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난민인권센터에 편지 한 통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지난해 <한국사회와 난민인권> 활동을 위해 힘을 보태주셨던 신일식 자원활동가님으로부터의 편지였는데요, 더 많은 분들과도 나누고 싶어 공유합니다.
"이곳에서 만난 모든 동료 시민들에게 빚을 지고 갑니다.
우선 언제나 저를 웃음으로 맞아준 난민인권센터 활동가님들께 감사합니다. 구태여 뻣뻣하게 강단에서 소리높이지 않아도 사는 모습 그 자체로 저를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정말로 기쁜 일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활동가에게는 소진, 불안정, 가난이라는 수식어가 함부로 붙습니다. 나아가 불행한 활동가 같은 단어를 쉽게 말하는 이들도 있지요.
난센을 알고 난 지금, 적어도 "난센의 활동가들은 불행하다."라는 말과는 용기내어 다툴 자신이 생겼습니다. 제가 본 난센의 활동가들께서는 소외되지 않은 노동을 하고, 재생산 가능한 삶을 고민하면서도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역시 얼마나 쉬운 평가인가요. 난센 활동가들이 한 번의 웃음을 짓기 전에 속앓이 하며 일하셨던 시간도 분명 짧지 않았을 겁니다. 그럴듯해보이는 변화를 위해 무의미해보이는 작은 일을 반복하지는 일도 잦았을지 모릅니다. 해결되지 않은 숙제들은 줄어들기보다 늘어나고 있겠지요. 그럼에도 봉사자들 앞에서 내색조차 않으셨던 슬님, 은지님, 연주님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조금은 비슷한 자리에서 닮은 모양의 고민을 나눴던 단비님, 가람님, 윤주님께도 여러 빚을 지고 떠납니다. 민망한 마음에 고마웠던 일을 일일이 열거하지 못함을 이해해주십시오.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말씀드릴 일이 있겠지요. 쓸데없이 말이 많고, 위로가 되지 않는 위로만 남발하던 저와 함께 활동해주어 감사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유 있는 고민과 이유조차 찾지 못했던 불안한 마음들이 우리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증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경주쌤. 저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손에 잡고 있는 일이 생기면 나와 주변을 돌아볼 줄 모르고 여러 일을 같이 잡는 법도 모르지요. 앞으로의 제 모습을 상상할 때도 무슨 노동, 어떤 돈, 노동과 돈 사이에서의 제 역할을 그리고는 했습니다. 그런 제게 일 바깥의 삶 혹은 지금과는 다른 일의 모습에 대해 상상하게 해주어 감사합니다.
한국사회와 난민인권 강좌 중 만난 시민분들께도 감사합니다. 함께한 분들 모두가 좋은 일하는 사람, 옳은 일하는 사람, 남을 돕는 사람 같은 수식어로는 미처 담을 수 없는 넓은 세계를 품고 있었습니다. 제가 상상하지 못한 여러 세계가 제 가까이에 있음을 배우고 갑니다.
감사한 마음 옆에는 미안한 마음과 다시 찾겠다는 약속에 대한 부담감이 있습니다. 나오던 날, 오늘이 마지막으로 일하러 오는 날이라고, 말씀드린 파일 정리를 하지 못하고 간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매번 수습되지 않은 자리를 떠날 때면, 나는 비겁의 첨단(尖端)에 서있는 사람입니다. 돌아오겠다, 다시 뵙겠다 약속한 곳은 늘어가는데 떠나는 길은 왜 점점 멀어만 가는지요. 지금은 하루의 대부분을 글과 글자 사이에서 헤맵니다. 몇년을 이렇게 보내겠지요.
내가 이 사람들을 다시 보러 돌아올 수 있을까요. 돌아오게 된다면 활동가일까요, 조력자일까요, 방관자일까요. 예기치 못하게 등을 돌린 적대자가 돼 있진 않을까요. 부담과 미안함의 크기만큼 열심히 고민하고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모습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신일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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