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타닉은 자매선 올림픽 호와 함께 초대형 호화유람선으로 이름을 떨쳤다. 당시의 별명은 불침선(The unsinkable). 획기적인 방수격벽을 갖추며,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그 배를 침몰시킬 수 없다고 호언장담했던 것에서 비롯된 별명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침몰이었다.
저마다의 인간군상, 그 생사의 갈림길
유람선 타이타닉의 비극은 견시들이 전방 450m 앞 빙하를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하지만 배는 이미 전속력으로 항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발견 후 기관을 멈추고 선체를 돌리기 위해 키를 좌현으로 전타했어도 그동안의 추진력이 있었기 때문에 배를 멈출 수도 없었고, 방향을 돌리기도 힘들었다. 빙하는 배의 하단을 그대로 긁으면서 5개의 구획이 파괴된다. 파괴 후 들어온 해수는 배의 선적한계량을 넘어서게 했다. 그 결과, 배는 침몰한다.
영화 <타이타닉>의 진수는 빙하와의 충돌 후 침몰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선택하는 다양한 대처에 있다. 그 순간이 가장 애틋하게 나오는 장면은, 악사들이 모여 바이올린과 첼로를 연주하는 가운데, 배가 본격적으로 침수되기 전에 보여줬던 사람들의 선택에 있다. 살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움직임도 안쓰럽지만, 스스로의 품위를 지키거나 각자의 책임을 다 하기 위해 삶을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의 모습도 안타까움을 전해준다.
역사는 그런 그들의 죽음을 '고귀한 죽음'이라고 기록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삶을 버리고 품위를 선택한 보기드문 사례이기에 평가한 것일 듯하다. 하지만, 살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노력에서도 애잔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우리의 가장 솔직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살고 싶다는 그 처절함은 인간 본연의 가장 솔직한 본능이다. 침몰하면 결국 배는 가라앉고 사람은 물에 빠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정해진 운명이다. 하지만 죽음이 정해진 운명이라고 하더라도, 저렇듯 '고귀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순간이라도 삶의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우리 모두는 그 후자일 것이다.
배의 침몰 순간,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은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것이기에 <타이타닉>이 역사에 남은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태어난 이상 누구나 언젠가 죽는다. 그러나 죽음이 정해진 운명이라고 할지라도, 살아있는 그 순간에 충실하고자 노력하며,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 또한 누구에게나 예정된 운명이다.
타이타닉이 하필이면 빙하와 부딪쳐 침몰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침몰장소는 북대서양 인근의 바다였다. 당시 수온은 영상 4도였다고 한다. 30분 내에 저체온증으로 사망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구명보트의 수는 부족했으며, 예상 밖 침몰 위기에 당황한 선원들은 구명보트 정원에 턱없이 부족한 인원만 태운 채 구명보트를 하선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죽은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았다.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
구명보트에 운좋게 탐으로써, 살아남은 사람들도 마냥 행운이 뒤따랐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생각해보라. 눈 앞에서, 수천명의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본다고 말이다. 또한 그들의 처절한 비명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해보라. 뿐만 아니라, 그 처절한 비명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잦아들어 30여 분이 지나서는 쥐 죽은듯 고요한 침묵만이 전해져, 넓은 바다에 수없이 많은 시신이 떠 있을 뿐인 그런 상황을 생각해보라. 사람은 때때로, 내 신체의 고통 못지 않게 타인의 고통을 간접체험함으로써 끔찍함을 느끼기도 한다.
게다가, 그들에게도 선택의 순간이 다가온다. 애초부터 정원에 턱없이 부족한 인원만 태운 채 구명보트를 내렸다는 것부터 기억하자. 더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어떤 사람들은, 그 끔찍한 비명에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구하러 가자고 반응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같이 죽기 싫다"며 거절한다. 그래서, 구조를 거부하는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에게, 구조를 주장하던 마거릿 브라운이 참다못해 "바다로 던져버리겠다"고 위협하는 일까지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암묵적으로 로버트 히친스에게 동조함으로써, 그 구명보트는 구조작업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 순간, 5등항해사 해럴드 로우가 결단을 내린다. 2척의 구명보트를 모아, 1척으로 사람들을 몰아 탑승시킨 뒤, 남은 1척으로 그나마 구조에 나선 것이다. 그래서 4명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조금만 더 일찍 결단을 내려 구명보트의 여유를 만들어 구조작업에 나섰다면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상에서는 나오지 않은 이야기지만, 타이타닉이 많은 사망자를 낼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또 있었다. 침몰현장 20km 거리에 대형 화물선 캘리포니아 호가 있었다.
캘리포니아 호는 애초부터 타이타닉에 빙하 관련 경고를 모르스부호 통신으로 보낸 바 있다. 하지만, 타이타닉의 통신사가 긴급하게 구조를 의미하는 CQD 사인을 보낼 때쯤, 불행히도 단 1명의 통신사가 24시간 근무하는 방식이었던 캘리포니아 호의 상황에서, 통신사가 잠이 들어버려 통신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 역사라는 자체가 이미 지나가버린 순간의 일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도, 결과를 알고 있고, 안좋은 결과를 피할 방법을 알고 있기에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격무에 지친 화물선 통신사가 조금만 더 늦게 잠들었다면, 침착하게 구명보트에 더 많은 사람을 태웠다면, 뒤늦게라도 구명보트가 좀 더 빨리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러 나섰다면, 귀하디 귀한 목숨을 지켰을 사람들의 수는 조금 더 많았을 것이다.
구조를 기다리는 난민, 그들에게는 시간이 생명
난민은 저마다의 이유로 조국을 떠나온 사람들이다. 정치적 의견, 종교, 특정소수집단 구성원, 국적, 인종, 그외 문제 등으로 위협을 느낀 사람들이다. 그들은 조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의 노력과 많은 위기를 겪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시간이 무엇보다 큰 금이기도 하다. 그들이 한국에 닿기까지 수중에 가진 돈은 없다. 그들 중 상당수는 여권과 비자를 음성적으로 구하기 위해 브로커라는 자들에게 많은 돈을 들여 경제적으로 급박한 상황에 처해있기도 하다. 본국에서의 박해와 입국까지의 고된 여정과 불안함으로 인해 트라우마가 깊이 박힌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인류는 난민제도를 만들었다. '고귀한 용기'를 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들이 다시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빠른 난민 인정 여부 결정과 자립 가능한 지원이다. 하지만 시작부터 어긋나 있다. 난민으로 인정되기까지 통상적으로 필요한 시간은 난민인정신청-이의신청-행정소송 3심단계 등 최소한 2년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 시간동안 어떤 지원도 없었다. 그래서 불법인 것을 알면서도 노동현장에 갈 수 밖에 없는 일도 많다. 그곳에서도 의사소통과 문화적 충돌 등 다양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타이타닉이 침몰하기까지 아쉬운 순간이 많았다. 캘리포니아호의 통신사가 잠들지 않았더라면, 구명보트 탑승을 좀 더 융통성 있게 했더라면, 그리고 구명보트 탑승자들이 조금만 더 용기를 내 구조에 나섰더라면, 등 셀 수 없이 많다. 그나마도 5등항해사 해럴드 로우가 용기를 내지 않았더라면, 그 4명의 귀한 목숨마저도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난민인정 신청자에게는 시간이 황금이다. 인정을 할 사람에게는 빠른 인정을 통해 서둘러 한국에서의 삶을 이어나갈 기회와 자립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 인정하지 않을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빠른 결정이 필요하다. 그래야 제3국으로 가는 등 다른 결정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할 수 있을테니까.
오는 7월부로 국회제정 난민법이 발효된다. 난민에 대한 최소한의 지원책이 국회 제정 법률로 지정됐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민인정심사는 여전히 소수의 인원이 많은 신청자들을 상대함으로써, '6개월 내 결정'이라는 난민법상 심사기한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난민법에는 불행하게도 '의무조항'보다는 '권고조항'이 더 많다. <타이타닉>의 이야기를 되새기는 이유다.
우리가 대한민국을 살아간다는 것은, 난민의 눈으로 볼 때 '타이타닉'을 구조하기 위해 달려온 여객선 '카르파티아 호'에 탑승한 것과 같다. 타이타닉이 침몰되면서 그 숱한 시신들로부터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끼며, 구명보트에 탄 사람들은 바로 난민들이 아닌가 싶다. '카르파티아 호'는 구명보트 탑승자들을 태워 음식과 약, 담요를 제공하며 안심시켰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한 선에서 혹시 있을지도 모를 생존자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구명보트 탑승자들을 안전하게 구한 뒤에도 무사히 목적지 뉴욕에 도착한 카르파티아 호로 다가갈지, 아니면 통신사가 격무에 시달리다 잠들어 구출 신호를 접하지 못해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던 캘리포니아 호가 될지, 난민들은 우리 대한민국에 되묻고 있다.
(박형준 활동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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