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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Activities/활동가이야기

8월 활동가 이야기





 평화캠프가 끝난 토요일 오후, 난민 가정에서 하루 홈스테이를 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모조는 미얀마 가정에서, 저는 아프간 가정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습니다. 저와 함께 지내던 재스민도 가기로 했습니다. 저녁 무렵 그 집에 찾아가니 한 아이가 문틈 새로 얼굴을 내비쳤습니다. 그리고 N이 나와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페르시아어밖에 할 줄 모른다는 아이는 우리가 들어서니 말수가 없어졌습니다. 그럼에도 곧잘 안기며 장난을 쳤습니다. N은 커리 같은 치킨요리를 내왔습니다. 말수가 적었고, 간간히 미소를 지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재스민이 인도음식에도 비슷한 요리가 있다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가 이어져 아프간, 한국, 말레이, 인도의 음식, 결혼 등에 대해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N은 만으로 스물다섯이라 하였습니다. 말레이시아에 온 지는 2년 가량되었고, 남편은 새해 파티에 다녀오는 길에 단속되어 1년 반 째 구금돼있다고 했습니다. UNHCR을 통해 난민지위를 인정받았지만 여전히 일은 할 수 없습니다. UNHCR과 NGO, 그리고 이웃의 도움으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만으로 4살인 아이는 하루 종일 엄마와 시간을 보낸다고 했습니다. 아이를 볼 때면 N은 사랑이 가득 담긴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이는 새벽2~3시쯤 자고 낮 12시쯤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인형같이 얼굴이 고운 아이는 이가 많이 썩어있었습니다.


식사 정리를 마친 N이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노랫소리가 들려 방안을 들여다보니, N이 노트북으로 아프간 노래의 영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간간히 미소를 지으면서 말입니다. 다시 거실로 나온 N과 이야기를 하다가, 아까 들었던 노래를 들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N은 Youtube를 켜고 아프간 노래를 들려주었습니다. 아마, 제 생애 처음듣는 아프간 노래였을 겁니다. N은 제게 한국노래를 들려달라고 했습니다. 제가 한 곡을 재생한 후, 재스민이 말레이 노래를 들려주었습니다. 이어 N은 다시 아프간 노래를 틀었습니다. Youtube로 노래를 듣는 그녀의 모습은, 여느 20대 여성과 다를 바가 없어보였습니다.

이내 아이가 졸음을 호소했고, 우리는 씻고 잠을 청하기로 했습니다. 잘 준비를 마치고 재스민과 함께 거실에 누웠는데 방에서 음악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N과 아이가 노트북 앞에 앉아 노래를 듣고 있었습니다. 매일 밤 그래왔던 것처럼, 익숙한 듯이 말이지요.

그 장면을 왠지 놓치고 싶지 않아, 자는 척 흘끗 문틈 사이를 엿보았습니다.

눈이 마주치진 않을까 조마조마해하며 말입니다. 



 




이번 달, 저는 삼주간이나 사무실을 비웠는데요. 국외출장도 다녀오기도 하고, 휴가로 시골 부모님 집에서 푹 쉬기도 했습니다. 긴 시간 서울을 떠났다가 돌아오니 더위가 많이 죽어 진심으로 행복했어요. 사무실을 이사한 뒤, 에어컨 없는 사무실에서 내내 일하면서 정말 힘들었거든요. 어찌나 덥던지 올 여름 열사병으로 생을 떠났다는 뉴스가 새롭게 다가오더라구요. 사무실에서 냉난방기 바람 맞으면서 일할 수 있기를... 말레이시아에서 아프간, 로힝야 어린 친구들과 보냈던 시간을 추억하면서 9월에는 더 열심히 일하도록 하겠습니다.



호주에 열흘 정도 다녀오고 나니, 푹푹 찌던 여름이 다 가 있었어요. 이번 여름엔 비다운 비를 못 만난 것도 같고, 그냥 좀 덥다가 갑자기 가을을 맞이한 기분입니다. 올해 농작물들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국장님이 심으신 무는 싹을 잘 틔웠다고 하는데....


8월에는, 클라이언트가 오면 체류 기한 날짜를 확인하는 것, 난민인정신청서는 영어 또는 한국어 번역본만 가능하다는 것, 클라이언트에게 본국에서의 박해가 있었는지와 현재까지도 그런 박해가 충분히 예상되는지의 문제가 난민 인정에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최근에는 기사를 읽으면서 에리트리아, 이탈리아의 섬이라는 람페두사가 어디있는지 알게 되었고요.


호주에 다녀온 긴장이 주말 사이 풀렸는지, 콧물 질질거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래층 생협 조합원 륭륭이 준 사과즙과 사이다가 열을 식혀주네요.


9월도 차분한 마음으로 잘 배우고 일하겠습니다.



요즘 출입국 소송수행 상대방의 답변서에서, 공무원과의 면담에서, 일부 판사의 질문에서, 그리고 주위의 우려담긴 대화에서 느끼는 인상은 우리나라에 난민신청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난민신청제도를 남용하는 사람들이어서 난민신청하겠다는 사람들을 신뢰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최근 함께 일하는 활동가들과도 이와 비슷한 고민들을 나누곤 했는데 아웅~ 거참 어려운 문제다. 


난민신청을 하면 한국에 약 2-3년 정도 체류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를 활용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심지어는 이것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는 것을 종종 보게된다. 


참으로 어려우다... 이와 같은 상황들로 인해서 일단은 난민신청자의 진술을 의심하는 시선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 같다. 진술을 뒷받침할만한 아무 증거가 없지 않느냐 하고, 증거를 낸 경우는 이 증거가 위조된 것은 아니냐 의심한다. 이전의 상황을 경험해보지 못해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최근 난민인정률이 더 낮아지고 있는 것은 비단 "남용하는 신청자가 많아서..."만이 그 이유는 아닐 것 같다. 잠재적 남용 신청자가 아닐까 하는 우려와 의심 속에 난민인정을 위한 심사기준도 높아지고, 증명의 정도도 더 엄격하게 요구하는 것 같아 난민협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기준들이 때론 공허하게 느껴진다. 소송에서는 "의심스러울때는 난민신청인의 이익으로"와 같은 원칙을 주장하는 것이 먼가 자신감 없게 비춰지기도 하는 것 같아 서면에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기도 했다.


일을 하면서 스스로도 "이 사람 혹시나.." 하는 생각이 자꾸만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 분이 대화 중에 시선을 잠시 딴데로 돌리면, 말을 주춤 할때면, 아주 사소한 말에도 불일치하는 부분을 캐치할때면 마치 무슨 탐정이라도 된 듯한 느낌으로 다가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나와 대화하는 이가 나를 의심하고 있다는 느낌..은 참 별로이고 씁쓸하고 속상하겠지.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도 상담실에 들어가 그 분이 겪은 일들, 앞으로 돌아갔을 때 겪을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종종 저런 순간에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순간들이 지나고 나면 나도 회의감에 빠지거나 소진되고 있었던 것 같다 ㅎㅎ


요즘 '환영한다'는 것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되는 것 같다. 나는 낯선 한국을, 난센을, 나를 찾아오는 이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있는 것일까. 적어도 우리는 난민의 친구 또는 비빌 언덕이 되고 싶은 단체이고 활동가인데.. 우리를 찾아 온 사람들의 말을 온전히 경청하고, 그들이 경험한, 그 되뇌이기도 힘든 일들에 대해 최대한 열심히 상상하면서 당신을 신뢰하고 있다는 마음으로 출발해야지~ 하는 생각을 이 기회에 다시 다짐해본다. 또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그 순간이 찾아오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기존에 쌓이고 쌓인 난민협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원칙들에 충실해야겠다. 서면을 통해서, 대화를 통해서 그것들을 당당하게 주장하고 전할 수 있는 활동가가 된다면 좋겠다...


음.. 우선은... 난센 상담실을 좀 편안하게 꾸미고 더운 날 시원하게 권할 수 있는 맛있는 음료수를 냉장고에 채워넣는 것부터 해야겠다 ㅎㅎ 음냐음냐 :)


난센이 이사온 서울혁신파크는 과거의 질병관리본부 건물을 이어 사용하고 있어서 처음 들어왔을땐 건물 4층이 삭막~한 느낌이 들었는데, 혁신파크 본부의 사람들의 섬세한 꾸밈으로 아기자기한 디자인들이 곳곳에 늘어가고 있다. 점점 함께하는 사람들의 공간으로 거듭나는 느낌이다. 처음 이곳에 입주하고 이들의 보이지 않은 세심한 노력들에 '환영받는다'는 기분을 경험했던 것처럼 우리 난센도 '환영'의 공간으로 느껴지기를 바라며, 나도 좀 더 맘의 넉넉함과 낯선 이들에 대한 믿음을 키워보아야겠다.





버마 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의 내툰나잉 의장이 심장질환으로 9월 4일 돌아가셨습니다.

고 내툰나잉 의장과 난센의 공식적인 인연은 창립총회때 입니다.

창립식에서 축사 부탁에 기꺼이 응해주셨고 언제나처럼 확신에 차고 힘있는 어조로 난센의 출발을 축하해주셨습니다.

그 후에는  버마출신 난민신청자분들을 모시고 난센에 방문하시고 때론 통역을 해주셨습니다.


고인은 버마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는 모임을 만들어 버마분들의 난민 지위 인정과 버마의 민주주의를 위해  오랜시간 

헌신해 오셨습니다.

고인은 한국생활을 정리하고 버마로 귀국을 준비 중이셨습니다.

한국에서 난민으로서의 지위를 포기하면서까지 고국의 민주화를 염원하다 돌아가셨에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고 네툰나잉님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