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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아름다워>, 아버지의 이름으로…

#1. 레온 트로츠키

삶은 원칙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특히나 정적에게 쫓겨 먼 곳으로 떠난 이에게 있어 원칙이란 닿을 수 없는 저 먼곳에 있는 아득한 것이다. 레닌의 사망 이후 스탈린에게 쫓긴 트로츠키는 저 멀리 멕시코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멕시코의 따가운 햇살을 느끼며 트로츠키는 레닌의 얼굴을 떠올린다. 

"자네의 영구혁명론은 들어보면 말은 그럴듯해. 하지만 현재 소련 현실에는 가당치도 않아."

그러나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각오를 다졌다. 죽음을 예감한 시점에서도 그 각오는 변하지 않았다. "죽음은 신념을 지킬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라며 독을 들이킨 소크라테스도 있었다. 확고한 신념만이 평생을 혁명가이자 사상가로 살아왔던 트로츠키에게는 유일한 생명줄이다.

확고한 신념을 돌아보니 정신이 더욱 맑아졌다. 인민의 적이라, 스탈린이 자신에게 붙여준 별명 아닌 별명을 되뇌이며 트로츠키는 쓴웃음을 지었다. 불쌍한 친구 같으니...

아내 나타샤도 벌써 일어난 모양이다. 마당을 질러와 창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따사로운 공기가 나를 감싼다. 햇발에 닿아 벽 아래로 빛나는 연초록 잔디밭과 눈부시게 푸른 하늘, 트로츠키의 눈 앞에 황홀경이 펼쳐졌다. 그렇다. 인생은 아름다웠다.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트로츠키는 새삼스레 되뇌었다.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

확고한 신념과 가슴 속에 품을 수 있는 희망이 있는 한, 어떤 가시밭길이 펼쳐진다고 할지라도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다. 트로츠키는 이어 유언을 썼다.

"인생은 아름다워(Life is beautiful)."


#2. 아버지와 아들

그저 사랑하는 아내와 하나뿐인 소중한 아들을 위해 살고 싶었던 한 남자가 있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산뜻한 아침 출근길도 그에게는 행복이었다. 그렇듯 소박한 행복만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은 그들을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 남자 '귀도'는 유태인이었다. 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유태인은 죄 아닌 죄였다. 죽음의 길을 떠나야 했으며, 하나뿐인 아들 조슈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박하게만 살아온 그들이었다. 그리고 티 없이 맑게 자라온 아들이었다. 귀도에게 있어 죽음보다 더욱 두려운 것은 조슈아의 맑은 꿈이 무너지는 것. 누구보다 소중한 아들 조슈아를 빼앗기는 것이었다. 죽음의 길로 향하면서 귀도는 조슈아를 위해 그렇게 되뇌었을 것이다.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고. 

유태인들을 수용소로 보내기 위한 기차에 타면서, 절망과 공포 속에서 귀도는 평소보다 더욱 수다스럽게 아들의 귀에 속삭인다. 신나는 게임이 시작됐다고. 제일 먼저 1,000점을 얻는 사람이 진짜 탱크를 선물로 받게 된다고. 조슈아는 아빠의 말을 믿었다. 

부모에게 나올 수 있는 힘이란 무한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스스로도 사람인 이상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 했지만, 하나뿐인 희망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떤 힘이든 낼 수 있는 것 같다. 아들은 죽음과 절망의 공포를 알기에는 너무 어렸다. 무엇보다 아들도 소중한 삶을 잃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밖에. 

귀도는 평소보다 과장된 행동으로, 평소보다 더 떠들썩한 말과 웃음소리로 아들을 안심시킨다. <인생은 아름다워> 속 코믹은 그래서 더욱 서글프다. 그것은 단순한 코믹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들을 지키기 위한 한 남자의 사투였다.



#3. 로베르토 베니니, 코미디의 본질을 살리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은 영화적 소재로 다루려고 할 때 늘 벽에 부딪쳤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쉰들러 리스트>를 연출할 때 역시 그랬다. 투자자를 구하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워낙 비극적인 소재였기 때문에 현실적인 흥행이 보장되지 않기도 했지만, 스필버그가 한사코 흑백영화를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스필버그답지 않은 차가운 시선은 관객에게 있어 비극을 더욱 비극으로 부각시키는 역발상의 장치였고, 흑백화면 속에서 한 유태인 아이의 붉은 코트만이 유독 컬러로 부각되면서 스필버그가 굳이 흑백을 고집한 이유도 관객은 남김없이 흡수했다. <쉰들러 리스트>는 세계의 명작으로 역사에 남았다.

로베르토 베니니가 <인생은 아름다워>를 연출할 때도 우려는 있었다. 특히 그가 코미디 영화를 제작한다고 하면서 우려는 더욱 커졌다. 비극의 역사와 코미디가 어떻게 조화될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베르토 베니니는 코미디의 본질을 살렸다. 웃음과 슬픔을 함께 버무리면서, 웃음 속에서 더욱 큰 슬픔을 느끼게끔 했던 것이다. 

사람이란, 때로는 직접 말하기보다 '보여주는 것'을 통해서 더 큰 감동을 느낀다. 아들을 지키기 위한 한 아버지의 과장된 몸짓과 목소리 하나하나가 처절한 싸움이라는 것을 누구라도 쉽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인생은 아름다워>를 향한 우려는 눈물어린 감동으로 살아났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코믹과 함께 호흡하며 애써 묻혀두었던 감정이 폭발하는 것을 느낀 분들이 많았을 것이다. 



#4. 인생은 아름다워

로베르토 베니니가 왜 굳이 제목을 <인생은 아름다워>라고 정했는지 짐작하실 것이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소중한 희망이 있고, 그 희망을 가슴 속에 묻어두고 지켜나갈 때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트로츠키가 죽음을 앞에 두고 아침의 풍경과 아내의 뒷모습을 보며 인생은 아름답다고 한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로베르토 베니니는 그래서 트로츠키의 유언을 제목으로 따왔다.

<인생은 아름다워>의 또다른 백미는 OST 메인 테마곡 <La vita e bella>이다. 첼로와 피아노음이 밝고 경쾌한 음을 연출하지만, 영화를 음미하며 이 곡을 듣는다면 가슴 한 구석이 아려지는 것이 느껴진다. 영화의 분위기와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마지막, 아버지의 사투를 추억하는 아들의 회상이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귀한 선물이었다."

희망이란 그렇듯 멀리멀리 퍼지는 것이다. 내가 아이들에게 희망을 선물한다면, 아이들은 또 자신의 아이들에게 희망을 선물할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희망을 선물한다면, 그 누군가는 또다른 누군가에게 희망을 선물할 것이다.



<인생은 아름다워>가 가슴아린 감동을 주면서도 한편으로 희망을 주는 이유일 것이다. 사랑은 멈추지 않는다. 보이지 않아도 멀리멀리 퍼져 세상을 조금은 더 따뜻하게 만들어나간다. 로베르토 베니니는 <인생은 아름다워>를 통해 그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소중한 희망과 보이지 않는 사랑으로 인하여, 그리하여 인생은 여전히 아름답다고. 



(박형준 활동가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