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간지계(離間之計)
잠시 <삼국지연의>를 기억해보자. 적벽에서 유비와 손권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돌아온 조조에게 또다른 우환거리가 있었다면 서북방을 차지하고 있던 마초와 한수의 기병군단이었다. 마초와 한수는 힘을 합쳐 조조군을 공격한다. 한수는 마초의 아버지 마등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로, 마초가 '작은아버지'라고 부르던 사람이다. 마등은 조조에 의해 비참하게 죽었다. 마초와 한수는 원수를 갚자며 굳게 뭉쳐 있었고, 조조는 그들의 공격에 의해 위기에 처해 있었다.
결론은 마초와 한수를 갈라놓아야 한다는 것. 골머리를 앓는 조조 앞에 모사 가후가 나타난다. 가후는 기 막힌 계략을 들고 왔다. 한수에게 편지 한 통만 보내면 된다는 것이다. 편지의 내용은 조조가 한수에게 평범한 안부를 묻는 것이었지만, 중요한 단어가 나와야 할 부분은 모두 먹칠을 해버린 것이다.
편지를 받고 영문을 알 수 없다며 갸우뚱하던 한수 앞에 마초가 나타난다. 한창 전투를 치루는 상황에서 조조가 한수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자체만으로도 꺼림칙해하던 마초는 그 편지를 보자마자 폭발한다. 먹칠이 된 부분을 보면서 한수가 내통이라도 한다고 확신한 채 한수를 다그친 것이다. 한수 역시 '조카'의 버르장머리 없는 대응에 화를 참지 못했다. 결국 둘은 갈라섰다. 갈라선 정도가 아니라 서로 죽이겠답시고 장수들끼리 칼부림을 했다. 한수는 마초의 칼에 한쪽 팔을 잃었고, 여러 부하장수들을 잃었다. 한수는 조조에게 투항했고, 마초는 이끌던 군대를 모두 잃고 남쪽으로 도망친다. 그러다가 운명적으로 만나 주군으로 모시게 된 사람이 바로 유비다.
- 실타래처럼 꼬인 상황과 그로부터 어긋난 감정은 결국 살육을 유발한다.
이 상황을 현대적으로 해석해보자. 조조는 당시 중국 대륙의 최강자였다. 마초와 한수는 서로 힘을 합쳐 대응했기 때문에, 조조에게 공격적으로 나설 수 있었다. 가후는 그들이 뭉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인간 본연의 의심을 자극한 기 막힌 계략을 제시한 것이다. 강자가 약자를 밟을 때 대처하는 기본적인 방법이 여기에 나온다. 요지는 바로 '뭉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조금 더 거시적으로 봤을 때, 중국 대륙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조조의 위나라에 유비의 촉한과 손권의 오나라가 그래도 수십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둘의 동맹을 오랫동안 유지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2. 후투와 투치
르완다를 식민통치했던 벨기에도 비슷한 수법을 썼다. 조조와 가후가 마초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부담스러운 한수를 선택해 계략을 구사했듯이, 벨기에도 마찬가지였다. 르완다 전체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후투족과 10%의 투치족 중 투치족을 우대하면서 후투족을 거칠게 탄압했던 것이다. 투치족은 15세기 무렵 르완다에 정착했던 전사 집단이었고, 벨기에에 의해 선택돼 귀족집단으로 군림해 후투족을 통치한다. 하지만 세상은 곧 달라졌다. 벨기에가 르완다를 떠나면서 억눌려 있던 후투족이 행동을 게시한다. 투치족 출신 르완다 국왕이 쫓겨나고 수많은 투치족이 죽는다.
투치족이라고 가만히 있을까? 이웃나라 부룬디에 살던 투치족들이 르완다를 공격했고, 그를 빌미로 다시 한번 후투족이 투치족을 학살한다. 이후 투치족의 쿠데타와 후투족의 역쿠데타가 반복됐으며, 후투족 출신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추락해 대통령이 사망함으로써, 강경 성향의 후투족 민병대 인터함웨는 투치족을 대량학살한다. 영화 <호텔 르완다>는 인터함웨에 의한 투치족 대량학살 상황을 배경으로 제작됐다.
독일에서 벨기에로, 르완다는 아프리카 내 약소국으로서 유럽 강국의 식민지배를 받는 전형적인 역사를 가졌다. 그들 특유의 식민지배 노하우는 르완다에서도 여전히 큰 후유증을 갖는 상황으로까지 가게끔 기 막히게 발휘된다. 르완다 내 후투족과 투치족은 모두 독립의 기쁨과 미래에 대한 고민을 나눌 여지도 없이 교묘한 분열조장정책으로 인한 감정다툼을 서로간의 대량학살로 표출한 것이다. 요지는 바로 감정이다. 후투족의 가슴 속에는 내가 누리지 못하는 특혜를 부당하게 누리는 자들에 대한 분노가 자리잡고 있었다. 실제로 투치족은 벨기에에 협력한 댓가로 르완다 내 부를 독점하고 있었다.
- 와킨 피닉스가 서구 출신 언론인으로 출연한다. 그의 카메라에는 미치광이 후투족의 학살극이 끊임없이 담긴다.
후투족이 바라보는 투치족이란, 일제에 협력함으로써 민중을 핍박하던 친일파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과 비슷했을 것이다. 투치족이 바라보는 후투족도 그와 크게 다르진 않아서 "너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는 대상" 이상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돌아보기도 전에 뒤덮여버린 증오와 미움의 감정은 그렇듯 생존욕구까지 겹쳐 더 멀리 바라보지 못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정치'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다시 <삼국지연의> 에피소드를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제갈량은 손권의 오나라와의 동맹 유지를 중요시했다. 촉한이 오나라에 원한이 없던 것은 아니다. 영토전쟁 와중에 유비의 의형제 관우가 비참하게 죽었고, 원수를 갚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공격하던 유비는 오나라의 육손이 주도한 불공격에 수많은 군대를 잃고 실의에 빠져 죽었다. 하지만 현실적 상황에서 더 큰 적이 누구인지, 진짜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한 제갈량의 냉정한 고민의 결과가 오나라와의 동맹 유지였던 것이다.
#3. 일방적으로 악마로 묘사된 후투족
<호텔 르완다>는 오스카 쉰들러와 존 라베의 뒤를 잇는 휴머니스트 폴 루세사바기나의 이야기를 그려나간다. 후투족에 의한 투치족 대량학살 상황에서 호텔로 피신하러 온 투치족과 온건 후투족을 지키기 위한 1급 호텔 지배인 폴 루세사바기나의 힘겨운 싸움을 그려나간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문제가 있다. 후투족의 목소리는 철저하게 배제돼 있다는 것이다.
폴 루세사바기나, 1급호텔의 지배인으로서 '잘 나가는' 후투족이다. 하지만 투치족 아내를 두고 있으며, 매너와 효율을 중시하는 서구인의 성향이 몸에 배어 있지만, 한편으로 부패한 정국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고급 승용차를 뇌물로 바칠 줄도 아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필요할 때는 프랑스 대통령과도 선이 닿는 호텔 사장과 직통으로 전화를 하며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고위급'이기도 하다. 투치족과 온건 후투족을 보호하기 위해 지배인으로서의 직권으로 호텔을 개방하고 고급 양주와 돈을 뇌물로 바쳐가며 사력을 다 한다.
- 영화 속 후투족 정규군과 민병대는 주인공만 보면 뇌물을 달라고 아우성친다.
사람을 구하기 위한 그의 노력에 돌을 던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냉정하게 지켜봐야 할 것은 거시적인 상황들이다. 후투족은 왜 투치족을 죽이려고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철저하게 배제돼 있다. 후투족 라디오 방송의 살벌한 학살 경고로 영화를 시작될 때부터 <호텔 르완다>는 최소한의 중립성조차 배제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영화 속 후투족들은 피에 굶주린 미치광이들이며, 그런 주제에 틈만 나면 받아챙기거나 빼앗기에 혈안이 되는 등 뇌물과 절도를 몹시 좋아하기도 한다. 그에 못지 않게 후투족을 학살했던 투치족에 관한 어두운 이야기는 어디에도 제시돼 있지 않다. 미치광이 후투족에 의해 위기에 몰린 불쌍한 사람들일 뿐이며, 보다 서구화됐기에 후투족에 비해 '보다 교양있는' 사람들이다.
이유 없는 결과는 없다. 하물며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그것도 수십만·수백만의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이다. 과연 이유가 아무것도 없을까? 그 수많은 후투족들이 그저 미개하고 미쳐버린 아프리카인이기에 함부로 살육을 벌인 것일까? 후투족의 공격이 옳다는 이야기는 결코 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최소한의 중립성과 객관성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4. 휴머니즘, 그 야누스의 얼굴
인간에 대한 사랑과 감동, 참 좋은 이야기들이다. 날로 험악해지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밝음이 있다면 어두움이 있는 것. 객관적으로, 그리고 거시적으로 본질을 직시해야 할 상황에서 휴머니즘은 넓은 시야를 막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호텔 르완다>가 제시하는 휴머니즘이 딱 그렇다. 수백만명의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 소위 강대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의 무책임한 대응과 속셈은 따로 둔 채 앵무새처럼 떠드는 '인도적 개입의 필요성', 그리고 참상이 벌어지기까지의 역사와 과정 등 모든 것이 실타래처럼 얽혀 복잡하게 작용하고 있음에도 <호텔 르완다>는 이 모든 것을 외면한 채 객관성과 중립성을 잃고 벨기에가 르완다를 악랄하게 통치했던 그 수법 그대로 현상을 바라보고 있다.
- 이 감동적인 장면 속 진짜 다뤄야 할 이야기는 쏙 빠졌다. 미치광이가 된 것이 사실이라고 친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짚어보는 것도 중요한 이야기가 아닐까?
서구화된 투치족을 학살하는 미개하고 야만적인 후투족으로부터 일찍부터 후투족의 야만을 참회하고 돌아선 후투족 남자의 휴머니즘, 이것이 <호텔 르완다>가 전하는 이야기다. 이런 휴머니즘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휴머니즘 역시 객관성과 모든 상황을 아우를 수 있는 시야가 확보돼야 빛을 발할 수 있다. 휴머니즘의 직접적 제시만이 휴머니즘 전달의 유일한 방법인 것도 아니다. 역으로 침묵으로 일관함으로써 관객에게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준 <쉰들러 리스트>가 빛이 났던 이유이기도 하다. <호텔 르완다>의 감독은 <아버지의 이름으로>의 공동각본을 맡기도 했던 테리 조지 감독이다.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아버지의 이름으로>를 함께 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길 바란다. 1970년대의 암울했던 아일랜드 정국, 억울한 누명 속에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웠던 한 청년의 이야기를 다루던 그때 그 시절의 테리 조지 감독은 어디로 갔을까? <호텔 르완다>의 뒷맛은 그래서 더욱 씁쓸하다.
(박형준 활동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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