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원고는 장애여성공감 [IL과 젠더 포럼]의 기획에 따라 비마이너에 연재한 글입니다. 원문링크는 https://beminor.com/detail.php?number=13833&thread=02r24 |
[교차적 관점으로 시설화 비판하기] 17
난민은 어떻게 시설에 갇히는가_ 외국인보호소와 동향조사에 대하여
한국에 찾아온 난민이 겪는 삶의 공간들은 ‘집’일까 ‘시설’일까. IL포럼에 참여하면서 난민을 둘러싼 공간들을 ‘시설화’의 관점에서 다시금 질문해 보게 되었다. 어떻게 난민은 시설에 갇히는가? 누가 난민을 시설에 가두는가? 어떻게 시설 밖으로 ‘탈(脫)’할 수 있을까? 난민인권센터에서 목격한 이야기들을 꺼내며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마리아(가명)는 본국을 탈출해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입국 후 영종도에 있는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에 6개월 동안 머물렀다. 그곳은 국가가 운영하는 숙소였는데, 외출하려면 허가를 받아야만 했고, 정해진 일정과 규칙을 따라야 했다.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에 거주하던 중, 한국에 이미 와있던 대부분의 난민이 장기간 난민심사를 대기하면서 생존에 큰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현실을 알리는 1인 시위에 동참하려고 외출을 신청하였지만,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는 그가 시위에 동참하기 위해 외출하려는 사실을 알고는 돌연 외출 허가를 취소했다.
이후 난민심사 과정에 그의 여권상의 국적이 사실과 다르게 위조된 사실이 드러났다. 한국에 무사히 입국하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해명하려 했지만 기회를 주지 않았다. 결국 추방 명령과 함께 외국인보호소에 구금되었다. 그곳은 감옥과 같았다. 핸드폰 등 소지품은 모두 압수되었고, 보호소를 나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외부와 연락할 방법은 오직 공중전화기 한 대뿐이어서 같은 방을 쓰는 외국인들 사이에 줄을 서서 단체와 연락했다. 공중전화기에 의지해 외부에 도움을 청하고, 정말 오랜 시간을 기다려 겨우 재판을 받을 수 있었지만, 당시 아직 난민으로 인정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고 입국하자마자 여권 위조사실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볍게 배척당했다.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상대방으로 나온 출입국공무원은 마리아가 영종도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에 거주했을 당시 그의 생활습관이 불량하고, 규칙을 몇 차례 위반했다는 내용이 담긴 기록을 법원에 제출했다. 그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일상이 기록되었고, 그것은 판사에게 자신이 위험하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용도로 활용되었다.
마리아는 약 1년 6개월 구금되었고, 때로는 부당한 구금에 항의하다가 징벌방(독방)에 가둬지기도 하였다. 기약 없는 구금이 계속되고 출국하는 것 외에 더 이상 그곳에서 나갈 방법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좌절감에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50일이 넘는 단식이 계속되었고, 출입국은 그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보증금을 받고 임시로 구금을 풀어주었다. 이후 그는 난민지위를 인정받았다. 자유를 얻었고, 안정된 체류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간간히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경찰이라며, 친근한 목소리로 요즘 어떻게 사는지 물어볼 때 여전히 그의 일상은 감시받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어 매우 불안하다. 그리고 한국에 온 지 몇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단체를 찾아가지 않고서는 한국사회의 시스템을 이용할 수 없고, 그곳의 공무원과 소통할 수 없다. 여전히 고립되어 있는 것 같다.
마리아가 구금되었던 외국인보호소는 ‘집’일까, ‘시설’일까. 국가가 운영하는 난민숙소,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는 ‘집’일까, ‘시설’일까. 그렇다면 그가 살고 있는 거주지는 ‘집’일까, ‘시설’일까. 이 사회는 이방인에게 과연 ‘집’일까, ‘시설’일까?
자유가 박탈된 공간, 외국인보호시설
고은지님은 지난 연재 글에서 한국 정부가 사실상 모든 행정절차에서 난민의 권리를 제외하여 일정 정도의 ‘불법’ 상태에 놓인 사람들을 양산하며, 이를 통해 연간 600억 원에 달하는 수수료를 확보하고, 외국인 보호시설에 유입될 사람을 꾸준히 모집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했다(난민의 피로 자신의 피난처를 찾는 대한민국, 고은지). 외국인보호시설에의 유입은 대개 단속에서 시작된다. 출입국은 정기적으로 단속반을 돌려 무자비하게 외국인을 체포해 추방시키거나 외국인 보호시설로 보내는데, 이 살인적인 단속과정은 결국 사람을 죽음에 몰아넣고도, 반성 없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단속 준비과정에서 안전에 관한 논의와 계획은 전무했다. 욕설과 강압적인 태도로 인해 단속당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도 자신이 무슨 잘못한 것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반항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내외국인 가릴 것 없이 수갑을 채운 후 신원을 확인하였고, 공무원증은 패용되지 않았다.” (살인 단속 규탄 및 미얀마 노동자 딴저떼이씨 사망사건 대책위원회, 딴저테이씨 사망에 대한 법무부 책임을 명시한 인권위 권고 이행촉구 기자회견문 중에서)
외국인보호시설은 외국인 억압 정치의 정점에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공권력은 절차적∙실질적 통제를 상실한 채 무분별하고, 잔인하게 작동되고 있다. 이를 목격하거나 경험한 이는 “나도 언제든 하루아침에 여기에서의 일상을 정리할 틈도 없이 추방당할 수 있고, 무기한 구금될 수 있다”는 불안한 감각을 몸에 지니게 된다. 한편, 돌아갈 곳이 없어진 난민은 ‘추방’의 선택지도 없기 때문에 결국 ‘구금’되기를 택할 수밖에 없다.
“이곳은 외국인을 보호하는 곳입니다. 호텔이에요.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그래서 안 떠나고 계속 살고 있는 겁니다” (외국인보호소 실태조사 당시 한 출입국 공무원의 말, 2015)
“감옥에서 지내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여기서 지낸다는 건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라는 걸 한국 정부는 알아야 합니다” (리즈완, 2015)
‘외국인보호시설’은 ‘감옥’과 ‘수용소’ 기능이 혼재된 ‘예외적’ 장소다(위의 글, 고은지). 자유가 없고, 모든 일상이 통제되는 외국인보호시설이 그곳에 갇힌 이에게 ‘집’이 된 적이 있었을까. 외국인보호시설을 유지하는 지배 권력에 대항하고, 탈시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외국인보호소’의 실체를 분명하게 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국내의 여러 외국인 보호시설은 자유의 박탈이 이뤄지고 있고, 자의로 떠날 수도 없다. 그리고 형식적으로도 형사절차에 따라 운용되는 구치소 또는 교도소와 사실상 동일한 구금시설로 존립 및 운영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외국인보호시설은 처음 설치될 당시에는 ‘외국인수용소’었고, 그 개념은 “강제퇴거명령을 받은 외국인을 송환하기까지 일시수용하는 시설”이었다. 그러다 1992년 12월 출입국관리법을 개정하면서 ‘외국인보호소(보호시설)’로 이름을 바꾸고, 그 개념도 "외국인을 ‘보호’할 목적으로 설치한 시설”이라고 명시하였다. 그러나 당시 기록에 따르면 실제 시설의 운영 목적과 방식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이 전략은 ‘구금’이라는 폭력적인 공권력 행사를 용이하게 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억압된 삶들을 은폐하며, 외부 감시의 눈을 가리게 하는 데 성공적이었다. 외부의 통제와 감시 없이 운영되던 외국인’보호’소는 2007년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가 벌어지는 비극으로까지 이어졌다.
“보호의 개념이 사전적 의미와는 달리 강제퇴거 대상 외국인의 수용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어 정의규정이 필요하다는 비판이 제기됨. 보호를 강제퇴거 대상에 해당된다고 의심할 만한 사람을 출국시키기 위하여 일정한 장소에 인치(引致)하여 수용하는 집행활동으로 명확히 함” (2010년 5월 출입국관리법 개정 주요내용)
참사 이후 뒤늦게 ‘보호’의 실체가 외국인의 신체의 자유를 구속해 수용하는 행위임을 확인하는 정의규정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여전히 이곳은 외국인’보호’시설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 지배권력을 외부에서 감시하고 통제해야 할 책임이 있는 기관들에게 외국인보호시설에 갇힌 이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려면 거의 항상 외국인보호시설의 억압적이고도 폭력적인 실태를 설명하고 설득해야만 했다. ‘보호’라는 두 글자의 효과는 실상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다. 구금된 이의 절규와 고통에 무감각한 표정과 반응에 다시 한번 시설의 높은 벽을 깨닫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외부의 통제가 미치지 못하는 동안 구금된 이들은 떠나지도 못하고, 나가지도 못하는 이 거대한 시설에 장기간 갇혀 있다. 그들 중 어떤 이는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보호실 공중전화기를 통해 듣게 되었고, 어떤 이는 “한국에서 기약 없이 구금되느니 차라리 가족이 있는 본국에 가서 옥살이를 하겠다”며 떠나기도 하였다. 외교적 큰 행사가 열리거나 정권이 바뀌는 시기에 장기구금을 최소화하라는 정책에 따라 어느 날 한시에 추방되기도 하였고, 보호시설의 억압적인 규율에 항의하다가 독방(징벌방)에 가둬지기도 하였다.
과연 외국인보호시설에 대항한 ‘탈시설운동’이 전개될 수 있을까? 우리는 거대한 괴물이 되어버린 시설에 작은 스크래치 하나 낼 수 있을까? 조미경님은 지난 연재 글에서 탈시설운동의 의미는 시설화를 유지하는 지배 권력은 무엇인지를 분석하고 이에 대항하는 것이라 하였다(장애인 탈시설운동에서 이뤄질 ‘불구의 정치’간 연대를 기대하며, 조미경). 김현철님은 시설의 경계는 경계 그 자체로 이미 확정된 의미를 지니지 않고, 경계가 수행되는 방향과 강도가 그 경계의 성격을 형성해가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탈시설을 추구해나가기 위해서 형성해나가야 할 시설의 물리-사회적 경계는 어떠한 방향과 강도를 전제로 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필요할 것이라 했다(끊임없이 유동하는 시설의 경계, 김현철). 그렇다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지만, 외국인보호시설에 대항한 탈시설 운동의 시작은 이 거대한 시설의 정체를 명확히 드러내는 것, 그래서 외부의 끊임 없는 감시와 통제가 가능한 구조를 만드는 것이지 않을까. 그리고 나아가 이 시설을 유지하는 출입국 권력에 대항하여 외국인보호시설이 왜 필요한지, 그것이 지금의 구금 현장을 정당화 할 수 있을지, 시설의 존재가 추방의 결정과 시도를 용이하게 하고, 한편 유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외국인보호시설의 물리적 경계는 어떻게 허물 수 있을 것인지, 외국인보호시설에 구금시키고 추방시키는 통제의 정치는 변화할 수 있을지를 계속해서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일이지 않을까.
일상적 감시, 동향조사
한편, 사회 안에서 난민이 살고 있는 거주공간은 ‘집’이 되고 있는가.
2018년 말경, 그간 들어보지 못했던 상담 건들이 접수되었다. 일부 난민이 난민심사를 대기하면서 출입국에 체류를 연장하러 가면 체류연장 허가를 해주지 않고, 특별한 설명 없이 외국인등록증(ID카드)을 가지고 간다고 했다. 그리고 가족들과 거주하는 집에 몇 차례 출입국 공무원들이 찾아와서는 통장거래내역을 제출하도록 하고, 종교생활 등 일상을 조사했다. 수시로 전화가 와서 집에 있는지를 물어보고, 혹시나 전화를 놓치면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거나 집을 찾아왔다. 이것은 약 3개월 동안, 혹은 그 이상 외국인등록증을 압수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실체를 파악하고자 법무부에 보낸 질의에 대해 그들은 “출입국관리공무원 등은 출입국관리법에 따른 신고 또는 등록의 정확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각종 신고 또는 등록의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으면 그 사실을 조사할 수 있으며, (중략) 출입국관리공무원 등은 외국인이 출입국관리법 또는 출입국관리법에 따른 명령에 따라 적법하게 체류하고 있는지를 조사하기 위하여 외국인, 외국인의 소속 단체 등을 방문하여 질문하거나 그 밖에 필요한 자료를 제출할 것을 요구하는 등의 동향조사를 실시할 수 있습니다”라는 답변을 보내왔다.
‘동향조사’라는 이름으로, 출입국관리 공무원들은 아무런 설명과 영장 없이 집을 찾아왔다. 일상생활 일거수일투족을 알고자 하였고, 통장거래내역을 낱낱이 공개하게 했다. 심지어는 개인의 내밀한 영역인 종교활동에 대한 질문을 했다. 자주 출입국 공무원들이 집을 드나들자 집주인 또는 이웃들은 혹여나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삶이 불안해졌다. 동향조사를 받은 이들은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 게시글들 가운데 정부비판적인 글은 없었는지 다시 자신을 검열하기도 했다. 그렇게 감시에 시달리다가 수개월이 지나자 또다시 아무런 설명 없이 조사가 끝났다며 외국인등록증을 돌려받았다. 항의하는 과정 또는 일부 재판에 제출된 자료를 통해 특정 난민이 ‘실태조사 대상자’로 분류되어 체류와 주거, 수입원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다는 것 외에는 ‘왜 이와 같은 조사를 실시하였는지’, ‘어떤 기준에 의해 실태조사 대상자로 분류되었는지’, ‘실태조사 결과는 어떠하였는지’ 등 아직도 아무것도 명쾌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이전부터 일부 난민에 대한 감시와 사찰은 계속 있었다. 경찰서 외사과 소속이라며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는지 개인 핸드폰으로 밤낮없이 수시로 전화가 와서 일상을 묻기도 하고, 페이스북 등 개인 SNS 메시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한 내담자는 “경찰이 굉장히 친절한 목소리로 개인 핸드폰 번호로 전화가 와서 ‘어려운 일 있으면 연락해라’, 또는 ‘저녁에 한 번 만나서 밥이나 먹자’는 등의 말을 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혼란스러웠다”고 말하기도 하였고, 어떤 이는 외사과 소속이라고 밝힌 사람이 “나는 너가 ○○월 ○○일에 열린 집회에 참석한 것을 알고 있다”는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내와서 불안한 마음에 집 밖을 나가지 못하기도 했다. 사찰에 시달리다 결국 한국을 떠난 이도 있었다.
김지혜님은 지난 연재 글에서 내가 머무는 이곳이 ‘집’이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공간으로서 주거와 그 공간에 대한 통제권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했다(탈시설 운동은 ‘없애는 것’ 넘어 ‘만드는 것', 김지혜). 그렇다면 그 일상적인 공간이 누군가에 의해 감시되고 있을 때, 그곳은 더 이상 안전한 ‘집’이 되지 못한다. 더욱이 그 감시 권력은 나를 심사하고, 하루아침에 나를 추방시킬 수도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동향조사의 사례들은 특정 국가 출신의 난민에게 집중되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무슬림’ 출신의 ‘이집트인’이었고, 이들 중에는 한국에서 ‘정치적 목소리’를 낸 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이와 같은 사찰은 특정 집단에 대한 낙인을 만들어 내는 데 활용되거나, 누군가의 정치적 목소리를 억누르기 위해 감행되었을 가능성도 짙다.
내가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집, 내 일상의 기록들, 나의 종교생활… 국가가 개인들의 가장 사적인 공간을 침범해 왔다. 체류허가를 내줄지 말지 여부를(ID카드를) 볼모로 삼은 후, 비자발적인 동의를 앞세워 사생활 침해가 자행되었다. 이 대대적인 ‘체류관리’라는 조사가 진행된 후, 난민의 주거가 불안정하니 안정적인 주거지가 확보되어야 하겠다거나, 난민의 경제상황에 따라 취업 등 생계정책을 강화해야 하겠다거나 하는 등의 정책 변화는 일체 없었다. 오히려 이 조사의 대상이 되었던 특정 집단과 그 주변에 대하여 당신의 일상이 감시당하고 있고, 국가는 당신의 영역을 언제든 침범할 수 있으며, 무엇으로든 발목을 잡아 조사하고 추방할 수 있다는 불안하고, 두려운 감각을 심어주었다. 실체가 보이지 않아 더 불안한 시설 안에 갇히게 된 것이다.
개인에 대한 통제와 억압의 공간으로서의 시설과 그것으로부터 ‘탈(脫)’하는 시설 밖의 경계는 단순히 물리적으로 구획되지 않는다. 외국인보호소,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와 같은 물리적 시설의 밖, ‘지역사회’에 거주하고 있지만, 일상의 감시와 통제는 또 다른 형태의 시설이 되어 개인들을 가두고 있다. 난민의 ‘주거’란 과연 ‘집’이 될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안전을 구해 찾아온 비호국은 오히려 난민을 위험에 빠뜨리고, 가두고, 추방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꾸준히 그래왔지만, 근 몇 년 사이 더욱더 억압의 강도가 세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어떻게 ‘탈(脫)’할 것인가? 난민에 대해 가해지는 통제와 낙인의 일면을 여실히 보여준 동향조사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납득할만한 설명도 이뤄지지 않았다. 출입국은 법에 근거한 조사였다며 아주 가볍게 자신들이 범한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 이런 일들을 경험하였고, 여전히 심사와 관리의 대상인 사람에게는 이 지배 권력이 무엇인지 실체를 파악하는 것조차 두렵고 막막한 일이다. 동향조사에 대한 문제제기는 아직 시작에 머무르고 있다.
김연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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