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인 사무국장
법무부의 통계에서 미등록외국인 숫자 하나가 줄었다.
난민인정을 받지 못하고 2년여를 지내오던 한 분이 자진 출국했기 때문이다.
그분이 자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 처음엔 무조건 반대 입장이었다.
강제송환금지라는 난민에겐 타협할 수 없는 원칙도 있거니와 여전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나라로 자진해서 돌아간다는 게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천공항에서 내손으로 출국 수속을 도와 그분을 떠나보냈다.
그분은 종교적 박해를 이유로 난민신청을 하였지만 끝내 난민인정을 받지 못했다. 2007년도 일이다. 난민신청자에게 아무런 지원도 없고, 일도 못하는 상황에서 가족의 생존 자체를 보장받을 수 없어 궁여지책으로 1년 후 아내와 딸 셋을 자국으로 돌려보냈다. 이렇게 난민불인정으로 시작된 비극은 또 다른 비극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A국으로 돌아갔던 가족들이 자신들을 박해하던 상대 종교집단에 납치를 당한 것이다. 다행히 곧 바로 풀려나긴 했지만 가족에 대한 걱정은 오래전부터 앓아오던 당뇨와 그 합병증을 더욱 심하게 만들었다.
11월 초 그분이 난센 사무실을 찾았다. 3개월 전만해도 거동은 어렵지 않았는데 지팡이가 없으면 걷기도 힘들 만큼 쇄약해진 모습으로.
그 분은 의자에 앉자마자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가족이 납치를 당하기도 했고, 건강도 좋지 않은데 돌아가는 것은 옳은 결정이 아니라고 반대했다. 그러자 그분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어갔다.
“얼마 전 큰딸이 강간을 당했대요. 건강도 좋지 않은 내가 걱정할까봐 가족들이 숨겨왔었는데 이제야 알게 되었어요.” 그분을 박해했던 상대 종교 사람들이 가족을 납치하더니 이젠 이렇게까지 했다는 것이었다. 그분은 눈물만 흘릴 뿐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리곤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돌아가서 딸을 그렇게 만든 사람을 죽이고 나도 죽어버릴 거예요. 이렇게 살아가는 게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한참동안 분노를 격정적으로 토해내던 그분이 긴 탄식과 함께 울부짖었다.
“Where is God?"
일단 심리 상태가 너무 불안정해보여 점심 식사를 핑계로 잠시 분위기를 바꾸고 다시 마주 앉았다. 그분은 전보다는 많이 안정된 상태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Mr. Kim 내 몸 내가 잘 알아요. 내 상태로 볼 때 오래 살지는 못할 것 같아요. 이제 가족에게 돌아가서 남은 인생 아버지로서 딸 곁에 머물러있고 싶어요. 딸들이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순간 어떤 판단을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난민이라는 제도는 인간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존재할 때 가치 있는 것이다. 역으로 난민이라는 제도를 가치 있게 하기 위해 인권이 도구화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이분에게 난민의 강제송환금지원칙이나 자국정부와 접촉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우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아니면 위험하지만 가족이 함께 있고 아버지로서 도리를 다하고 싶어 하는 마지막 소망을 들어주는 게 옳은 일일까?
일단은 그분을 돌려보냈다. 단시간에 결정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어서 며칠 동안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다.
바로 다음날 아침 일찍 핸드폰이 울렸다.
“Mr. Kim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요. 온 몸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고 힘이 하나도 없어요.”
“OO씨 돈은 걱정 하지 말고 일단 빨리 병원에 가세요. 그리고 병원에서 연락을 주세요.”
대중교통으로 가려면 두 시간은 걸리는 곳에 그분이 살고 있어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분을 진찰한 의사는 혈당 조절이 전혀 안 되었고, 합병증도 있어 상태가 심각하다고 하였다. 다시 그분과 통화를 이어 나갔다.
“요즘 당뇨약 먹고 있었어요?
“아니요”
“왜 안 먹었어요. 언제부터 안 먹었는데요?”
“약을 살 돈이 없어서 한 3주 전부터 약을 못 먹고 있었어요.”
순간 내 정신이 멍해지고 힘이 쭉 빠져나갔다.
당뇨로 합병증까지 있는 사람이 3주간 약도 못 먹은 상태에서 딸이 강간당했다는 소식까지 들었으니,,,,,,,
다행히 당뇨약을 복용하고 증세가 완화되어 갔다. 마찬가지로 이 분에 대한 결정도 빠르게 결론지어 졌다.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 주기로.
출국하기로 한 날,
짐을 정리하고 공항 가는 길에 그 분이 약간은 들떠 있는 분위기였다.
“OO씨 오늘 기분이 좋아 보여요, 가족 만나는 게 설레지요?”
그분은 한참동안을 아무 말 없이 차창 밖을 응시하다 가슴을 주먹으로 툭툭 치며 짤막한 대답 하나를 내놓았다.
“이 안에,,,,,, 너무 큰 아픔이 있어요.”
인터뷰를 통해 그분 삶의 여정을 듣고
병원에 함께 다니고
가족이 납치되었다는 하소연을 듣고
마침내 딸이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내가 그분의 아픔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한 10%.
그런데 그 10%의 아픔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더 이상 해줄 말이 없었다.
어떤 말로도 위로되지 않을 슬픔과 아픔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누가 봐도 명백한 종교적 박해를 피해 한국에 왔지만 거부당하고 돌아가는 그분의 아픔에 특히 딸의 사건에 한국 사회가 얼마나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지,,,,,,,,
인천공항 가는 길에 뉴스를 통해 봐오던 인천대교를 처음 건넜다.
한국의 성장을 나타낼 상징물로 손색이 없을 만큼 길고, 높고 나름 멋져 보였다.
하지만 이날 내가 본 인천대교 주 탑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그 높이만큼이나 어둡고 차갑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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