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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키루> 우리는 여전히 살고 있다

#1. 구로사와 아키라와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의 비극 속 주인공들은 늘 고뇌한다. 뭔가 독특한 결함을 가진 주인공들이 주어진 상황에서 고민하며 때로는 투쟁하다가 결국 그 고뇌 때문에 자멸한다. 


대표작 <햄릿>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대결구도는 대체로 개인과 그를 둘러싼 환경의 대립이다. 환경으로부터 비롯된 운명에 대해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고뇌한다. 어머니와 작은아버지의 재혼과 아버지의 망령이 부탁한 작은아버지를 향한 복수 등, 환경은 햄릿으로 하여금 오로지 작은아버지를 향한 복수만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유도한다. 그리하여 햄릿은 뜻을 이루려 하다가 파멸했다. 


셰익스피어의 이런 세계관을 독특하게 받아들인 영화감독이 바로 구로사와 아키라였다. 집단주의가 강한 일본 사회에서 구로사와 아키라는 집단과 개인을 대비시켜 개인을 부각시키는 내용의 영화를 주로 연출했다. 


좀도둑 출신의 그림자무사가 점차 영주 다케다 신겐에 동화되는 과정을 그린 <카게무샤>, 산적의 횡포로부터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행동하는 농민들의 이야기가 담긴 <7인의 사무라이> 등이 대표적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 주로 엿보였던 대결구도에 휴머니즘을 입힌 구로사와 아키라 특유의 변주곡들이다.


그런 이유로, 오즈 야스지로 등의 동시대 활동했던 일본의 거장들에 비해 일본에서는 다소 인색한 평가를 받았다. 세계적 명성은 누렸지만 말년에는 상대적으로 흥행을 보장받지 못하면서 투자를 제대로 받지 못해 자살시도까지 했던 것이다. 


그조차도 일본 사회와는 다소 맞지 않는 서구식 휴머니즘을 선택한 그의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오죽하면,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 등 그의 제자를 자처한 할리우드의 거장들이 제작비를 지원해서 연출한 <카게무샤> 촬영 과정에서 같은 세트장을 이용해 몰래 또다른 영화 <란>을 연출하다가 제자들의 분노를 산 적도 있을 정도다. 그가 스스로에게 주어진 운명에 순응해가는 웃지 못할 방식이었던 것 같다. 


#2. 시한부 암환자 공무원의 절망적인 일상



그런 의미에서 <이키루>(1952)를 주목할 만 하다. 이키루(生きる)란 우리 말로 '살다'라는 의미다. 산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키루>는 내용으로 봤을 때는 특별한 이야기는 없다. 시한부 말기 암에 걸린 만년 과장 공무원 와타나베의 지루한 일상이 이어진다. 와타나베의 주변에는 자신의 병에 대해 툭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들놈은 며느리의 말만 듣고 아버지는 뒷전에 둔지 오래였으며, 부하직원에게 있어 자신은 서류결제 도장 찍어주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불과 3개월이었다.


연기자에게 있어 최고의 연기는 강렬한 성격파 연기가 아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를 몸에 맞은 옷을 입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펼쳐나갈 수 있는 연기일 것이다. 그런 가운데에도 불특정다수의 관객에게 뭔가 돌아볼 수 있는 틈을 준다면 최고의 연기라고 할 만하다.


<이키루>가 남다른 이유 역시 그럴 것이다. <이키루>는 초반에 와타나베의 찌들어버린 일상을 보여주는 것에 집중한다. 하지만 의미가 있다. 그토록 평범하고도 지루한 장면들을 본다면,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부딪쳐 살아가고 있지만 정작 외로움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단면을 누구라도 확인할 수 있다. 


매일매일 얼굴을 마주하지만 그가 시한부 암환자라는 사실은 조금도 알지도 못하고 관심조차 없는 부하직원들과 가족들, 그리하여 와타나베는 절망한다. 남은 인생이 3개월로 단축됐기에 느끼는 절망은 더욱 클 것이다.


#3. 삶의 행복이란 사소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이키루>는 우리 모두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주변의 사소함으로부터 삶의 진짜 의미와 행복을 찾아본 적이 있냐고. 그저 관성대로 살아온 것은 아니냐고.


구로사와 아키라가 보여준 <이키루>의 와타나베는 특정한 개인이 아니다. 현대인의 무미건조한 일상이 스며든 전형적인 인물 유형이다. 굳이 그에게 '시한부 3개월'이라는 끔찍한 조건을 부여한 이유는 무엇일까? 중요한 터닝 포인트를 제공하려 함일 것이다. 소설 <아버지>도 그랬다. 췌장암 말기에 걸린 아버지와 가족의 눈물겨운 이별을 통해 아버지의 의미, 가족의 의미를 새삼스레 찾아가는 과정을 부각시켰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던진 터닝 포인트란 "사소함으로부터의 행복"이다. 아무 가치 없어보이는 개펄이 우리에게는 생명의 젖줄이듯이, 또한 쌀알 하나를 틔우기 위해 많은 정성이 들어가 있듯이, 너무 사소해서 쉽게 지나치기 쉬운 것으로부터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남기고자 한 것이다. 


와타나베는 죽기 전 자신만의 표식을 남기고자 마음먹는다. 죽기 전, 자신의 삶이 가치 있었다는 증거를 남기고자 한 것이다. 버려진 땅에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터를 만들어야 한다는 민원서류를 발견한 와타나베는 눈이 번쩍 뜨인다. 


'공무원 와타나베'였다면 평소처럼 도장을 찍고 휙 내던졌을 서류였지만, '시한부 암환자 와타나베'는 "내가 세상에 잠시 살았다 간 이유"가 될지도 모를 서류였기 때문이다. 놀이터를 만들기 위해 와타나베는 "이해가 안간다"는 주변의 반응을 뒤로 한 채 열정을 바쳐 일한다. 뻔하디 뻔한 정책 추진과정과 책임미루기 등 각종 구태들조차 구로사와 아키라가 부여한 조건과 터닝 포인트로 인해 알듯 모를듯한 눈물겨움이 배어든다.





#4. 집단의 힘, 개인을 짓밟다


<이키루>의 DVD 겉표지에는 눈 오는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는 와타나베가 그려져 있다. 이 포스터에 모든 영화의 내용이 담겨 있다. 때때로 집단은 개인의 영광을 빼앗아간다. 영광 뿐만이 아니라 눈물어린 노력도 빼앗아간다. 집단의 폭력 속에서 개인은 아무도 모르는 어둠 속에서 눈물을 흘리거나 씁쓸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받아들인 셰익스피어식 세계관의 흔적은 <이키루>의 엔딩에서 엿볼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개인이 운명이나 거대한 상황과 싸우다가 실패하거나 외면당했을 때, 파멸만이 그 결말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와타나베는 달관한다. 조용히 눈 오는 놀이터에서 그네를 탄다. 그러나 슬프다. 직접적인 이야기보다 더욱 슬프며 씁쓸하다. 바로 이것이 구로사와 아키라가 말년에 일본사회로부터 간접적인 거부를 당한 이유다.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며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일본사회와는 다른 풍경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로사와 아키라는 애프터서비스 또한 잊지 않는다. <이키루>는 와타나베의 장례식 시퀀스에 무려 40분 넘게 할애한다. 그게 다 이유가 있다. 와타나베의 정열과 마지막 노력이 집단으로부터 어떻게 난도질당하고 무시당하는지 그 속에도 자세히 스며들어 있다. 한 사람이 그렇듯 살다가 갔지만, 아무도 모르게 정열을 바쳐 일을 하고 소박한 결과라도 많은 사람들이 웃을 수 있게끔 노력하다가 갔음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결국 집단으로부터 이렇듯 무시당하는 힘 없는 개인에 불과한 것일까? 그것으로 이야기를 끝냈다면 구로사와 아키라는 단순한 냉소주의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조용히, 아주 조용히 그래도 서로가 서로를 알아주는 소수의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즐겨 활용하는 암시의 기법은 우리에게 암시 그 이상의 의미를 안겨준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나? 서로가 서로를 조금이라도 돌아본 적은 있는가? 집단이 가하는 유무형의 폭력과 무시 속에서 우리는 조금이라도 뒤를 돌아보며 의미를 찾으려 한 적은 있는가? 와타나베가 쓸쓸히 그네를 타다가 죽어가는 장면은 그래서 눈물겹다. 소외된 이의 모습이지만, 한편으로 우리 모두의 모습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삶은 찰나의 것 소녀여, 빨리 사랑에 빠져라 

그대의 입술이 아직 붉은색으로 빛날 때 

그대의 사랑이 아직 식지 않았을 때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삶은 찰나의 것 소녀여, 빨리 사랑에 빠져라 

그대의 머릿결이 아직 눈부시게 빛날 때 

사랑의 불꽃이 아직 다하지 않았을 때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박형준 활동가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