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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 개론>, 그렇게 우리는 기억하며 살아간다

#1. 교통사고



  1996년의 마지막 날, 런던의 한 거리에서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사망자가 발생한 끔찍한 사고였다. 


찌그러지고 부서진 차 안에는 중년의 동양인 남녀가 서로를 껴안은 채 죽어 있었다. 그들은 왜 머나먼 런던에서 그런 죽음을 맞이한 것일까. 얼마나 애절하길래 죽는 그 순간까지 서로를 그렇게 꼭 껴안고 있었던 것일까.


부모의 시신을 수습하러 온 남자의 아들과 여자의 딸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이들은 결혼을 해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있었지만, 대학시절부터 20여 년이 넘게 오랜 세월을 서로 사랑해왔고, 함께 지내던 집까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랑일까, 불륜일까. 긴 세월 동안 그들을 끊어질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람의 기억이란, 그리고 가슴 속에 담긴 그 사랑이란, 때로는 무리한 일임을 알면서도 돌더미가 내깔린 가시밭길을 가게끔 하는 힘이 있다. 두 남녀를 이어온 그 질긴 끈의 매개체는 바로 Try to remember, 바로 기억이었다.


Try to remember the kind of September (기억해 보세요 지난날의 9월을)

When life was slow and oh so mellow (삶이 한가롭고 달콤했던 그때를)

Try to remember the kind of September (기억해 보세요 지난날의 9월을)

When grass was green and grain was yellow (초원은 푸르고 곡식이 여물던 그때를)


Try to remember the kind of September (기억해 보세요 지난날의 9월을)

When you were a tender and callow fellow (당신이 여리고 풋풋했던 그때를)

Try to remember and if you remember (기억해 보세요 기억이 떠오르면)

Then follow, follow... (그 기억을 따라가 보세요)


#2. 누구에게나 추억은 있다


<건축학 개론>을 보면서 떠올랐던 것은 중화권 멜로영화 <유리의 성>이었다. 누구에게나 가지고 있는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 대학에 막 진학해 궁금한 것도 많고 싱숭생숭한 것도 많던 그 시절, 따사로운 봄햇살과 함께 지나가는 멋진 그이를 보며 알 수 없는 행복과 함께 가슴 속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던 그 시절, 누구에게나 추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유리의 성>은 제법 충격적으로 시작했다. 주인공을 애초부터 죽이고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혼란의 마음으로 뒤따라온 그들의 아들과 딸은 부모의 비밀을 캐면서 영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명백하게 불륜이지만, 대학생 시절부터 비롯된 그들의 과거 속 이야기가 흐를수록 그들의 자녀들도 마음이 아련해지는 것을 느낀다.  누구에게나, 정말 누구에게나 한번은 타올랐을 첫사랑의 아련한 기억.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정말 너무도 뜨겁게 사랑했고,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 그 마음을 다시 되돌렸던 것이다. 





<유리의 성>이 가지는 의미는, 그렇듯 마음 속에 깊이 담겨진 그 아련한 추억 속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 스크린으로 보여준다는 것에 있었다. 영화 제작의 에피소드도 그랬다. 제작자가 다니던 모교의 오래된 영국풍 기숙사가 헐린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기숙사를 배경으로 그토록 서로를 사랑하고 때로는 슬퍼하며 이별했을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다는 것이다. 


애틋하게 사랑했던 젊은 시절, 살기에 바빠 까맣게 있었을 일상의 나날들, 다시 만나 불타오르는 재회, 그리고 영원히 함께 하기도 했을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들. <유리의 성>이 그렇게 뜨거웠던 이유도 그렇지 않았을까? 기숙사는 헐리기 전까지 말없이 서 있었지만, 수많은 남녀의 사랑과 이별을 지켜보며 때로는 마음을 함께 나누었을 것이다. 수많은 이야기가 모이고 모인 그 감동, 거기에 <Try to remember>의 잔잔함까지….


#3. 건축학 개론



바쁘고 정신없는 나날 속에서 가끔은 과거로 돌아가기를 꿈꾼다.  


지금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진심으로 구구절절했던 감정의 순간들과 기억의 나날들, 마음을 둔 이성에게만큼은 무엇 하나 결점없는 완벽한 사람이길 갈구했던 철없던 그 시절의 이야기가 그려졌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때, 기쁨과 슬픔이 함께 찾아오기 때문에 성숙으로 이끌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기쁨을 통해 사람을 더욱 배려하고 아껴주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한다. 


반대로 슬픔을 느낄 때는 슬퍼도 슬프지 않은 척을 해야 하고,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 다른 곳에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참아야만 하기에 절제를 배운다. 


가능성이 없는 사랑일 때는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며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행복"이라고 나직이 말할 수 있는 쓰라림을 통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아픔을 받아주고 함께 슬퍼해주며 위로할 수 있는 친구도 있었다. 그런 나날과 기억들이 모이고 모여 우리는 하루하루 보이지 않게 성숙해왔다.


<건축학 개론>은 그랬던 우리의 기억들을 시각화했다. 그 시절 우리에게는 일상과도 같았던 음악과 캠퍼스의 풍경들, 이토록 잊고 있었을까 작은 탄식도 하게 된다.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 그래서 선택됐을 것이다. <냉정과 열정 사이>의 남녀가 사랑과 기억의 상징으로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을 삼았다면, 그들에게는 전람회의 음악이 추억의 상징이었다.


#4. 과거와 현재의 충돌


사람의 기억이란 한편으로 영악해서, 죽을만큼 아프고 슬픈 기억이었다고 하더라도 하루하루의 시간은 흘러간다는 것을 알게끔 뭔가 알 수 없는 묘약을 입가에 적셔준다. 그렇게 서서히 망각하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마음은 서서히 마음 한 켠으로 비켜나고, 그러다 보면 마음 속 어딘가 깊숙한 곳에 까맣게 잊고 묻어두게 된다.


그러나 가끔은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마음 한 켠에 묻어놨던 그 기억을 되짚을 수 있는 기회가 언젠가 한번은 올 수도 있다. 하지만 너무나도 갑작스레 찾아온 과거는 당장의 현실과 필연적으로 충돌한다. 반드시 이성 간의 사랑을 두고 일어나는 일만은 아니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가 충돌할 때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과거의 기억이 눈 앞에 떡 하니 나타나 다시 현실이 됐을 때, 지금까지 이어졌던 현실과도 필연적으로 충돌한다.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현명한 것일까?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까? 같은 소재를 두고 정반대의 길과 결과를 보여준 <유리의 성>과 <건축학 개론>을 나란히 제시한 진짜 이유다. 정답은 없다. 정답을 낼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정확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선택의 순간이 온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는 알 수 없지만 그 결과에 따라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른다.





<건축학 개론>에 많은 사람들이 격하게 공감했던 것은, 서로가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다가 우연찮게 이별하는 데에는 그들 스스로가 의도치 않은 많은 이유들이 있다는 것 때문일 듯하다. 누군가의 방해도 있을 것이고, 상황의 오해도 있을 것이다. 


당연하다. 지구는 무려 수십억 명이 넘는 사람이 북적거리는데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욕심과 경쟁 속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짓밟을 때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말을 꺼내기도 겁이 나는 소중한 사랑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한 순간을 위한 욕심 때문에 가볍게 밟을 소일거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큐피트의 장난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목을 타고 넘어가는 쓰라린 소주를 더욱 쓰라리게 한다. 


#5. 기억의 리모델링


<건축학 개론>에 있어 '건축'이란 중요한 매개체다. <건축학 개론>은 과거와 현실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한다. 선택은 현실적으로 하되, 기억은 영원할 수 있도록 '의미있는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여주인공의 집을 다시 지으면서 '재건축'이 아닌 '증축'을 선택했다는 것이 의미심장했다.


좋았던 기억은 좋았던 대로, 슬펐던 기억은 슬펐던 대로, 우리는 그렇게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 가슴 속 어딘가 저 먼 구석에 몰아넣고 까맣게 잊고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진짜 잊는 것이 아니다. 다만 묻어둔 채 꺼내지 않는 것 뿐이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일 때는 서로를 보듬어가며 부대껴 사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다. 기억이 어디 사랑의 기억만이 있던가? 어디 즐거운 기억만이 있던가? 인생은 순간순간 우리에게 수많은 기억을 만들어준다. 기쁨도, 슬픔도, 노여움도, 그렇게 느껴만 간다.





아픈 결과로 끝났던 기억임에도 굳이 기억을 '증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유리의 성>에서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 남녀의 지난 삶을 그 아들과 딸이 되짚어보며 유유히 펼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스크린으로 찾아가 보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것은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기억이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적 선택' 속에서 우리는 결코 고립돼 살아갈 수 없는 자화상을 본다. 과거의 기억을 추억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과거의 기억을 고통으로 여기며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도 있다. 쓰라린 이별의 아픔을 안고 친구의 품에서 펑펑 울던 <건축학 개론>의 승민은 우리 모두의 과거를 말해준다. 주변을 둘러보면 슬픔을 안고 현실과 싸우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야말로 사랑과 이별의 아픔을 다룬 멜로영화 <건축학 개론>에서 '난민'을 떠올린 이유일 것 같다.  




(박형준 활동가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