체 누구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선진국이 보낸 탈출 트럭의 탑승자는 어디까지나 '자국의 시민권자'로 특정돼 그외에는 누구도 탈 수 없었기 때문이다.
9.11 테러에 대한 음모론 다큐멘터리 <루스체인지>가 제기했던 근본적인 의문을 돌이켜 볼 수 밖에 없다. 연출자 겸 내레이터 딜런 에이버리는 문제제기를 마무리하며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벌였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명분이 도대체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면서 마치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듯 첨단무기로 이라크 군인들을 죽이는 미군의 전쟁 형태를 시퀀스로 제시한다.
인간이 인간이 아니라 그저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을 만드는 사람들이 누구냐는 포괄적 의문 속에서 딜런 에이버리는 9.11 테러의 진정한 범인이 누구인지에 대해 선언한다. 펄럭이는 성조기와 함께 그가 제시한 답변은 "이 나라(미국)를 쥐고 흔들 수만 있다면 무슨 짓도 마다하지 않을 한 줌의 반역자들"이다.
#4. 우리의 좁은 시각에 대한 자성
선진국의 이중적인 대외정책과 소수의 이익을 위한 전쟁이 일어나면서 약소국의 수많은 사람들은 언제든 희생될 수 있다는 위험한 가능성이 남는다. 염상진-염상구 형제는 무엇 때문에 서로를 더욱 증오하며 형제 간에 총구를 들이댔는가? 르완다의 형제는 무엇 때문에 엇갈렸으며,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전범이 됐는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왜 전쟁의 참상이 벌어졌는가?
<4월의 어느날>은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위해 학살을 소재로 하는 보통의 영화들과는 달리, 앞서 이야기했듯이 직접적으로 휴머니즘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리얼리티를 얻었다. 하지만 분노가 지나치게 컸기 때문일까?
후투족과 투치족이 서로 화해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지 않고 오로지 폭력으로 대응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자성하지 않고 침묵할 뿐이다. 외세를 비난하면서도 또다시 외세에 의존하려는 희미한 균열이 엿보인다. 그들 스스로가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짚어보지 않는 오류로 연결되는 것이다.
1960년 4월의 전국적인 항거와 1980년 5월 광주의 희생, 1987년의 6월 항쟁이 우리에게는 소중한 교훈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버마 등 각지의 난민신청자들이 한국을 선망하며 찾아오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선배'라면 마땅히 후배에게 소중한 경험을 전해줄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결코 우리만의 세상이 아니다.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필연적으로 저 멀리서 찾아오는 난민과의 접점이 있다. 우리가 값싼 가격으로 즐겨찾는 달콤한 초콜릿, 그 초콜릿에는 저임금 착취노동을 당하는 아프리카 대륙의 어린이들의 눈물이 배어있다. 생활 필수품인 운동화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미 그들의 피와 땀으로 혜택을 입고 있는 것이다. 이미 유명한 이야기다. 그렇듯 흔하게 듣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고민했는가? 한번쯤 자성할 부분은 아닐까.
"결국, 우리는 적들의 말이 아니라 친구들의 침묵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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