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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와 처벌, 그리고 탐욕에 관한 우화


정신병원과 교도소.


지금 이 글을 보는 독자라면, 둘 중 한 곳으로 반드시 가야 하는 상황일 때 어디를 가실 것인지 궁금하다. 당연히 쉽게 판단하기 어려우실 것이다. 둘 중 어느 곳도 가서는 안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범죄자 맥머핀(잭 니콜슨)은 교도소로 가야 할 운명이었으나, 정신병원을 선택했다. 그는 어린 여성을 성폭행한 흉악범이다. 동종 전과 5범으로서, 더이상 그에 대해 뭔가 말할 여지도 없다. 그가 정신병원으로 간 이유는, 정신병원이 교도소보다는 아무래도 자유롭고 편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교도소 내에서 미친 행동을 하며 일부러 정신병자로 오해받아 정신병원으로 후송되는 길을 선택한다. 이제 교도소보다 편해졌을까?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범죄자보다 더 극악한 권력의 속성



맥머핀의 눈으로 바라본 정신병원은 평온하기 그지 없는 곳이다. 아침에는 클래식이 울리는 가운데, 환자들은 고요한 환경에서 정해진 진료일정에 따라 투약을 받거나 주사를 맞는다. 온화하면서도 엄격하게 환자들을 바라보며 관리하는 레취드 간호사(루이스 플레쳐)는 이들의 '엄마'이자 선생님이다. 교도소의 삭막한 분위기와는 차원이 달랐던 이 환경, 맥머핀은 악동 행각을 시작한다. 그리고 주의깊게 병원을 관찰한다. 레취드를 제압하지 않으면 자신의 안락한 병원 생활은 영원한 안녕이기 때문이다.


그를 두고 병원 측은 회의를 한다. 그는 정신병원에 있을 이유가 없음이 명백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취드 간호사는 그의 교도소 송환을 반대한다. 이때부터 맥머핀에 대한 정확한 사실평가이자 시선인 '극악무도한 성폭행범'이라는 잠시 지우도록 하자. 병동이라는 작은 세계를 꽉 틀어쥐고 모든 것을 통제하는 레취드 간호사와 그에게 반항하며 체계를 흔들려 하는 맥머핀의 싸움이야말로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진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극악무도한 성폭행범'이라는 맥머핀의 배경은 이 영화의 선악구도를 흔드는 주범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흉악무도한 맥머핀보다 더 잔인하고 무서운 이유는 바로 권력 체계가 저지르는 범죄일 것이다.


레취드가 맥머핀을 남겨두고자 한 이유는 '본보기'였다. 반항하며 선동하는 그를 제압해둔다면, 지금도 잘 장악돼 있는 정신병동이지만 앞으로는 보다 더 수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그것은 바로 권력의 속성이다. 권력은 악의적으로 휘두리면 상대방의 모든 것을 파괴한다. 그 악의에는 권력을 쥔 개인의 적개심이 숨어있다. 개인의 생각과 취향을 위해 본질은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는 것이 권력이다.


이 정신병원은 '비정상인'인 환자들 위에 정상인인 의사와 간호사 등 병원의 진료체계가 군림하는 구도로 구성돼 있다. 레취드 간호사의 온화한 미소에는 그 누구도 반항할 수 없도록, 경비원을 호출 전화 한 통이면 불러 제압할 수 있는 가혹한 체계가 숨어 있다. 그 전화통을 쥐고 있는 사람이 바로 레취드 간호사다. 그 온화한 미소는 정치인이 선거운동할 때나 방송 인터뷰할 때만 짓는 그 거짓 미소와 다름없다. 맥머핀은 바로 이 체계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병동에 거주하는 환자지만 '비정상인'이 아님을 과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그 대표적인 상징은 맥머핀이 주도한, 경비원들과 환자들의 농구시합이다. 분명 다른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농구장에서의 경비원들과 환자들은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그 농구시합은 레취드 간호사에 대한 반란을 명백하게 상징한다. 고요한 클래식 음악과 평화로운 토론과 대화라는 틀 속에 숨어있는 레취드 간호사의 통제방식이란, 환자들이 제각각 가진 트라우마를 건드려 위축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트라우마를 언급하면 환자들은 위축돼 스스로 굳건히 살아갈 수 있는 의지를 상실해버린다. 그럼으로써 흩날리는 레취드 간호사의 미소는 결국 우월의식이었다. "너희들이 아무리 개겨도 아무 필요도 없어!"


맥머핀이 시도한 모든 반란들은 결국 수포로 돌아간다. 탈출을 결심하지만 그것은 맥머핀의 치명적인 판단 실수였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전설이라는 장르에서 흔히 봐왔던 공식이 그대로 적용된다. 모두의 염원을 안고 도전했던 자의 철저한 실패, 그리고 패망. 그렇듯 병원의 체계, 아니 권력의 체계는 공고했던 것이다.





"권력은 도처에 있다"


정신병원 강제입원 늘어…'환자는 돈' > SBS 2012년 7월 21일자 보도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저 설정은 그저 영화적 설정이 아니다. 현실이다. 강제입원한 환자가 많을수록 정부의 보조금을 많이 받는 정신병원의 의료수가 체계의 부작용과 개개인의 탐욕이 감시와 처벌을 만나 최악의 결과로 치닫는 경우가 있다. 재산분쟁 중인 남동생을 정신질환자로 몰아 강제입원시킨 누나가 있다. 이혼소송 중인 배우자를 정신질환자로 몰아 강제입원시킨 사람도 있다. 알콜중독 치료를 위해 스스로 병원을 찾았다가 강제입원당해 탈출하려다가 더 큰 인권억압을 당한 사람도 있다. 그들의 이해관계와 병원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순간, 멀쩡한 사람은 '정신질환자'라는 낙인과 함께 억압당한다. 


철학자 미셸 푸코의 지적에 개개인마다의 탐욕이 덧붙여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켄 키지의 소설 원작을 영화화한 것이다. 소설 원작과 영화 모두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인디언이 이주 백인에 의해 어떻게 박해당했는지, 그리고 권력이라는 체계에 의해 개인이 어떻게 파멸하는지, 이렇듯 이중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미셸 푸코는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판옵티콘(자동으로 작동하는 감옥)의 감시체계 원리가 사회 전반으로 파고들어 규범사회의 기본 원리인 '판옵티시즘(panopticism)'으로 바뀌었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규범사회의 기본 원리라고 알고 있는 상식들은 감시체계 원리라는 것이다. 획일화에 대한 강조야말로 권력 유지의 핵심이자, 감시와 처벌의 핵심이다. 그래서 미셸 푸코는 "권력은 도처에 있다"고 말했다. 상식이라는 이름의 획일화를 강조하지 않는 사회란 없기 때문이다.


 



레취드 간호사가 원했던 것은 자신의 통제 하에 환자들이 일절의 반항 없이 침묵하며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감시와 처벌의 권한을 가진 권력이 모든 사람들에게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원작 소설과 영화는 왜 정신병원이라는 공간을 선택했을까? 그리고 왜 맥머핀을 흉악범으로 선택해 교도소에서 온 사람으로 설정했을까? 이것은 전형적인 푸코식 설정이다. 더이상 왕이라는 절대권력자가 존재하지 않는 현실에서, 그에 버금가는 권력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억업하는 힘을 가진 곳은 감옥, 정신병원였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는 그 외에도 가정, 학교, 공장 등 '규칙'이라는 체계를 모든 곳을 감시기구이자 처벌기구라고 봤다.


법무부가 만드는 난민지원센터도 뻐꾸기 둥지?


법무부는 현재 영종도에 난민지원센터를 건립 중이다. 120억원의 예산이 소요되는 대공사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난민을 긴급구호하며 지원하며 거주 공간까지 제공할 수 있는 공간을 왜 '섬'에 짓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주변에는 오로지 갯벌과 해양경찰부대와 헬기장만이 있다. 즉, 한국 사람들과의 사회적 접촉이나 교류가 차단될 위험이 높은 것이다.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의 난민실까지 그곳에 옮겨가면, 난민인정절차에 필요한 행정적 사안까지 오로지 영종도 내에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격리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게다가 해양경찰부대가 있어 사격훈련을 진행할 경우, 그리고 헬기가 이착륙하는 소음이 그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난민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느낄 공포를 더욱 자극할 공간이 될 가능성이 있다. 서로 저마다 다른 이유로 난민지위를 신청했을 그들 사이에서 한 곳에서 뒤엉켜 살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갈등 또한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 


저마다 다른 그들이 주변에 오로지 해양경찰부대와 갯벌만 있는 외딴 섬에 있는 제한된 공간에서, 난민실에서 부르면 갔다가 다시 돌아와 수용되는듯 거주하는 그 그림이 떠오르지는 않으시는지 모르겠다. 난민에 대한 인식개선은커녕 인정율조차 현저히 낮은 현 상황에서 그곳은 마치 맥머핀(잭 니콜슨)과 다른 환자들이 레취드 간호사의 통제 하에 살아가던 그 병원과 같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20억원의 예산이 드는 뻐꾸기 둥지.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뻐꾸기'란 정신질환자나 미친 사람을 뜻하는 은어라고 한다. 뻐꾸기가 둥지라는 틀 위로 날아갔다는 것은 더 큰 자유를 찾았다는 의미와 다름 아니다. 난민에게 필요한 것은 값비싼 뻐꾸기 둥지가 아니라, 둥지 위로 날아올랐을 때 보이는 저 높은 곳의 더 큰 세상이다. 난민은 '뻐꾸기'가 아니다. 그들은 위험한 존재도, 혐오스러운 존재도 아니다. 그들에게 120억원 짜리 비싼 뻐꾸기 둥지는 필요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박형준 활동가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