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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Activities/활동가이야기

1월, 난센 활동가 이야기








         


 



얼마 전 교육 후기에서, 읽을 것이 많지만 부담이 안 된다고 썼는데요. 부담은 안 되지만...... 막막하네요!! 난민 신청자들의 이야기를 접하다 보면 케이스를 이해하고 규명하는 데 적합한 정보를 찾아야 하는데, COI(Country of Origin Information) 과정을 거쳐야만 하더라고요.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검색 엔진이 있지만, COI를 할 때 통용되는 전문 사이트들을 교육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신빙성이나 전문성의 측면에서 권위가 있어 보이는(?) 기관에서 발행한 글들을 읽으려고 하는데, 그 나라에 대한 정말 기본적인 이해도 갖추지 못한 채 무작정 학술 논문과 같은 것들부터 읽으려고 하는 제 자신을 보게 되었죠... 아 무지하여라.


이번 주는 모조가 전화 받는 순번이고, 다음 주는 제가 요일 당번이라 드디어 전화를 받게 되네요. 저도 모조처럼 밝고 명랑하게 받고 싶어요. (매뉴얼: ‘목소리 톤은 맑고 선명하면서도 통통 튀는 목소리로 받습니다.’)

 

오늘도 어찌어찌 점심 당번을 잘 넘어갔네요! 다음주도 파이팅 >_<





  

얼마 전 한 아버지가 딸 아이의 손을 잡고 난센에 찾아왔습니다. 인도적체류자로 10 여년. 그 긴 세월동안 홀로 아이를 키우며 겪은 갖은 고초를 난센에 나누어주셨습니다. 제가 감히 알지 못하겠지만, 어느덧 훌쩍 커버린 딸 아이의 모습 속에서 아버지와 닮은 눈동자를 보며 그 세월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올 겨울에는 가스세 고지서를 들고와 도와달라는 분들이 유난히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또 그들 중 대다수가 인도적 체류지위자 분들이셨습니다. (인도적 체류 지위는 난민의 정의에는 해당되지 않지만, 고문 등의 비인도적인 처우나 처벌 또는 그 밖의 상황으로 인해서 생명이나 신체의 자유 등을 심각하게 침해 당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에게 그 지위가 부여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많은 시리아 분들이 이 지위를 받기도 하였죠.) 인도적체류자는 G-1-6비자로, 난민신청자의 비자인 G-1-5과 같은 카테고리인 기타비자 G에 속합니다. 이전과 달리 취업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인도적 체류자의 편의를 위해 절차를 생략하도록 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기타 비자로 일할 수 있는 직종이 대부분 제한되어 있고 그 절차가 까다롭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고용주는 인도적 체류지위자를 채용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취업 허가를 받아야 하는 복잡한 절차나 허가를 받은 이후에도 자주 그 허가를 연장해야 하는 일 등은 고용주 입장으로서는 선호하지 않을 수 밖에 없죠. 이러한 절차 때문에 오히려 임금을 받는 부분에 있어서도 차별을 받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의료, 교육 기회와 이에 대한 사회보장 서비스 혜택이 거의 전무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도적 체류 지위를 받은 분들은 당장 본국에 돌아갈 수 없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장기간 한국에 체류하게 되지만, 원하는 일을 하거나 교육을 받거나 아프거나 아이를 키우는데 끊임없는 제한이 따릅니다. 그 예로 얼마전 한 어머니께서 아이가 초등학교 진학 하는 과정에서 서류를 구하기 위해 10번이 넘게 유관기관을 다니시며 마음 고생하셨던 일이 생각납니다.


난센에 오셨던 분들을 돌아 보면.. 대부분 막노동을 하시기에는 나이가 많이 드셨거나, 그런 일을 하기 힘든 여성이시거나 또는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몸이 너무 아프시거나 홀로 아이를 키우는 분들이 많으셨습니다. 솔직히.. 한 분, 한 분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숨이 막혔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장 어떤 지원을 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큰 틀에서의 변화가 필요해 시간이 필요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난센에 와도 당장 삶에 현존하는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리시는 일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계속 정지되어 있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즘 난센에서 견디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할 수 없다는 답변의 반복을 견뎌내는 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것을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마음에 새기면서...




     





벌써 2015년의 첫 달이 지났네요. 와우. 한 달을 돌아보자니 워크샵을 다녀왔고, 새로운 이들을 맞이했네요. 반가운 얼굴도 꽤나 많이 볼 수 있었구요. :^)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No를 외쳤던 날들이기도 했어요. 하하.

이의신청기각결정을 받고 온 분들에게, "더이상은 저희가 지원해드릴 수 없어요." 라고 말하고, 
소송에서 진 분들에게 "유감이지만 패소하셨어요."라며 패소사실을 통보하고,
생활지원을 요청하신 분들에게 "저희는 쉼터를 제공하거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드리지 못해요."라고 말하는 과정 속에서, 무력감이 켜켜이 쌓여가는 겨울이었지요.

No라고 말하는 순간이 많아질수록, 난민분들에게 점점 더 거리를 두게 되는 것 같아요.
웃는 얼굴로 안된다고 할 순 없으니 처음부터 너무 많이 웃지는 말아야지 하고,
너무 깊게 알아버리면, 더이상 도와드리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게 힘들어지니
'너무 깊이 얘기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다'하고 속으로 바라는 저를 보게 되네요. 

1월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순간은 신동엽 두부조림을 점심시간에 시도했다는 것 정도랄까요. 계란 노른자와 함께 떠먹는 매콤 달달한 두부가 꽤나 먹을만 하답니다. :-)




  



"자꾸 뭐를 쓰라고 합니다"

난센에 와서 첫 달. 자기소개서 2번, 교육 후기, 1월 활동가 이야기. 2015년 1월 전까지 난센의 활동가들이 쓴 글들을 읽으면서, 나도 끼워주세요, 했었는데. 막상 끼고 나니, 그리고 글과 사진으로만 존재했던 그곳에 함께하니, 함께이기만 했으면 싶다, 글은 쓰지 말고. 누군가가 내가 쓴 글을 읽는다고 생각하니 광장에서 바지를 벗은 기분이다. 팬티까지는 벗지 않겠어, 하는 심정으로. 부모님이 보고 있단 말이야, 하는 생각으로.

페이스북으로, 트위터로, 블로그로, 엿보기만 하면서 구경꾼의 시선에 머무르고 싶었다. 마음으로 부담만 느끼면서. 그러다 어찌어찌, 난센에 지원해 한번 떨어졌다가, 추가모집에 지원해, 지금은 뭔가를 쓰고 있다. 쓰는 중에도 자꾸자꾸 지원 면접할 때 이렇게 저렇게 나 자신을 꾸미고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게 하려고 했던 말들이 쓕쓕, 머릿속을 왔다 갔다 한다. 쓰면서도 면접 때의 네가 아니야, 어서 그때의 너로 돌아가야지, 외쳐도 점점 바지가 내려가니 어쩌겠는가. 그런데 바지를 벗어도, 아, 이젠 팬티구나 싶었어도, 또 바지네?, 벗어도 벗어도 끝없이 나오는 러시아의 전통인형 마트료시카처럼. 다 벗어도 결국은 보이는 것은 없겠죠?

자꾸 이런 헛소리만 쓰는 이유도 결국은 1월 무엇을 했지는 말하고 싶지 않아서, 말할 수 없어서겠죠. 다음에는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해 보려 애써보겠습니다. 









개인 페이스북을 한 달 남짓 쉬고 있습니다.

주말농장 등 일상의 이야기를 주로 올렸던 페북은 내 삶의 소소한 재미였지요.

 

그러다가 작년 12월 중순

화성보호소에서 약 3년 전에 강제출국 당했던 난민분으로부터 페북을 통해 메시지가 오면서 부터입니다.

병원에서 치료받는 수 십장의 사진 그리고 아이의 사진도 함께.

페북 메시지를 여러차례 주고 받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10여일을 연락이 오가다가 결국 그분이 지쳤는지 소식이 끊겼고

저도 페북을 쉬고 있습니다.

 

미안했습니다.

그분의 요청을 들어주지 못한 것보다도

그분이 보고 있는 걸 알면서 내 평온한 일상을 올리는 게 미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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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내 일상의 평범함 마저도 누구가에겐 아픔이 될 수 있음을 되새기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