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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Activities

[번역기고]Nansen으로부터 온 전언

모험과 배움,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난센으로부터  전언 

: 아라카키 오사무(新垣 修)

번역: 정민희(히토츠바시대학교 법학연구과 박사과정)

 

[일러두기] 본 글은 타로지로사 에디터스(TaroJiro-Sha Editus)에 게재된 에세이를 번역한 것입니다.

 

 

[전편] 리얼 삼도류? 리얼 사도류?

 

행크 아론상 후보와 팀내 최우수(MVP) 투수로 선정되는 등 2022년도에도 활약한 메이저 리거 오타니 쇼헤이(大谷翔平) 선수를 모르는 독자는 아마 없겠습니다. 말할 것도 없지요. 선발 투수로서 15승을 올리고, 타자로서도 34홈런을 때린 「리얼 이도류」입니다.

 

반면, 프리쵸프 난센이라는 이름에 직감적으로 감이 오는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1861, 노르웨이의 크리스차니아(현재의 오슬로) 근방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전후를 살았던 인물입니다. 20대 중반에 이과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직후, 그린란드를 횡단 여행을 떠나 이를 성공하고, 30대 중반에는 인류에서 가장 북극점에 가까이 가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40대 중반에는 모국 노르웨이의 독립을 위해 진력을 다하고, 주영국 노르웨이 대사에 취임. 귀국 후에는 과학자로서 해양학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공헌했습니다. 50대 중반에는, 식량 위기에 직면한 모국을 위해 사절단 단장으로서 미국과 교섭했고, 그 후 국제연맹 노르웨이 대사가 되어 포로 귀환 고등판무관, 러시아 난민 고등판무관, 러시아 기근 구제 사업 고등판무관에 취임합니다.

 

난센은 이러한 인도지원활동의 공적을 인정받아192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독립을 원하는 모국인들에게 북극 탐험을 성공시킴으로써 사기를 북돋았던 외교관. 동물학과 해양학 등의 전문 학자. 수없이 많은 사람들ㅡ전쟁 포로, 기아로 고통하는 사람들, 난민, 무국적자ㅡ의 목숨을 구한 인도(人道)의 거인. 지금이라면 그는 「리얼 삼도류」 「리얼 사도류」등으로 불리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회와 다음 회의 에세이에서, 이 프리쵸프 난센이라는 인간ㅡ우리와 같은 하나의 인간ㅡ이 나아갔던 인생의 항로를 더듬으며, 21세기의 지금에 와 닿는 그의 전언을 주워 모아 봅시다.  

 

56세 무렵의 난센 [National Library of Norway(NLN)]

어려움과 불가능의 정의  

 

장신에 자연스러운 근육. 조각상 같은 표정에 날카로운 눈빛. 의지의 강함이 깃든 영리한 입가. 강인하고 투박하면서도 완고한 사람. 한번 목표를 세우면 공들여 계획하고, 전진을 가로막는 벽이 있다면 그것을 무너뜨려서라도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초인. 범상치 않은 능력을 무기로, 때로는 무모하다고 생각할 만큼 억지로 밀어붙이기도 하고, 상대를 덮쳐 누를 것 같은 힘으로 성공을 수중에 거둔 사람. 정렬과 재능, 야망이 일체화하여 「위풍당당」이라는 말이 썩 잘 어울리는 인물. 난센은 그러한 인상으로 전해져 오거나 말해지기도 합니다. 당신이라면 「어려움」과 「불가능」을 어떻게 정의하시는지요. 난센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려움은, 거의 시간을 들이지 않고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것이다」

「불가능이란, 해결까지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것이다」

 

어디까지도 긍정적인 사고. 젊은 시절의 난센은 확실히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나이와 경험이 쌓일수록 그의 내면의 어떤 부분이 두드러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무언가에 항거할 뿐만 아니라, 자연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 흐름에 도움을 받는다는 자세입니다. 그것은 마치, 크고 넓은 바다에 몸을 맡기고 「표류」하며 목표지점에 닿는 것과 같은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동시에, 지적 호기심이나 개인적인 야심에도 뿌리내리고 있던 그의 관심은, 무엇 하나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을 구제하고 세계 평화를 실현하는 것에 대한 도전으로 옮겨져 갔습니다.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닫힌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알게 되자, 그는 국제정치의 큰 흐름에 스스로 교묘히 몸을 맡기며,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빛이 되어, 어둠을 이기려고 했습니다.

 

퇴로를 끊어라    

 

운동을 즐기는 등 쾌활한 유소년기를 보낸 난센은, 1881년 왕립 프레드릭 대학교(현재 오슬로 대학교)에 진학합니다. 전공은 동물학. 188826세 때, 「중추신경계의 조직학적 요소의 구조와 조합」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 논문의 가치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그 후의 「뉴런설」에 선행하는 연구였다는 것입니다. 뉴런설은, 신경세포가 개별적으로 독립해 있고 각각이 접촉함으로써 신경이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난센의 박사 논문은, 뉴런설의 개념을 척추동물의 신경세포 등의 관찰과 고찰의 결과로부터 얻은 범위에서 이미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연구실에 가만히 갇혀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관찰과 해석에 몰두하는 나날들. 그 「정적인」 모습은, 머지 않아 북극 탐험가와 인도적 활동가의 「동적인」 이미지와는 대조적입니다. 당시의 자신을, 난센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현미경 안에 살고 있었다」

 

왼쪽 : 베르겐 시대의 난센 [Sophus Williams  촬영, NLN], 오른쪽; 박사논문에 게재된 신경조직도

 

박사 학위를 취득한지 4일 후의 일입니다. 세계 최대 면적을 가진 섬, 그린란드의 빙관을 넘는 것을 꿈꾸고 있던 난센은, 그 횡단 여행길에 나섰습니다. 혹한, 불모의 섬의 내륙에 발을 들여 횡단한 사람은,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전무했습니다. 동해안에는 배가 대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덴마크인이 정착하고 있는 서해안에 상륙해 내륙으로 들어가, 유턴해서 돌아오는 것이 그 동안의 그린란드 탐험의 상식이었습니다. , 횡단이라는 발상이 없었던 것입니다.

 

난센은 이 상식에 도전합니다. 동해안을 출발하여 서해안을 향하는 것입니다. 서쪽에서 출발했다면 온 길을 되돌아가면 되지만, 동해안 출발이라면 배가 대기하지 않는 출발지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나아갈 길은 단 하나. 앞으로 가는 것. 난센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퇴각의 길을 확보하는 것은 많은 칭찬을 받지만, 목표에 도달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함정이다.

나는 항상 그렇게 생각했다」

 

그린란드 횡단계획의 또 하나의 놀라운 점은, 스키에 의한 횡단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이동수단으로서 스키의 유효성은 미지수였습니다. 스키를 타는 사람이 내륙의 얼음을 횡단한다는 발상 자체가 애초에 없었습니다. 규칙을 깨는 역루트, 스키에 의한 횡단은 지나치게 독창적이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의 비난은 매우 거셌습니다. 사람들은 난센을 두고, 어리석고 황당무계하며 그의 계획이 실패할 것이라 비웃었습니다. 오타니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이도류로 도전했을 때, 「상식 밖이다」라며 비판을 받았던 것이 떠오릅니다.

 

오타니 선수는 결과로 이러한 비판을 잠재웠는데, 난센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1889년의 일입니다. 식량과 물 부족, 루트 변경이라는 여러 가지 고난을 극복하고, 난센은 기록상 인류 최초로 그린란드 횡단을 무사히 성공시키며 노르웨이에 귀국했습니다. 27세의 그는, 악단의 연주와 대포, 증기선의 함대와 함께, 암벽을 덮을 만큼 많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일약 화제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썰매 끄는 대원들 1888년 8 월~9 월 . [난센 촬영, NLN]

북극탐험

 

이윽고 난센은 북극탐험이라는 꿈을 품게 됩니다. 당시 많은 탐험가들이 인류 첫 북극점 도달을 바라왔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 중에는, 배가 유빙에 끼어 대파되는 등 비극적 말로를 걷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북극점까지 최단거리를 노리고, 해류를 거슬렀던 것이 과거의 실패의 원인 중 하나라고 깨달은 난센은,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북극에 도전합니다. 그것은 시베리아에서 북극에 침입하여 북극의 얼음을 헤치며 나아간 뒤, 스스로 배를 유빙 속에 「빙결」하여 그대로 「표류 」하는, 즉 해류의 힘을 빌리면서 북극점, 혹은 그 근처에 도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성공시키기 위해, 난센은 북극의 얼음들의 압력에 버틸 수 있는 구조를 가진 튼튼한 배를 만들었습니다. 그 배는 「프람호」. 「프람(fram)」은 노르웨이 말로 「앞으로」라는 의미로, 이름을 지은 사람은 난센의 아내였습니다. 북극에서 배가 동결되면 되돌아오는 것은 어렵고 「앞으로」가는 것 밖에 없다는, 난센의 계획과 난센 자신을 상징하는 것과 같은 배의 이름이었습니다.

 

프람호를 타고 나선 북극탐험은 3년도 넘게 걸렸습니다. 도중, 난센은 한 대원과 개들과 함께 프람호에서 내려, 자신들의 발로 극점을 향했습니다. 극심한 추위 속에서 동상 때문에 거의 피부가 다 벗겨진 맨손으로 묶인 개의 망을 풀어주는 작업은, 어느 새 고문과 같은 작업이었습니다. 피로로 지친 나머지, 걷는 도중 잠에 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가로막는 얼음과 눈에 방해를 받고, 식량 또한 부족했던 탓에 극점에 도달하는 것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난센은 18954, 인류사상 북극점에 가장 가까운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귀로의 여정 또한 고난의 연속이었고, 어쩌면 장렬이라는 단어가 어울릴지 모르겠습니다. 스키와 도보, 카약으로 난센과 대원은 개들과 함께 한없는 빙판 위를 계속 이동했습니다. 피로와 곤비함 끝에, 어느 날 두 사람은 손목시계의 태엽을 감는 것을 깜빡 잊고 말았습니다. GPS 발신기 등이 없는 시대입니다. 하루의 각기 다른 시간에서의 태양의 각도를 사용하여, 경도와 위도를 계산해 현재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당황한 나머지 태엽을 다시 감아보았지만, 이미 그 후부터는 자신들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자신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여정을 함께한 개들을 약한 순서대로 자신들의 손으로 죽이고, 그 고기를 썰어 살아있는 개들에게 먹이로 주는 일은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때로는 배고픔을 지나치기 위해, 자신들 또한 개의 피를 졸여 만든 스프를 후루룩 마시기도 했습니다. 끈적거리는 미지근한 쇳맛이 목구멍 안쪽을 통과할 때까지 견디는 것은 살아남기 위함이었습니다.

 

무서운 것을 말하자면 북극곰 때문에 간담이 서늘해진 적도 있습니다. 난센 일행을 뒤쫓아온 것으로 보이는 북극곰은, 대원의 측두부에 일격을 가했습니다. 그는 눈에서 불이 나올 정도로 놀라 뒤집혔습니다. 거기서, 한 손으로는 주먹을 만들어 북극곰의 공격을 방어하고, 다른 손으로는 그 목을 잡아 온 힘을 다해 조였습니다. 난센과 개들도 가세하여, 대원은 가까스로 궁지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빙하 속에서의 프람호 . 1894년 7월 1일 . [난센 촬영 , NLN]

 

북극을 연구하다

 

난센의 대담한 계획과 행동은, 자칫하면 선정적인 모험으로 회자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면에 지나지 않습니다. 북극점 제패는 분명 난센의 야망이었으나, 그것보다 중요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조사입니다. 과학자였던 그는, 북극탐험의 진정한 의의는 과학에의 공헌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프람호의 대원들은, 길이 39미터, 너비 11미터, 선박이 물에 떠있을 때의 선체의 최하단에서 수면까지 수직거리 5미터라는 갇힌 배에서 수년을 보냈습니다. 외부 세계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비좁은 공간에서의 생활은, 마치 「빙상에서의 칩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난센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다위의 연구실」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하고 있습니다.

「프람호에서의 나날은,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였다」


북극 탐험 중 난센은, 해수 온도와 염분량의 측정, 천체 관측, 해류 조사 등을 성실하게 수행합니다. 당시에 얻은 조사 결과는, 해양학이나 기상학 등에서 오랫동안 활용되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가져온 정보를 통해 북극에는 육지가 없고, 그곳이 계속 유동하는 유빙으로 뒤덮인 「밥그릇 형 심해」라는 것이 실증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북극해의 수심이 4,000미터를 넘는다는 것도 판명되었습니다.

 

왼쪽: 채수기를 사용한 해수 측정 . 1894년 7월 12일 [NLN], 오른쪽 : 난센에 의한 북극해의 해저지형도 [Fridtj of Nansen Institute]

 

게다가, 북극탐험에서 차세대로 계승되는 기초 데이터와 중요한 가설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난센은 프람호로 항해하던 중 「사수」 혹은 「배 유령」이라고 불리는 섬뜩하고 이상한 현상을 여러 번 만났습니다. 바람을 가르며 엔진을 전속력으로 돌려도, 배가 무언가에 잡힌 것처럼 그 곳을 떠날 수 없는 상황에 돌연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다양한 깊이의 물을 채취하여 그 온도와 염분 농도를 측정했습니다. 그 결과, 표면에는 얼음이 녹은 기수층, 그 아래로는 염분이 높은 바닷물이 있고, 그 두개의 층의 사이에 경계부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또한, 그 경계부에 내부파(액체 내부에 발생하는 중력파)가 발생하고 있는 것도 관측했습니다.

 

난센은 프람호에서 얻은 정보를, 스웨덴 출신으로 재능이 많은 젊은 연구자 반 발프리드 에크만에게 전하여, 「사수」 「배 유령」의 과학적 해명을 의뢰했습니다. 그리고 에크만은, 그 기대에 멋지게 부응합니다. 이 현상을 수조 실험으로 재현하여, 해수 압축율의 관점에서 이것을 설명해 보였던 것입니다. 에크만의 이 실증적인 해결 방식은, 바다의 내부파 연구의 기초형성에 기여하게 됩니다.

 

난센은 하나의 전문 분야에 틀어 박히는 유형의 과학자가 아닌, 과학자라는 틀에 들어가지 않는 학자였습니다. 동물학의 분야에서부터 시작된 학술적 관심은, 북극탐험이라는 지점에서 해양학으로 나아가고, 그 체계화에 기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관여한 분야는 지질학과 해부학, 나아가 지역연구와 정치 경제학을 망라했습니다. 다만, 그가 자유롭게 넘은 것은 학문 분야의 벽만은 아니었습니다. 난센은 실전에서도 새로운 영역으로 뛰어오릅니다. 바로, 인도적 지원.  북극 탐험으로부터 인도적 지원으로. 난센은 새로운 항로를 어떻게 타개해 나가게 될는지요.  

 

[후편] 모욕을 타인에게 주어서는 된다

 

프리쵸프 난센을 아는 사람은, 그의 다양한 경력 어느 시대를 익숙하게 여기고 관심을 갖느냐에 따라 대략 갈래로 나뉠 것입니다. 한쪽은, 전편의 에세이에서 다룬 모험, 그린란드 횡단이나 북극탐험의 시대. 다른 한쪽은 인도적 지원 활동의 시대입니다. 이번 에세이에서는 후자를 조명하려고 하는데, 애초에 탐험가가 인도적 지원의 세계에 뛰어 들었을까요?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최초의 계기는 난센이 노르웨이 독립을 지도하고 외교관이 것이었습니다.

 

19세기의 노르웨이는 스웨덴과 동군연합(同君連合) 관계에 있었습니다. 헌법이나 의회, 정부의 유지는 인정되고 있었지만, 외교권은 사실상 스웨덴이 쥐고 있었습니다. , 노르웨이는 아직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프람호의 탐험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질 무렵, 노르웨이에서는 독립을 외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스웨덴과의 관계는 긴박감을 더해가고 있었습니다. 1905 8월에는 이러한 상황이 정점에 달해, 군사 충돌 임박의 위험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북극 탐험 국민의 영웅이 난센도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웨덴과의 무력 대결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싸워야 한다고 열광적으로 외치는 애국주의자들에게 그는 양국민의 미래의 관계를 내다보며 이렇게 설득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고통받아온 모욕을 타인에게 가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허용과 관용으로 스웨덴을 돕자. 이것이 우리에게 합리적이고 현명한 선택이다. 스웨덴 국민을 욕되게 하지 않고 현재의 연합을 해소할 있을 것이다

 

노르웨이 정부는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던 난센을 비공식 특사로 임명하여 영국에의 접근을 도모합니다. 난센은 가까이 영국에 체재하며 모국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했습니다. 노르웨이의 국민 투표로 헌법군주제가 다수를 차지하면서, 난센의 외교적 노력도 결실을 맺어 마침내 완전한 독립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독립을 위해 일한 난센의 인기는 절대적이었고, 그에게 노르웨이의 수상 혹은 대통령의 자리를 권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난센은저는 학자이고 탐험가입니다라며  제의를 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왕국이 그에게 노르웨이 대사가 되어 달라고 요청했을 때에는 거절하지 못하고, 난센은 1906 영국 주재 노르웨이 대사가 됩니다. 이것이, 그가 외교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경위입니다.

 

 

새로운 국제연맹

 

난센이 국제 문제에 관여하게 하나의 계기는, 1 세계대전 설립된 국제연맹입니다. 전쟁이 낳은 참혹한 피해에 난센은 큰 슬픔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는 군축이나 민족 자결, 식민지 문제의 공정한 해결 등의 원칙 아래 발족한 국제연맹에서 평화의 씨앗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국제연맹에 북극탐험 당시의 프람호를 겹쳐, 인류의 희망을 실은 새로운 길을 항해를 하는새로운 라고 불렀습니다.

 

사람들의 강한 욕구의 충격과 이기주의적 압력을 부드럽게 피해갈 있도록, 전에 없던 발상으로 만들어진 배가 필요하다. 배는, 프람호와 같이 누구도 적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소수의 강자가 아닌 모든 사람들의 동의에 의해 배의 키가 잡혀야 한다ㅡ 이러한 생각에서, 난센은 강화회의나 국제연맹의 활동에 노르웨이 대표의 사람으로서 참가했습니다.

 

그러나 강화회의나 국제연맹은 그가 이해하고 있던 이상과는 꽤나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일부의 강자가 자신들에게 편리한 오래된 재건하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그려진 이상과 앞에 있는 현실. 괴리에 매우 놀라면서도 난센은 국제연맹을새로운 만들고자 노력을 이어갔습니다.

 

이윽고 난센은, 국제연맹에 있어 걸출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가 맡고 있던 하나는, 위임통치에 관한 보고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위임 통치는 국제연맹의 통치 방식으로, 연맹으로부터 위임 받은 국가가 독립하지 않은 지역을 통치하는 것입니다. 사실 난센은, 그린란드 횡단 당시 5개월 이누이트와 함께 생활하였습니다.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은, 국제연맹에서 난센 뿐이었습니다. , 20세기의 세계 평화 달성의 열쇠를 알았을지도 모릅니다.

 

세계의 선진인민과 도상인민의 관계는 이번 세기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으로 헤아릴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세계평화와 우리들의 문명의 기초는 앞으로 어떻게 것인가. 답은 관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릴 것이다

 

1920년 11월 15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제1차 총회. 노르웨이 대표인    난센은, 4열 왼쪽에서부터 2번째에 앉아 있다 [Boissonnas 촬영, NLN]

 

난센 여권은 위대한 걸음

 

1 세계대전 직후 국제사회는 난민 문제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혁명이나 볼셰비키의 대두에 의한 정치적 영향뿐만 아니라, 가뭄 등의 사회적 영향에 의해 러시아에서 많은 사람이 출국한 것입니다. 난민은, 가난과 고독에 시달리며 비참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각국의 정부는 여권을 갖지 않고 불규칙적으로 입국하는 난민이, 사회사정을 악화시키고 고용시장을 압박하는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국제연맹은, 1921 난센을 러시아 난민 고등법무관 임명했습니다. 난센과 그의 동료들은 수많은 난민을 도왔지만, 이러한 활동은 난민의 생명을 구하는 것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난센은 이것을 자선적 긴급 지원으로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국제정치의 안에 설치하여 국가를 문제해결에 직접 관여하도록 꾀하고자 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통행 허가증과 신분증의 기능을 겸비한 국제증명서의 발급을 각국에 제안했습니다. 난센 여권으로 알려진 것입니다. 각국 정부는 난센 여권을 발급하는 것으로 난민의 존재를 국제적으로 승인하고, 이것을 소지한 사람들을 정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여권을 난센은 높이 평가했습니다.

 

러시아 난민 수용에 있어, 공평한 분담을 향한 위대한 걸음이다

 

왼쪽: 프랑스 발행 난센 여권. 오른쪽: 불가리아 발행 난센 여권 [왼쪽: 미국의회도서관 https://hdl.loc.gov/loc.wdl/wdl.11576 / 오른쪽: Jan Dalsgaard S & oslash;rensen촬영. Fridtjof Nansen Institute]

 

난센과 그의 동료들은 또한, 노동력이 여유로운 국가에서 부족한 국가로의 난민의 이동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예를 들면, 불가리아에서의 도로 공사의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수천명의 국제 이주의 조정을 도모했습니다. 나중에 난센은 보다 자각적으로, 난민지원을 유럽의 고용 문제 해결에 연결하려 합니다.

 

나아가, 많은 난민이 날의 빵을 얻는 것으로도 힘에 부쳤던 당시, 난센은 고등교육을 포함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것에 강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거기에는 개의 국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러시아로의 자주적 귀환이 이루어지는 경우였습니다. 난민의 대학생 혹은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귀환 , 자신을 수용했던 국가에서 얻은 지식이나 기술을 살려, 러시아의 부흥에 공헌하는 것에 대한 기대입니다. 하나는, 유럽의 각국에 의한 수용 혹은 정주가 계속되는 경우입니다. 현실에서 대부분의 러시아계 난민은 귀환할 없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난민의 교육은 사회에 유익하다고 난센은 생각했습니다.

 

난민의 이익에 이바지하는 국제연맹의 활동에 의해, 성실하고 고등교육을 받은 난민이

세계의 여러 지역으로 가서 정주했다. 이것으로 인해 문명화 기준이 상향되었다

 

이처럼, 난센이 주도한 난민 지원은 생명의 구제뿐만 아니라, 유럽의 사회적, 경제적 안정, 나아가서는 미래의 평화까지 내다본 것이었습니다.

 

수천 만명을 몰살시킬 있는가?

 

그린란드를 횡단하여 북극점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젊은 날의 난센은, 종종 영웅으로 그려집니다. 실패할 것이다라는 주변의 목소리를 물리치고, 누구도 생각하지 않은 방법으로 가혹한 자연을 마주한 그는 분명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도적 지원의 시대의난센호 순풍을 받아 달리고 있다고 말할 없었습니다. 대류에 휩쓸려 멀리 떠내려가는가 하면, 난파 직전까지 내몰리게 적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1921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러시아에서 발생한 기근에 대응하기 위한 구제지원의 때가 그러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혁명이나 가뭄에 이어, 곡물의 대흉작이 일어났습니다. 식량 정책의 빈곤 또한 상황을 부추겨, 많은 이들이 아사할 지도 모르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특히 우크라이나 등은 심각하여 겨울이 가까워오고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문턱에 있었습니다.

 

굶주림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 마음을 썼던 난센은, 수천만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는 사정을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각국의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기근보다 위협이 있다. 그것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다

 

서방과 러시아=소련정권의 외교관계가 싸늘했던 시기, 이것은 국제연맹의 지배적인 시각이었습니다. 각국 정부는 기근과 기아로 괴로워하는 러시아인을 돕는 것으로 인해 공산주의체제가 강화될 것을 꺼려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국제연맹은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습니다.

 

실망과 함께, 슬픔도 분노도 배제한 정념으로, 난센은 국제 연맹 총회의 단상에서 가맹국 대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거기에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없어 안타깝다고 차마 냉담하게 말하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인류의 이름으로, 순수하고 신성한 모두의 이름으로, 나는 당신들에게 호소한다. 집에서 아내와 자식이 기다리는 당신들에게, 나는 호소한다. 부디 생각해 보아라. 여성과 아이들이 굶주리며 죽음을 맞는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나는 자리에서, 각국 정부에게, 유럽인들에게, 그리고 세계에 구제를 호소한다. 서둘러야 것이다. 돌이킬 없는 후회를 하기 전에

 

그의 연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상의 , 국제연맹으로부터의 실질적 원조는 없었습니다.

 

전쟁 경비를 난민을 위해

 

난센은 하나의 활동에서도 맛을 보았습니다. 1926년에서 1929 사이 크게 힘을 쏟은 러시아 거주 아르메니아계 난민 지원입니다. 난센이 이러한 지원에 주력한 이유는, 그들의 비참한 상황에 마음 아파한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19세기 이후, 주변의 강대국들에 농락당해온 아르메니아인들이야 말로 그들 자신의 대지, 독립국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전후의 새로운 국제질서 하에서 평화를 만드는 토대가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난센은 끊임없이 일했습니다. 러시아 정주지역을 현지 조사한 그는, 물부족을 문제화하여 아르메니아계 난민이 정주할 있도록 관계와 배수를 추진하기 위한 자금 마련에 착수했습니다. 국제연맹이나 관계 각국을 설득할 때는, 필요한 융자액은 군함의 2년간의 유지비로 충분하다고 말했습니다.

 

전쟁에 사용된 돈은 후의 개선을 위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난민에 자금을

융통하는 것은 재생산적이다.사람들의 집과 행복을 짓고 세계의 번영을 증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연맹과 각국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일단은 지원을 약속했던 주요 국가들이 후에 모든 것을 잊어버리기도 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맺은 국가들의 약속의 대부분은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난센에게는 이것이 배신처럼 여겨져 때로는 강한 어조로 비판했지만, 결국 정치의 벽을 넘지는 못했습니다.

 

사태를 타개하고자 난센은 난민 고등 법무관직의 사임을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국제연맹은 사표를 수락하는 것조차 거부했고, 이에 난센은 크게 낙심했습니다. 아르메니아계 난민 구제와 관련한 경험은, 그의 마음에 깊은 실망과 좌절을 남겼습니다. 그가 원했던 결과와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렵, 격한 업무와 실의에 의해 난센은 점점 수척해져 갔고, 주변 이들에게 그것이 비참하게 비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보답받지 못한 난센의 노력에 대한 아낌없는 경의와 은혜가 아르메니아인들에 의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난센이 세상을 떠난 , 난센 사무소의 소장이 마이클 한손은 아르메니아인들을 앞에 두고 알레포에서 강연했을 때의 일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입에서 난센이라는 말이 나오자 마자, 모든 관중이 일어나 2분간 묵념을 올렸다

 

그리고 지금도, 난센은 세계 각지에서 살아가는 아르메니아인들의 기억 속에 살아있습니다. 1991 탄생한 아르메니아 공화국에는, 난센을 기념하여 이름 붙인 도로와 장소, 건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난센의 업적을 잊지 않는 사람들은, 아직도 오슬로에 있는 그의 묘지를 찾아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끝맺으며 필자로부터의 메시지

 

난센으로부터 전언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리쵸프 난센이라는 인물에게 어떤 인상을 받으셨는지요. 바로 얼마 , 저는 프리쵸프 난센ㅡ북극탐험가에서 난민의 아버지 출판했습니다. 집필하며 제가 엿보았던 난센의 모습은, 결코 어려운 문제를 무난히 해결하는 초인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인생의 후반, 배신과 냉대, 무관심이라는 파도에 번이고 부서지는 모습은, 오히려 요령 없는 서툰 사람 자체입니다. 

 

그러나, 그런 난센의 생생한 모습에 그의 진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난센은 번이고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때마다,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이나 난민을 위해 일어나 그들의 방패가 되고자 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내며, 어둠을 물리치는 빛이 되고자 했습니다.

 

21세기인 지금에 있어서도 난센과 같은 가치를 내면에 지니고 있는 사람은 결코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퍼스트 당연시 되고 있는 시대이지만, 가족이나 친구는 물론 주변 사람, 그리고 알지 못하는 누군가를 위해 매일 분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쓰러지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발짝 내딛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빛나, 어둠을 이기는 빛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책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시간을 넘어 전달되는, 프리쵸프 난센으로부터의 전언입니다. 희망을 잃고 절망에 빠지려 , 포기하고 싶어질 , 그는 분명 무언가를 말하려고 것입니다.

 

난센이 북극탐험 시 사용한 부츠와 나이프 [Jan Dalsgaard Sørensen 촬영, Fridtjof Nansen Institute]

 

아라카키 오사무(新垣 修)

오키나와 출신. 국제기독교대학(ICU) 교양학부교수.

PhD in Law (웰링턴 빅토리아 대학교)

유엔난민고등판무관 사무소 법무관보, 국제협력사업단( JICA) 주니어 전문원, 하버드대 로스쿨 객원 펠로우, 도쿄대학교 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 객원 준교수, 히로시마 시립대 교수 등을 거쳐 현직.

 

저서

『フリチョフナンセン──極北探家から「難民の父」へ』 타로지로사 에디터스, 2022. (http://www.tarojiro.co.jp/product/6308/)

『時を漂う感染症──際法とグロバルイシュの系譜』 게이오기주쿠대학출판회, 2021.

The Oxford Handbook of International Refugee Law (chapter contribution/co-author, Oxford University Press, 2021)
The UNHCR and the Supervision of International Refugee Law (chapter contribu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3)
Refugee Law and Practice in Japan
single author, Ashgate Publishing,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