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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Activities

[기고] 나는 여성성기훼손(FGM) 피해자다


※ 난민인권센터에서는 난민과 관련된 시민분들의 다양한 경험과 목소리를 담고자 기고글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다립니다. 문의 : refucenter@gmail.com  



나는 여성성기훼손(FGM) 피해자다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말하기>


하리타



독일에서 살고 있는 난민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베를린의 정치그룹 국제여성공간(IWSPACE, International Women Space)에서 발간한 책자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이야기>에 수록된 내용으로, 이주여성과 난민여성으로 구성된 팀이 다른 난민여성들을 인터뷰하여 1인칭 에세이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독일과 한국에서 저널리스트.작가로 활동하는 하리타님이 번역, 해제를 달아 소개합니다. “나는 여성성기훼손 피해자다”(I am a victim of Female Genital Mutilation) 편의 주인공은 아프리카 감비아에서 독일로 망명한 20대 초반의 여성입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합니다. [편집자 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자행되는 여성성기훼손

내 이름은 빈투 보장(Bintou Bojang)이다. 나는 17살의 나이에 감비아에서 독일로 망명을 왔다. 여기 온지는 3년째다. 내게는 독일에서 태어난 두 살짜리 아들이 있다. 내가 감비아에서 피난을 온 것은 가족 문제 때문이었다.

나는 FGM이라고 알려진 여성성기훼손(Female Genital Mutilation) 피해자다. 아프리카에는 가정폭력을 비롯해 여성을 향한 다양한 폭력이 있지만, 나는 여성성기훼손이 그 중 최악이라고 본다. 다른 여자들이 딸 몸의 일부를 잘라내는 것을 부모가 그냥 보고만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야만적인 행위, 여성폭력의 야만적인 형태라고 본다. 나는 이에 대해 입 다물고 있을 수 없다. 나는 온 세상을 향해 언제고 내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그리고 신께 감사하게도 독일에서 나를 지지해줄 많은 여성연합과 조직들을 찾았다. 나처럼 여성성기훼손의 피해자인 다른 여성들을 많이 만나온 것도 행운이다.

※ 여성성기훼손(Female Genital Mutilation; FGM)은 여성의 성기 일부를 절제하는 수술로, 성기 자극을 통한 쾌감을 경험할 기회를 일찌감치 차단시키는 풍습이다.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2억 명 이상의 여성들이 이 수술을 받았다. 또 매년 3백만 명의 사춘기 이전 여아들이 수술 당할 위험에 처해 있다고 알려져 있다.(유니세프 2013년 조사) 아프리카 중동과 아시아 30여 개국에서 주로 행해져 왔지만, 영미권과 유럽 등에 정착한 이주민 가정에서도 민족 전통을 따른다는 명목으로 어린 딸들에게 불법 수술을 강제한다.

‘여성 할례’라는 지칭에서 알 수 있듯이 민족적 종교적 의식으로 행해지고, 집단의 신뢰를 받는 나이든 여성, 산파, 간호사가 마취 절차도 없이 불결한 칼, 가위, 깨진 유리조각, 면도날로 성기 절제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수술을 당하는 여성은 극심한 고통을 겪고, 감염과 과다출혈, 쇼크로 인한 사망 위험도 매우 높다.



▶ 여성성기훼손(FGM)이 가장 광범위하게 행해지는 아프리카 지역에서 각 국가별로 15-49세 여성 중 피해자 비율을 나타낸 도표.

80% 이상이라는 높은 비율을 보인 나라 가운데 이집트, 기니아, 수단에서는 법으로 이미 금지한 뒤에도 이 같은 수치를 보였다.

점점 더 많은 국가들이 법적으로 여성성기훼손 수술을 금지하고 있다. (출처: UNICEF 2012)



여성성기훼손 행위는 우리 사회에서 지속되고 있는 여성 할례 전통이다. 이에 반하는 어떤 말이라도 하면 부모님은 ‘이건 전통이다, 선조 때부터 해오던 것’이라 한다. 부모 세대는 이를 자부심의 원천으로 여긴다. 우리 사회에서 할례를 거치지 않은 여자는 부정하고 더러운 사람으로 비춰진다. 자기 몸에 할례를 거부한 여자아이는 우리 민족, 내가 속한 만딘카 (Mandinka) 남자와 결혼할 자격이 없다.

올로프(Wolof)와 같이 할례를 행하지 않는 민족도 일부 있다. 올로프 여성은 할례 때문에 만딘카 남성과 결혼이 허락되지 않는다. 만딘카 족 남성과 사랑하는 사이가 된 올로프 여성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 그 여성은 사람들이 자기 성기 일부를 도려내게 해야 한다. 이는 심각한 문제다. 나는 여성 할례 전통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뭐라 설명도 못하겠다. 어떻게 딸의 몸의 일부를 잘라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 짓을 하고도 어떻게 계속 춤을 출 수가 있나?

어른들은 악어사냥을 가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할례를 당했을 때 11살에서 12살 중간쯤 되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나와 다른 여자애들에게 우리가 악어사냥을 가는 것이라고 했다. 돈이랑, 바나나 사과 같은 과일이 많을 거라고 했다. 우리는 굉장히 신이 났다. 할례 의식이 만약 내일이라고 하면, 모든 여자들이 전날 밤새도록 춤을 춘다. 아침까지 춤을 추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의식의 일부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갑자기 하는 것이라 아니라 다 사전에 계획을 한다. 여자들은 밭에서 채소를 가꾸고 우기에는 쌀농사를 짓는다. 농작물 내다 팔아서 아이들의 할례 비용을 모은다. 그들 전통에 따르면 할례는 새로운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다. 마치 여자애 둘 셋을 악어에게 보내듯이.

만약 이 아이들이 의식 도중에 죽어도 부모는 모르게 되어있다. 사람들은 죽은 아이들한테서 옷을 벗겨내 긴 막대기에 올리고, 한밤중에 누군가가 그걸 슬쩍 가져다가 아이 부모들 집 문에 걸어둔다. 아침이 되어 아버지 어머니가 일어나서 그 옷가지를 보면 무슨 뜻인지 알아챈다. 아이가 죽었으니 그리 알라는 뜻이다. 부모들은 그제야 울기 시작한다.

※ 이 글의 화자는 할례 풍습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시종일관 FGM이라는 용어를 썼으나, 번역문에서는 화자가 마을 사람들에 의해 ‘할례를 당했다’는 의미를 살리고자 기억 묘사에 한해 ‘할례’라고 표기했다.




▶ 어른들은 악어사냥을 간다고 했다. 덤불숲에서 일어날 일을 우린 전혀 알지 못했다. ⓒ일다 (일러스트: 두나)




사람들은 우리를 덤불숲으로 데려갔다. 할례를 할 때 남자는 들어올 수 없다. 또한 할례를 받는 자 누구도 이에 대해 어느 남자에게도 말해선 안 된다. 우리 문화에서 금지된 것이다. 남자는 거기 갈 수 없고 정확히 무엇이 행해졌는지, 잘 되었는지 잘못 되었는지 알 권리도 없다.

그 때 사람들은 서른 명이 넘는 여자아이들을 데려갔다. 내가 살던 카빌로(Cabilo) 마을은 네 곳으로 나누어져있다. 챔(Cham)과 나의 출신인 보장(Bojang)을 비롯한 네 군데다. 함께 간 아이들 중 몇몇은 5살도 채 안 되었고, 10살짜리들도 있었다. 의식이 아무 때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심지어 15살 된 아이들도 있었다. 부모가 돈을 충분히 모으고 딸에게 예쁜 옷과 머리도 해주고, 음식도 많이 사주는 등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할례 도중에 나는 많은 여자애들이 피 흘리는 것을 보았고, 믿을 수가 없었다.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느꼈다. 할머니한테 물어보려고 하니 울고 계셨다. 할머니는 무슨 일인지 아셨던 것이다. 나는 몰랐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왜 뻔히 알면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그냥 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그런 고통을 겪는 동안 어떻게 계속 춤을 출 수 있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덤불숲에서 일어난 일, 상상할 수 없는 고통

나를 거기 데려간 건 우리 할머니와 이모들 그리고 몇몇 친척들, 사촌 언니들과 배다른 언니들이었다. 나는 애초에 엄마가 누군지 모르는 아이였기 때문에 그 자리에 엄마가 없었다. 나는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울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주 큰 덤불로 끌려갔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 목소리나 새소리 말고는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람들은 북을 치려고 커다란 드럼통도 가져왔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오직 여자들 뿐. 남자들은 옆을 지나가서도 안 되었다. 여자들은 나뭇가지와 천을 잔뜩 가져다가 덤불 안에 또 숨을 곳을 만들었다. 거기로 아이들을 하나씩 데려가 수술했는데, 아이들을 앉혀 놓아서 무엇을 하는지 전혀 볼 수 없었다.

그 사람들은 아이 손을 붙들고, 얼굴에는 아주 크고 무거운 짙은 천을 덮어씌운다.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안에 들어갈 차례가 되면 덩치 큰 여자 둘이 와서 붙잡아 간다. 아무리 고집이 세고 아무리 무거운 애라도 그들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그들이 아이를 붙잡고 그 안으로 데려가 버린다. 곧 몸에 둘렀던 천과 속옷이 다 벗겨진다. 두 사람이 아이 다리를 하나씩 붙든다. 그러고 나서 양 다리를 벌리고 그걸 잘라낸다. 가장 유감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거기서 누구도 볼 수 없다. 그들이 준비될 때까지 보이는 건 암흑뿐이다.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도와 달라 소리치는 것, 그러나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불행히도. 당신이 그 아이들이라면 마치 …처럼(화자는 묘사할 단어를 찾지 못하고 말줄임표로 대신했다) 울게 될 것이다.

이제 다리를 가운데로 오므리게 된다. 다리를 벌리지 말라고 한다. 허리를 펴고 바닥에 똑바로 앉아야 된다. 심지어 파라세타몰(해열 진통제)도 주지 않는다. 나는 그 사람들 손에 축 늘어져있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피를 너무 많이 흘리고 있다고 했다. 그 때 갖다 준 게 뭔 줄 아는가? 아타야(Attaya)차였다. 중국 녹차를 아시는지? 우리 지역말로는 그걸 아타야라고 한다. 봉지에는 그냥 중국 녹차라고 써 있다. 그들은 그걸 가져와서 잔뜩 마시게 한다.

맙소사! 정말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고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너무나 아팠다. 나는 나중에 주사 한 대 맞지 않고 자연분만으로 아이를 낳았다. 할례 때 칼질이 출산보다 더 아팠다. 아이를 낳아본 여자라면 누구나 출산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안다. 내겐 할례의 고통이 출산보다 더 끔찍했다. 지금까지도 이 기억을 멈출 수가 없다. 아직도 내 마음 속에 있다. 가끔 할례 기억을 떠올리면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우울해진다.

칼질을 하고나서도 그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토마토 소스를 가져와서 질에다 집어넣고 다리를 오므려서 묶는다. 처녀성을 봉인하는 거라고 말한다. 처녀인 여자애들의 순결을 지키겠다고. 매일 아침 사람들이 토마토 소스를 가져와서 내 상처에 피를 씻어냈다. 토마토 소스가 상처를 빨리 마르게 한다면서. 그것도 얼마나 아픈지 모른다. 그 때 수술 받은 우리들이 회복하기까지 3주가 걸렸다.



▶ 여성성기훼손 풍습 철폐 캠페인에 참여한 여성의 모습. (출처: UNICEF)



“난 말할 거예요, 내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를”

그 와중에 사람들은 아이들을 때리기도 했다. 지나가는 과정이라면서, 어른을 어떻게 공경해야 되는지 보여주겠다면서, 어른에게 말할 때 눈을 보이지 말라면서. 우리 민족 문화에서는 어른의 눈을 쳐다보면 안 된다. 머리를 숙여야 된다. 어른에게 말대꾸 한마디도 해선 안 되고 언제나 공경해야 한다. 큰언니를 대하듯이. 우리는 여자 어른을 ‘나의 언니’라는 뜻의 코토(Coto)라고 불러야한다. 아버지의 형제는 ‘아버지’라 불러야 한다. 규칙이 있는 건 학교와 마찬가지지만, 나는 끔찍한 학교라고 부른다. 어떻게 입을 다무는지, 어떻게 비밀을 지키는지 가르치는 학교다. 다른 이의 비밀을 알게 되면 결코 발설해선 안 된다. 어떻게 어른을 공경하고, 우울감은 어떻게 감추고, 스트레스를 보이지 않고 어떻게 없애는지 그런 걸 배우게 한다.

할례 도중과 이후에 사람들은 아이들을 위협한다. “집에 가서 아버지나 오빠, 남동생, 삼촌이 물으면 여기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해. 그냥 악어를 죽이고 왔다고 해. 어디 갔었는지 말하면, 누구에게라도 말하면 넌 죽는다.” 그러니까 이게 트라우마의 내력이다. 같은 일을 겪은 여자아이들은 모두 같은 트라우마를 갖게 된다. 두려워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혼자 앓고 있지 못했다. 그들이 내게 왜 이런 짓을 했는지 계속 의문을 가졌다. 우리 할머니에게 물었더니, 할머니는 내가 계속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이 두렵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내게 조심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하셨다. 이게 바로 아무도 감히 전통에 맞서지 못하고 그저 미쳐버리는 내력이다. 하지만 나는 말했다. “난 말할 거예요. 내가 여기서 그 기록을 깨버릴 거예요.” 그리고 정말 그렇게 했다.

과다출혈로 죽는 아이들이 많다. 나와 같이 수술 당한 아이들 중에는, 우리 친구이도 했던 세 아이가 그랬다.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이 그 애들에 대해 물었다. 우리는 걔들이 할례 장소에서 죽었다는 것을 말하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지만, 나는 당시에도 말할 거라고 했다. 사람들은 재차 누구라도 그렇게 했다간 즉시 죽는다고 했다. 하지만 신께 감사하게도 나는 사실을 폭로하고도 죽지는 않았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지마니(Jeemani)라는 아이에 대해 물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우리가 할례식에 갔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 애가 피를 엄청 흘리는 것을 봤고, 그 다음에 사람들이 그 애가 죽었다고 했다. 선생님은 “뭐라고?” 라고 되물었고 나는 “맞아요” 라고 답했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돌아가셨지만 그 선생님이 지금도 기억난다. 잼(Jam) 선생님이었다. 선생님들은 할례에 반대한다. 하지만 법이, 법 만드는 사람들은 전통을 따르는 쪽이다. 그래서 전통을 거스르는 일을 하기 두려워한다. 심지어 대통령도 텔레비전에서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할례 전통을 이어가기 원치 않는 이들은 그냥 떠나게 둡시다. 하지만 우리가 아직 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그만두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한 짓은 클리토리스 전체를 잘라내고 처녀성을 봉인한다는 명목으로 주변 피부를 봉합하는 것이었다. ‘처녀성 봉인’이라는 게 뭔지 나는 정확히 몰랐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떤 남자와 억지로 결혼시켰을 때야 깨달았다. 그들이 그걸 내게 했다는 걸 그때 가서야 알았다. 봉인을 없애지 않고서는 남자와 잘 수가 없었다. 또 다른 형태의 할례였다.

어떤 여자애들은 할례를 세 번까지 당하기도 한다. 할례 이후에 여자애가 크게 웃는 것을 누가 듣기라도 하면, 할례가 제대로 안 됐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데려가서 다시 해버린다. 우리 문화에서 아이든 어른이든 여자가 여기 사람들처럼 맘껏 웃는 모습을 보기 드문 것은 그래서이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박장대소할 때 사람은 행복감을 느낀다. 우리는 아니다. 그렇게 웃으면 버릇이 없다고 하고 할례를 똑바로 못 받았다는 말을 듣는다.

※ 여성성기훼손 수술은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1)클리토리스 표피 및 일부 제거 2)클리토리스와 소음순 일부 제거 3)클리토리스와 음순을 제거하고 제거한 조직을 사용해 대음순 바깥을 덮어 꿰매는 형태. 월경혈과 소변이 배출되는 작은 구멍만 남긴다. 성행위나 출산 시 봉합 부위의 절제가 필요하므로 또 다른 고통을 일으킨다. 화자 빈투가 당한 수술이 바로 이 유형이다 4)그 밖에 다른 형태의 성기 훼손. 클리토리스와 음순에 피어싱, 절제, 확장, 화상 입히기, 약물 주입 등.



▶ 유형 3의 여성성기훼손을 나타내는 도표. 전체 수술 중 약 15%가 이러한 형태라고 알려졌다.

도표의 출처는 소말리아 유목민 집단에서 할례를 당하고 유럽으로 피난 와 세계적 패션 모델이 된 와리스 디리(Waris Dirie)가 세운

FGM반대운동 재단 ‘사막의 꽃’(Desert Flower Foundation)이다. 동명 영화와 책도 널리 알려졌다.(desertflowerfoundation.org)



전 세계에 많은 인권단체들이 이에 맞서 싸우고 있다. 감비아에도 현재 여성성기훼손 전통에 맞서 싸우는 여성이 둘 있다. 이 여성들은 여자애들을 타락시키고, 급진적으로 만들고, 부모에게 버르장머리 없이 만든다는 비난을 들었다. 감옥에도 끌려갔었다. 석방되고 나서는 실업자가 되었고, 싸움을 계속하기 겁냈다. 이 야만적인 전통에 맞서는데 관심이 있는 여성들이나 국제기구에게 내가 같이 손을 잡자고, 다 같이 다음 세대를 위해 싸우자고 하게 된 이유다. (※빈투 보장의 이야기는 다음 회에서 계속됩니다. "끔찍한 '여성할례' 악습이 전부 폐지되는 날까지" 보러가기)


<번역자 노트> 매년 2월 6일은 세계 ‘여성할례’ 철폐의날

잔혹한 ‘여성 할례’ 풍습이 하루빨리 없어져야 한다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전혀 없다. 클리토리스를 통한 멀티플 오르가슴에 찬사를 보내는 글을 발표하고 친구들과 여성 사정(ejaculation) 워크숍을 열었던 나는, 빈투가 호소하는 트라우마 앞에서 한없이 미안하고 슬플 뿐이다. ‘어린 세대가 고통당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울분에 찬 결의에는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이번 번역 작업은 어느 때보다 길고 무거웠다. 다음 주 월경 출혈을 앞둔 나의 자궁과 골반은 활자를 통해 재현되는 할례의식의 섬뜩한 북소리와 절규를 느끼듯, 벌써부터 붓고 쑤시고 아리다.

할례 철폐가 당연한 싸움이라면, 한편으로 우리 사회에 마치 당연한 듯 존재하는 여성성기변형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온전히 내 것으로 느낄 수는 없다. 다만 각자의 삶 속에서, 몸 담은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최대한 가까운 연결고리를 찾아내 이해하고 지지하려 노력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묻는다. 산부인과마다 버젓이 걸려있는 ‘이쁜이 수술’, ‘처녀막 복원 기법’, ‘소음순 쁘띠 성형’ 광고들은 과연 아프리카의 여성 할례식과는 전혀 동떨어진 행위인가? 온전히 자발적인 선택이었는가? 마취제와 진통제가 충분히 제공된다 해서 수술 받는 몸이 이를 편히 받아들일까? 지난 기사 중에서 젠더 박해를 망명사유로 인정하라 외쳤던 난민여성의 말도 떠오른다. 할례에 치를 떠는 독일여성들을 보며 그녀는, 그들이 즐겨 하는 지방흡입시술도 여성억압에 뿌리를 둔 욕망의 착시라고 했었다.

잦은 야근과 사무실 냉방 때문에 질염을 달고 살던 내게, 가부장적 서구의학을 탑재한 여성의사는 나의 질에 과장된 아로마 향수를 뿌리며 ‘이건 원래 남자친구 만나러 가기 전에 받는 1만원짜리 아로마 케어인데 소독하는 김에 같이 해 준다’고 했었다. 아파서 냄새나는 질, 아프지 않을 때도 저만의 냄새로 여성 개인의 고유성과 몸 상태를 드러내는 질이 언제부터 ‘향기로워야’ 했나?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최근 들어 이혼율이 높아졌는데, 이혼한 여성들 중 일부는 모여서 ‘인생에 도움 안 되는 남자들’을 성토하면서 처녀막 복원시술 정보도 같이 주고 받는다고 한다. 처녀막을 복원해서 이혼여성이 받는 비난과 낙인을 한풀 꺾고, 혹시라도 좀 괜찮은 남자와 재혼할 가능성도 남겨두는 것이다. 언뜻 자기 뜻대로 지갑을 여는 듯한 이들과, 딸자식의 신음에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어렵게 돈 모아 할례식과 조혼식을 치러주는 엄마들은 깨진 거울이 비추는 이지러진 상처럼 서로를 이상하게 비추고 있다. 우리의 보지는 언제쯤에야 있는 그대로의 생김으로 생의 찬가를 부를 수 있을까?

올해 나는 3월 8일 ‘여성의 날’을 꼭 짚어 기념했다. 그런데 그보다 전에 기억해야 할 날이 있었다. 바로 2월 6일 ‘세계여성할례 철폐의 날.’ 이 날을 소개하며 UN은 자못 희망적인 어투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2014년까지 15개국에 있는 1만2천여 개 지역사회의 총 1천만 명의 사람들이 할례의 악습을 철폐했습니다. 지난 30년간의 노력으로 이제 할례를 경험하는 사춘기 소녀들의 비율이 30% 감소하였습니다. 이러한 감소율이 유지된다면 2050년까지 6천3백만 명의 소녀들이 할례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6천3백만 명은 우리에게 익숙한 ‘남한 인구’보다 훨씬 큰 숫자이긴 하지만, 2억 명이 넘는다는 억울한 생존여성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조급하기만 하다.




[필자 소개] 하리타(정세연)- 젠더, 이주, 섹슈얼리티, 지속가능성을 분야에서 활동하는 작가, 저널리스트, 액티비스트이다. 2014년 독일로 이주해 환경 거버넌스 석사과정을 밟았고, 남부 도시 프라이부르크에 산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ildaro.com)’에 번역 프로젝트 <우리 자신의 언어로 - 독일 난민 여성들의 말하기>와 인터뷰 시리즈 <하리타의 월경 만남>을 연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성폭력 트라우마 치유 경험과 섹슈얼리티 해방의 여정을 기록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 - 더 자유로운 페미니즘을 위하여>(2017, 동녁)가 있다. 하리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초록’이라는 뜻이다. facebook.com/haritamoonrider



본 기고글은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에 최초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