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와 난민인권 1강 [신자유주의와 난민인권] 강의 후기
_ 홍혜은
어제 저녁에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옆 테이블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예멘 난민들이 칼 들고 난동 부렸다며?"
"대박 왜 그랬대?"
"몰라."
"보니까 핸드폰도 다 있던데.. 난민은 왜 받아 주는 거야?"
"그니까."
"그래두 제주도라서 다행이다. 근데 왜 제주도에만 있지?"
"그나마 거기 몰아 넣어둔 거 아닐까? 위험하니까.."
평소엔 다른 사람들 시선에도, 남들이 나누는 얘기에도 잘 신경을 안 쓰는 편인데, 이날따라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귀로 날아와서 꽂히는 것 같았다. 실제 예멘 난민에 대한 여론이 이런 상황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인터넷 공간 안에서 댓글로만 읽던 말들을 오프라인에서 들은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해서 눈을 돌려 조금 살펴봤다. 대학생이나 사회초년생쯤으로 보였다. 일행이 네 명이었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모두 평범해 보였다.
위에서 던진 질문들 하나하나마다 약간의 사실관계를 제외하고는 단순한 문장 몇 개로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란 걸 알았기에 쉽게 감정이 동요되지는 않았다. 요 몇 년 동안 끊임없이 알게 된 사실은 이것이다.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있고, 더디더라도 문제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방향을 알고 있다면, 의아함도 두려움도 조바심도 줄어든다는 사실.
나는 아마 지난 28일 난민인권센터에서 주최한 강의를 듣고 왔기 때문에, 이렇게 다소 안정된 기분으로 내가 앞으로 해 나갈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일지 고민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을 조금 더 폭넓게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주최측, 그리고 강의를 맡으셨던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의 김현미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당시 강의를 들으며 얻은 생각과 소감을 조금이나마 나누고자 한다.
이 강의를 들으며 가장 많이 하던 건 경상도에서 시집 와서 타지에서 삼십 년이 넘게 생활한 엄마 생각이다. 한국에서 '경상도'란 최고의 정치 권력을 가진 남성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기도 하지만, 내게 경상도 출신이라는 라벨링은 어딘가 숨기고 싶고, 부끄러운 것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충청도 토박이 양반 집안 출신이고, 목소리가 크고 성격이 드센, 그러나 챙겨 줄 부모도 믿을 구석도 하나 없이 아무런 연고 없는 데로 덜렁 시집 온, 고아 같은 '경상도 여자'인 엄마를 내내 구박했기 때문이다.
충청도라고 하지만, 내 아버지의 출신지는 경기도에 더 가까운 곳으로 경기도 방언, 그러니까 거진 표준어에 가까운 억양을 구사하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아무리 그곳에 오래 살아도 완벽한 표준어를 쓸 수 없었고, 그 지역에서 영원한 타자였다. 나는 내 깜냥껏 엄마를 사랑했지만, 엄마의 드세고 세련되지 못한 말투만은 아무래도 사랑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미워하고 부끄러워 했던 엄마의 특성들은 내게도 고스란히 부끄러운 것이 되었다. 살면서 엄마가 목소리를 높이던 순간을 자주 부끄러워 했다. 언젠가는 버스에서 너무 큰 목소리로 '교양 없이' 말하는 엄마가 부끄러워 팔뚝을 꼬집기도 했다.
나는 어느덧 삼십 대이고, 엄마도 그만큼 나이를 먹어버렸다. 나는 이제 차별이 왜 나쁜 것인지, 차별은 왜 사람을 모나게 하고 세상을 더 나쁘게 만드는지를 고민하면서 언행 하나하나를 결정할 때마다 한 발짝 한 발짝 빙판을 내딛는 심정으로 살아간다.
아버지에게로부터 그런 취급을 오래 받고 살아 온 엄마는 어딘가 모르게 주눅들고 삐뚤어진 구석이 있는 노인이 되었다. 본인도 가난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특성을 폄하한다거나, 본인도 못 배웠으면서 못 배운 사람들의 생활 양식을 비하한다거나, 불행과 아픔을 가진 사람들의 불행과 아픔을 "신으로부터의 저주"라고 말한다거나.
엄마는 지금 쏟아지는 뉴스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슬람 국가 출신인 난민들은 당연히 '우리의 땅'에 발붙이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강의를 들으면서 두 세 가지 이야기를, 엄마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
첫 번째로, 엄마와 같이 주류 사회의 변두리에 내몰리는 사람들이 단일한 요인 때문에 '소수자'가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금 이 세계에서 한 사회에서의 '추방'은 정말로 여러 가지 요인 때문에 발생한다. 견딜 수 없는 경제적 궁핍도 그 요인 중 하나겠지만, 사람들의 편견과는 달리 정치적인 갈등 때문에도, 그리고 때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스스로에게는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 그 자체로도 사람은 차별을 당하고, 어떤 공간에서 환영 받지 못하고 내쫓긴다.
김현미 선생님이 만났던, 한국 남성과 결혼했던 한 몽골 출신의 여성은 공항에서 입국을 거부 당하고 한국에서 내쫓겼다. 한국은 내국인에게 외국인에 대한 신분 증명을 일임하는 국가다. 이 여성은 혼인 후 공항까지 들어왔다가 몽골로 추방된다. 이유는 '과거'의 의심이다.
우리의 편견과는 달리, 몽골인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럽인의 것에 가깝다고 여긴다고 한다. 두 남녀가 서로의 조건을 확인하고 혼인 신고를 한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중학교 교사였던 이 여자가 자신의 학교 동창들을 만나 양쪽 뺨에 키스하며 인사하는 것을 목격한 한국인 남성은 화가 났다. 그는 한국어-몽골어 사전의 '과거'라는 단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여성을 질책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여성은 '과거'라는 단어가 한국에서 어떤 맥락으로 사용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 이후 자신의 신분 증명을 철회하고 '잠수'를 탄 남성의 사정을 모르고 남편의 나라인 한국에 입국하려 했다. 그러다가 그대로 내쫓겼다.
서류상의 남편의 행방을 모르고 지내던 여성은 자연스레 자국의 남성과 다시 장기적인 관계를 맺고 혈연 공동체를 꾸렸지만, 몽골법은 한국에서의 혼인 관계 해소 증빙 자료가 없이는 이혼 절차를 밟아 주지 않았다. 결국 이 사정을 알게 된 김현미 선생님이 국내의 법률 기관들을 전전해 겨우 이혼 수속을 밟아 주었다. 이 여성이 한국 사회에 무리 없이 편입되려면 무엇을 포기해야만 했던 것일까?
두 번째로, 한국의 원래 속성이라 여겨지는 '단일 민족 신화'가 얼마나 부단한 노력을 거친 산물인지, 그 진실에 대해 공유하고 싶다.
대부분 한국은 '원래' 단일 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 사회를 침입한 이민자나 난민은 '원래' 이질적인 존재라고 여긴다. 그렇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 지금 난민이 발생하는 아프리카 국가들을 포함한 한국을 돕기 위해 여러 국가가 나섰다.
당연하게도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다양한 인종이 들어 왔고, 한국에는 많은 혼혈아가 태어났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이 현상을 처리한 한국 정부의 태도다. 이승만 정부는 이 시기 이후 태어난 혼혈아들을 '국가적 상흔'이라 명명하며, 정책적으로 대규모 입양을 보낸다. 특히 주로 해외 입양된 혼혈 아동은 흑인과 한국인의 혼혈인데, 그들의 '피부색'이 주요한 요인이었음은 언급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는 진작 더 다양한 존재들로 이루어졌어야 했다. 학창 시절을 떠올릴 때, 우리의 졸업사진에 모두가 무리 없이 '한국인'으로 상상될 수 있는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 많은 사람이 알아야 한다고 느꼈다. 각종 '혼종적인 것'을 두려워하고 배척하는 분위기는 요 얼마간 단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나는 얼마나 망연해졌는지.
다음으로는, 실존하는 '난민'이나 '이민자'의 사정을 알지 못한 채 그들을 균일한 집단으로 상상해 놓은 채로 내리는 평가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지에 대한, 강사의 경험에서 비롯된 고백을 함께 나누고 싶다.
김현미 선생님은 강연에서 여러 번, "나도 인종주의자다", "그들 앞에서 (차별적이고 편견적인 사고를 하는 것이) 부끄러웠다"는 말을 했다. 나 역시, 완전히 인정한다. 나는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사실을. 필리핀 여성인 나의 전화영어 선생님이 한국이 얼마나 비자 받기 어려운 나라인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함께 화를 내면서도, 그녀는 로스쿨 학생이고 필리핀에서 얼마 안 되는 고등 교육의 수혜자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연속적으로 떠올리며 그녀라면 불법 체류를 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녀는 무해한 필리핀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와 지난 몇 달 간 무수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녀가 얼마나 내 머릿속의 필리핀인 같지 않은지, 얼마나 미디어에서 유통되는 외국인 노동자의 이미지와 다른지, 얼마나 1세계 기준의 교양 교육을 잘 받았는지를 확인하며 감탄하고는 했다.
이민자와 난민 주제로 오랫동안 현장 조사 포함한 연구를 진행해 온 연구자라면, 나와는 전혀 다르게 완전히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를 가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현미 선생님은 현장에서 난민들을 만나면서 '내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니까, 내가 더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일 테니까 내가 그들을 도와 줘야지' 하는 편견을 가지고 그들을 대했다가 망신을 당했던 경험을 스스럼 없이 나눠 주셨다.
그러니까, 알고 보니 그들은 해외 대학에서 교육 받고 영어를 할 줄 아는 자신보다 더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경우도 있었고, 국제 정세에 대해 훨씬 더 넓은 시각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전반적으로 살아 남기 위해 여러 정보를 취합해 빠르고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린 사람들 답게 자신보다도 훨씬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들이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나눠 주셨는데, 나는 이런 솔직한 이야기들이 참 좋았다.
요 며칠 간 강연을 취재한 기사 등의 반응은 조금 답답했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인종주의자라고 인정하는 것부터가 대화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한 김현미 선생님의 발언은 본인을 제외하고 일부를 '무지한 사람들' 취급하려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이런 배경을 가진 한국 사회에서 나고 자란 우리는 타지에서 온 존재들에게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길러져서 그대로 어른이 되었다는 가정 하에서 그런 표현들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꼭 함께 나누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윤리적 통합성'을 갖추고자 하는 삶의 지향점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판단하는 기준은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강의를 통해서 들은 바, 한 사람이 윤리적인 통합성을 갖추고, 윤리적 실천을 하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결코 무용한 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가식'으로 여겨지는 행위를 조롱하고 싶어 한다고 느낀다.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서 나온 어떤 행동들이 쉽게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렇지만, 나는 이 마음들이 부질없다고 생각지 않는다. 당장의 경제적인 손익 계산 결과표가 난민을 수용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가장 우선적인 지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많이 봤다. 그리고, 난민이 이주해 온 국가에서 그들이 얼마나 고등 교육을 받은 전문직이었는지를 강조하는 주장들을 많이 접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접근 방식에는 완전히 동의할 수가 없다. 몇 명만이 경제적 풍요로움과 안전함을 누리며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는 무슨 소용이 있어서 존재하는 것인지, 나는 역으로 질문하고 싶다.
일부의 안락함을 극대화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사람 아니라고 여기던 사회는 과거에도 많이 존재했다. 신분제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는 부품으로 돌리는 사람들에게서 '인간답게 살기 위한 권리'를 박탈한 것이 당연했다. 그게 더이상은 안 당연한 일이라서, '인권' 개념이 발명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인류 사회에 일어난 불가역적인 변화라고 여긴다.
김현미 선생님은 강의 중에 '윤리적 통합성'을 지키는 삶을 살고 싶다고 여러 번 이야기하셨다. 그 표현에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어디에 있든 언젠가 내가 결국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일부'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가득찬 세계는 결국 지옥이라고 생각한다. 언제 어디서든 나는 떠밀려간 삶을 살 수도 있단 가능성을 인지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세계에서 살고 싶다. 그렇게 될 가능성이 아주 적더라도. 거의 없는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많은 시행착오 끝에, 인류가 인간이라는 사실 그 자체로, 생긴 것이 달라도, 생활 양식이 달라도, 최소한의 존엄성을 보장받아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은 되돌릴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용기를 내서 나의 곁을 내어주는 삶을 살아 가고 싶다. 어릴 때 부끄럽다고 생각했던 엄마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아 나가는 마음으로라도. 그것은 비단 이번 난민 이슈에서만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혐오를 멈추기 위해 더 알아 나가려는 용기와 노력을 멈추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줄인다.
덧, 사진 후기까지.
'신자유주의와 난민인권 강의' 끝 무렵의 사진 촬영 때 있었던 일.. 쉬는 시간에 강의 끝날 때 청중석 중간중간에서 에이포 글씨 한 장씩 들고 사진 한 장 찍겠다면서 난민센터 활동가 분이 다가오셨다. 동생과 나는 각각 "잘"과 "오"를 들도록 부탁받았다. 풀센텐스는 "Welcome Refugees 잘 오셨습니다" 뭐 이런 것이었다. 근데 김현미샘의 열강 이어져서 생각보다 강의 생각보다 늦게 끝나버렸다. 막판에 동생은 시계를 보더니 "앗 독일어 과외 선생님 올 시간이다!!!" 하고 뛰쳐 나갔다. 나도 아무 생각 없이 "잘 가~~" 했는데, 잠시 뒤 생각하니까 동생이 "잘"을 가지고 갔다. 같이 강의 듣던 분과 둘이 이 사실을 깨닫고 전화해서 다급하게 "잘!! 가져와!! 잘! 가져오라고!" 하고 속삭였다. 그러다 못 알아듣자 카톡으로 '글씨!! 잘!! 가져와!!' 하였다. 질의응답 시간은 점점 막바지로 향했고 마지막 질문이 끝나자 사회자 분이 "마무리 멘트를 하는 데 2분을 쓰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동생에게 '2분 남앗다고 ㅠㅠㅠㅠㅠ 어서 오라고' 했고.. 동생이 빨리 종이를 받으러 내려 오라길래, '안대 나는 "오" 라서 못 가!!! "셨습니다"만 남으면 더 난감!" 이렇게 답장을 하는 사이 사진 촬영 안내 멘트가 나오면서 종이를 들라는 사회자님의 안내 멘트 나와 버렸다. 사회자님은 "자 사진 찍겠습니다 저 왼쪽부터 글씨가 있는데요 웰..컴.. 리퓨지.. 오셨습니다..?" 하고 우리가 들고 있는 종이 글씨를 읽었고, 나는 글씨 종이 뒤에 숨어서 얼굴이 빨개지게 웃었다.. 리퓨지 ㅋㅋㅋㅋㅋ오셨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그 사이 문 앞에서 다른 센터 활동가분이 동생에게 "잘"을 받아서 황급히 뛰어오셨고, "잘"은 뒤늦게 합류에 성공해 제대로 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는데요. 그래서 저는 강의가 끝나고 나서도 오랫동안 웃을 수밖에 없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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