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 그 낯선 이름에 관한 부끄러운 고백
김원석
1.
난민에 관해 막상 글을 쓰려니 아득한(?) 옛날 연애편지 쓰던 순간보다 더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난민에 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고, 연이어 고백하자면 난민에 대한 관심도 얼마 전부터 우연치 않게 생겨난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글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자꾸 드는 이유이다. 그래도 고집스럽게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는 이 고약한 심보는, 난민이 한국에서 생활하며 겪었을 그 낯설음과 어려움들은 당사자들의 입을 통해 듣는 것이 최선일 것이고, 그들의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해결할지에 관해서는 소위 말하는 전문가 혹은 관련활동가들을 통해 들을 수 있으나,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앞선 고백처럼) 나와 같은 이들이 난민에 관해 가지는 일상의 무관심을 비롯한 ‘날것의 시선’을 드러낼 방도가 딱히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2.
그간 난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안성기’와 ‘김혜자’였다. 나는 두 분이 부부인 줄만 알았는데 여하튼 그들은 TV 속에서 선지자 마냥 온화한 모습으로 몸에 파리가 붙어있고 배가 불뚝 나온 가난한 흑인아이들을 보살피며 도와달라고 하였다. 내가 유일하게 난민을 생각하는 순간이었는데, 미안하지만 이후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아이들보다 두 명의 유명인뿐이었다. 그렇게 난민은 늘 저 머나먼 나라의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편협하기 짝이 없는 범주에 국한된 채 나의 머릿속에서 가슴 속에서 곧 잘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보면 단 한 번도 난민이 우리나라에서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얼마나 많은 난민들이 그곳에서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6호선 ‘이태원’ 역을 수 없이 지나치고 또 외국인들과 심심치 않게 마주치면서도 그들을 대개 여행자로 생각하기 일쑤였고 아니면 사회문제에 대한 공감능력을 최대로 끌어올려 이주노동자나 결혼이주여성 문제를 생각해 보기도 하였지만, 그들 가운데 누군가는 난민일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실제 한국사회에서 난민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와는 상관없이, 난민이라는 용어 자체와 원체 친하지 않았으니 누구를 본들 그들이 난민인지 아닌지 어찌 생각이나 해보았을까.
3.
나의 무지와 무관심을 깊이 반성하지만 억울한 면도 조금 있다. 그러니까 도무지 난민문제들은 유별난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상 우리 삶 속에서 접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국경을 넘어 꿈과 사랑을 이어가는 국제결혼이민자들의 가족사랑 프로젝트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TV프로그램 ‘러브인아시아’와 같이, 각종의 언론과 학계에서 소위 ‘다문화’ 이슈를 적잖게 다루고 있으나 그 속에서도 난민은 유독 금지된 것 마냥 등장하지 않는다. 내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깊은 산골짜기에서 수도하며 살아온 인생도 아니요 은둔형 외톨이 마냥 방구석에 앉아 모니터를 통해 세상을 접해 온 것도 아니며 나름 오랫동안 이런저런 사회문제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공부하고 활동해왔는데도 말이다. 이런 면에서 난민에게 한국(인)이 낯선 것만큼이나 우리에게도 난민이 낯선 것이 사실이다. 이 명백한 사실 앞에서 도와달라는 호소만으로 난민이 누구인지 그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그들을 왜 도와야 하는지 깨닫기란 어려워도 너무 어려웠다.
4.
이런저런 기회로 외국을 돌아다니다 보면 느끼는 것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한국에 대한 관심보다 북한에 대한 관심을 훨씬 더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북한의 체제가 그들과 너무 다른 데서 찾아오는 신기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한국보다는 북한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그들에게 직접적인 정치사회적 ‘변수’로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보면 난민의 문제에 대하여 광범위하게 형성된 무관심도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행자들이야 한국에 와서 돈을 쓰고, 이주노동자들은 우리나라 공장에서 공장주들을 위해 일을 하고, 또 결혼이주여성들도 여하튼 남편은 우리나라 사람이니 나름의 이해관계가 있는 반면에 당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에서 온 난민들의 사정은 우리들의 삶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불쌍한 것은 알지만 우리도 굶어 죽을 판에 다른 나라 사람들까지 먹여 살려야 하냐며 갑자기 민족중흥의 투사가 되는 것이고 난민의 문제는 곧잘 나중에 여유가 생길 때 혹은 여유가 있는 자들이 해야 하는 일이 되어 버린다.
나 역시 이런 시선과 인식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민족중흥의 투사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난민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 우연히 낯선 이방인의 시선을 듬뿍 받으며 타국에서 수개월 생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조금은 생각을 바꿀 수 있었다. 물론 죽음의 위협과도 같은 극도로 불안정한 삶 때문에 불가피하게 타국으로 넘어왔으나, 난민지위를 인정받지도 못한 채 온갖 차별을 감내하며 투명인간처럼 지내야만 하는 수많은 난민들의 처지를 타국에서 생활했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경험과 동일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매일매일 짊어지고 다니는 그 상처 깊은 세계를 내가 어찌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내 고민의 시작은 이방인의 존재를 그 자체로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했던 또 다른 사람들의 태도에서 출발한다. 버스를 타면 자연스레 내 옆에 앉아 향기로운 땀 내음 풍겨주시며 대체 뭔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로 이런저런 얘기를 꺼내시는 할아버지, 산책할 때면 늘 내 몸뚱이만큼 커다란 강아지 들이밀며 (도저히 무서운 표정을 지을 수 없게) 환히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버스가 너무 늦게 온다고 내게 걸어가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한국은 어떠냐며 툴툴 거리셨던 분 등. 이들이 내게 보여준 모습들은 결코 특별하지 않은 그냥 같은 공간 속에 살아가고 있는 나에 대한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아주 ‘담백한 인정’이었다. 타국에서 나의 존재자체에 끊임없이 불편함을 느끼고 또 그것이 갖은 불편함을 만들어내는 상황 속에서 이러한 담백한 인정이 얼마나 큰 힘과 희망이 되었는지!
이후, 나는 한국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이방인들의 삶에 약간의 관심과 고민들을 하기 시작한 것 같다. 특히 나의 경험이 사치스럽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가혹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난민들의 문제를 접했을 때, 그들의 존재를 너무 특별하게 생각한 것 그리고 그들과 나와의 그 어떤 특별한 연결고리를 찾으려는 강박관념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200여개가 넘는 전 세계의 나라 가운데 하필이면 이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보다 더한 연관성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물론 그런 연결고리를 찾으려는 시도가 불필요 한 것은 아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고 보다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우리 사회에서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을 미화할 필요도 없고 ‘악마화’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하게 요청되는 것은 21세기 민주주의 국가 한국에서 조금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지속적인 생존이 불가능할 정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다. 그리고 일상적 삶의 공간 속에서 그들에 대한 담백한 인정을 통해 그들이 조금이라도 숨 쉴 틈을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적어도 나는 더 이상 이들에 대한 무관심에 변명을 늘어놓을 수가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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