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 국경을 건넌 흙과 사람들
<브링 홈: 아버지의 땅>과 티벳 가수 카락 뺀빠 이야기
- 제3회 난민영화제 관객과의 대화 -
다큐멘터리 <브링 홈: 아버지의 땅>은 티베트 흙이 국경을 건너는 이야기이다. 티베트 난민 2세 아티스트 텐진 릭돌은 고국 티베트를 그리워하며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티베트 난민들에게 티베트의 땅을 안겨주고자 뉴욕에서 네팔로 건너왔다. 기획은 단순했지만, 티베트 국경엔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오가는 위험천만한 일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장장 17개월에 걸쳐 흙이 티베트를 벗어나 티베트망명정부가 있는 인도 다람살라에 도착하는 과정은 티베트인들의 망명 여정과 꼭 닮아있었다.
평화를 노래하는 티베트 가수 카락 뺀빠(Kharag Penpa) 씨는 흙과 사람의 차이가 하나 있다고 했다.
“흙도 아주 어렵게 인도 다람살라까지 가져왔지만, 사람과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인도로 망명 오는 티베트 어린이들은 설산을 넘다가 추워서 발 다리를 잃거나 죽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1959월 4월 티베트의 정치적 그리고 영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는 8만명의 티베트인들과 함께 중국이 강제점령한 티베트를 탈출했다. 그는 인도의 다람살라에 티베트 망명정부를 세웠다. “티베트에 있으면 티베트이라는 이름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티베트 문화, 사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인도로 망명해야 했습니다.” 제3회 난민영화제에서 <브링 홈: 아버지의 땅>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GV)에 초청된 카락 뺀빠 씨는 이렇게 티베트 난민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달라이 라마 존자는 1960년에는 티베트의 문화예술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티베트 공연예술학교를 세우고, 티베트 어린이학교, 티베트 병원을 세웠습니다.”
“티베트 망명인으로 다른 나라인에서 살아간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맨몸으로 남의 나라에서 먹고 살아야 하고 난민 1세들은 곡괭이 하나로 바위를 부수고 길도 닦았습니다. 공사장 옆에서 영양실조로 쓰러져 가는 아이 51명을 모아서 달라이 라마 존자가 보육을 시작한 것이 영화에 나왔던 티베트난민학교(TCV; Tibetan Children Village)의 시작입니다. 이 학교는 망명정부의 교육기금과 전세계의 기부금으로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운영되고 있습니다. 전세계에서 티베트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아이들을 받아들여서 기르고 교육하고 있습니다.” 뺀빠 씨의 아내이자 매니저인 강다은 씨가 설명을 덧붙였다.
“나 비록 어리지만 열심히 공부할래요.
우리 조국 티베트로 돌아갈래요.
난 어린 학생 티베트의 씨앗.
우리 힘으로 자유를 찾아 티베트로 돌아갈래요.”
영화에서 다람살라 TCV 학교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이 흙을 밟으며 부르던 노래가 귀에 맴돈다. 티베트망명정부가 세워진 지 근 60년이 다 되었지만 조국 티베트를 되찾고자 하는 의지와 티베트인이라는 자부심은 노래를 통해 난민 2세, 3세들의 가슴 깊숙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티벳 난민에 대해 궁금한 관객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카락 뺀빠, 강다은, 그리고 사회를 맡은 고은지 난민인권센터 활동가가 답했다.
Q. 교육을 위해 인도 티베트학교까지 온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지금 티베트에선 중국어로 중국 교육을 하고 있나요?
강다은: 티베트에 있는 티베트 사람들은 중국 학교에서 중국어로 교육 받고 있습니다. 티베트어를 쓰는 사람들은 취업할 수 없습니다. 중국어를 배우지 않는 한 제대로 된 취업을 할 수 없습니다.
많은 티베트 유목민들이 강제로 도시로 이주되고 있지만, 도시로 나와서는 중국어를 모르기 때문에 부유해질 수 없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어요.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중국에서는 ‘티베트어를 가르치지 말라고 한 적 없다’, ‘티베트의 문화를 존중한다’라고 정치적으로 말합니다. 실제로는 티베트어 학교를 세운 린포체 분들이나 지식인들이 투옥되거나 체포되는 경우 많습니다. 제대로 된 티베트어 교육이나 역사교육은 말할 것도 없겠죠.
고은지: 장체와 시가체라고 하는 티베트 제2, 제3의 도시를 다녀왔는데요. 도시에서도 티베트인들 장사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중국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티베트인들의 생계수단마저도 막혀 있는 겁니다. 일거수 일투족 거의 모든 부분에서 중국 공안들이 심하게 감시합니다. 장체, 시가체에 가는 내내 티베트인들이 사는 모든 가정에 중국 국기가 꽂혀 있고 검문이 심해서 모든 행동에 대해 검사를 받고 있었어요. 나날이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Q. 네팔 지진 이후 티베트 상황은 어떤가요?
강다은: 티베트 난민촌 뉴스를 본 적이 없습니다. 네팔에서 티베트 난민 지위 또한 낮아서, 네팔이 친중화 되어 가고 있어서 티베트분들이 어떻게 사는지 페북으로 소소하게 전하는 것 이외에는 뉴스로 기사화되는 건 보지 못했습니다.
고은지: 실제로 인도나 네팔에 있는 티베트 분들의 상황이 악화되고 있는 건, 중국과의 정치적 관계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입니다. 인도와 중국 간의 관계가 좋아지면서 티베트 분들의 삶이 나빠지는 걸 보았어요.
Q. 한국에 티베트 난민들이 있나요?
강다은: 한국에 티베트 분들 소수이지만 꽤 들어와 있지만, 난민인정을 받은 티베트 분은 아직 한 분도 보지 못했습니다. 대개 난민비자가 아닌 결혼비자나 종교비자로 들어온 분들입니다.
고은지 활동가에 의하면, 2016년 한해 한국에 난민을 신청한 이들 중 1.54%만이 난민지위를 얻었다고 한다. 작년 한해만 7,542명 신청자 중 (그전 대기자 포함) 98명이 난민 지위를 인정 받았다는 것이다. 그만큼 한국은 난민을 받아들이는 데 인색한 국가이다. 그 중 티베트 난민은 아직 없다고 하니 이국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노래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서글픈 일일지 가슴이 먹먹해진다.
간단히보는 2016년 난민 통계 (출처: 난민인권센터 행정정보공개청구 결과_법무부 난민과 2017.2.26)
Q. 왜 한국사회가 난민을 받아들여야 하는가요?
카락 뺀빠 : 1959년부터 58년간 인도에서 티베트 난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인도 다람살라가 아마 인도에서 가장 관광객이 많이 가는 곳일 겁니다. 이들이 왜 갈까요. 첫번째는 달라이 라마 만나러, 두번째는 티베트 난민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티베트 문화는 어떤지 배우고 싶어서 갑니다. 달라이 라마 보기 위해 전세계 사람들이 다 오기 때문에 이 지역 사람들의 생활이 옛날보다 엄청 나아졌어요.
1959년 인도에서 티베트 난민을 무시하지 않고 받았습니다. 50년간 티베트인들에게 인도에 살라고 허락했어요. 50년 후에 다시 신청했더니, “웰컴, 달라이라마” 언제든지 독립할 때까지 계셔도 된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난민이 인도 어디에 살든 도움이 되고 피해 주지 않고, 그 나라 법 따라 살고, 그 나라 좋게 만들면 난민 받아들여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래서 (한국에서) 난민을 받으면 어떨까 (도리어 제가) 질문을 던져봅니다.
강다은: 유엔난민기구 홍보 광고에서 본 “난민은 스스로 선택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굉장히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누구나 난민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일본 강점기 때 나라의 독립을 원하는 분들이 중국, 미국으로 망명하고 그분들을 중심으로 한국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한, 한국 사람은 난민에 대해서 지금은 정책상 받아들이기 어려울 뿐이지, 난민이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면 난민에 대해 호의적으로 대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카락 뺀빠 씨 역시 티벳 난민이다. 그의 어머니는 임신 9개월에 부모님을 뵈러 친척집에 갔다가, 갑자기 인도 북부 라다크로 망명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가족들과 함께 설산을 넘어 라다크에 도착한 토요일(Penpa) 밤, 뺀빠 씨는 태어났다. 그는 티베트에 두고 온 아버지를 아직 본 적이 없다. 난민으로 있는 한 아버지를 만날 수 없는 마음을 담아 <보고싶다 티베트>라는 곡을 만들었다. 티베트의 광활한 산천을 담은 뮤직비디오를 배경으로 뺀빠 씨는 절규하듯 ‘티베트’에게 보고싶노라 노래한다. “아리요~” 온 천지를 공명하는 듯한 목소리엔 깊은 한이 배어나온다.
[Missing My Land Tibet /ཕ་ཡུལ་དྲན་གླུ། /보고싶다 티베트] Kharag Penpa Official Music Video
뺀빠 씨는 어린 시절부터 노래를 좋아해 1999년 인도 티베트 공연예술대학교를 졸업하고 2007년까지 다람살라의 티베트난민학교TCV에서 티베트 전통 음악교사로 근무했다. 2007년에 한국에 문화교류프로젝트로 왔다가, 다시 장학생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한국 전통음악 작곡을 전공했다. 2012년에는 다문화 다국적 노래단 사회적 기업 ‘몽땅’ 단원으로 3년 간 활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4년에 강다은 씨와 결혼했다. 강 씨는 뺀빠 씨의 곡에 가사를 붙이기도 하고 뮤직비디오를 직접 촬영 편집하기도 하는 등 티베트 음악을 통해 티베트 문화와 티베트 문제를 한국 사회에 알리는 뺀빠 씨의 음악적, 정신적 동반자이다.
강다은 씨는 티베트를 생각하는 모임 <Think Tibet>에서 2005년부터 활동할 정도로 티벳에 대한 애정이 깊은 사람이다. 2000년대에는 티베트 문제와 티베트 문화를 한국 사회에 알리려는 움직임이 많았지만, 지금은 티베트 난민을 후원하는 ‘사직동 그가게’로 알려진 ‘록빠’가 활동 단체로서는 유일하다고 한다.
티베트 독립을 위해, 난민 인권을 위해 개개인이 어떤 힘을 보탤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강 씨는 티베트에 대해 기억해 주는 것이 티벳에 대한 가장 힘있는 지지라고 했다.
이야기 말미에 강 씨는 뺀빠 씨의 두번 째 노래를 소개했다.
랑쩬(자유). “난민이라고 하면 흔히들 없는 듯 살아가야 하고 유령처럼 어딘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하는 사람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들 모두 꿈을 가진 우리와 동등한 사람입니다. 고개 숙이지 말고 당당히 고개 들고 꿈과 미래를 위해, 나라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그런 용기를 드리기 위해 준비했습니다.”
인터뷰 | 숲씨 웹진 VOM 편집장
본문 출처: MWTV이주민 방송,
http://www.mwtv.kr/home/b/photo/1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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