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난민과 함께 한 '9월 월담' 후기
9월 20일 해질녁부터 시작된 월담은 처음에는 다소 적은 인원이었지만, 열기가 무르익어 가면서 많은 분들이 하나둘 자리를 채워 주셔서 진지하고 열띤 분위기 속에서 밤늦게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월담에서 발표를 해 주신 우전룽 씨는 2008년 11월, 중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난민지위판결(대법원)을 받은 중국 난민 다섯 명 중의 한 분입니다. 우전룽 씨는 중국에서 오랜 기간 동안 민주화를 위해 활동을 해오시다가 정부의 탄압을 피해 한국으로 건너오셨습니다. 그동안 난민의 이야기가 박해로 인한 고통과 생활의 어려움 중심이었다면, 우전룽 씨의 이야기에서는 정치적 신념과 가치를 지키고, 삶의 주체로서 살아가고 있는 난민의 존재를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많은 참가자들이 중국정치 및 사회, 마오쩌둥, 한국의 민주화 등에 대해 다양한 생각을 나누는 자리가 되기도 했지요.
우전룽 씨는 젊은 시절부터 63세의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다사다난한 생애사를 통해 다양한 경험들을 들려 주셨습니다. 우전룽 씨는 젊은 시절, 군대의 정치교관이자 공산당 당원이었지만, 중국이 정치적으로 억압되어 있음을 느끼고 이를 비판하는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이 발각되는 순간 그의 인생은 끝이었기에 작성한 원고를 고향 땅 밑에 묻어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글을 “한 번쓰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었기에” 그 후로도 2002년까지 800만자, 즉 30권의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중국에서는 단 한 글자도 발표할 수 없었지만요. 우전룽 씨는 중국에 있었던 2002년까지도 정부에 비판적인 내용의 글을 출판하거나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일은 ‘사상죄’와 ‘비방죄’로 처벌당하기에 ‘문자옥’이 존재했었는데, 이것은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며 중국의 현실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이론과 사상을 표현하고, 알리기 위한 자유를 찾아 이 곳 한국에 오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쓰셨던 필사본 책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한국에 입국할 때 들고 오지 못했지만 나중에 인편을 통해서 가져올 수 있었답니다.
우전룽 씨는 저작활동만을 한 것이 아니라 89년 천안문 시위가 일어날 당시 고향인 센양시에서도 벌어진 시위에 참가하였습니다. 당시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했었는데, 시위를 비판하는 다른 시민의 주장을 듣고 있을 수가 없어 학생들의 시위를 옹호하며 연설을 하여 많은 학생들에게 지지를 받으셨습니다. 물론 이 일로 인해 그는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갔고, 고향에 피신해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 후 저술활동을 계속 하시며, 한편으로는 비밀리에 민주화 운동을 위한 조직을 만들어 활동을 모색해 오던 중 중국공안의 감시가 심해지자, 등윤비 씨와 함께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2002년 11월 한국 오신 후에도 그의 민주화를 위한 활동은 계속되었습니다. 중국 민주화 운동 조직의 한국지부에 가담하고 이끌며 한국에서 중국 민주화를 위한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2003년에는 천안문 사건 14주년을 맞아 주한중국영사관 앞에서 중국 공산당 일당체제에 반대하는 시위를 감행했습니다. 2005년에도 같은 장소에서 “독재를 없애고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주자”는 구호로 시위를 진행해 해외에 그들의 존재가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저희 활동을 통해 중국에 민주의 씨앗이 뿌려졌다고 생각합니다. 아직은 눈에 보이지 않게 땅속에 묻혀 있지만 머지 않은 미래에 싹이 트고 꽃을 피며 열매가 맺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 이후에도 그는 2009년 동북아 집단학살 종식 국제대회, 2012년 파룬궁 수련생에 대한 인권탄압에 반대하는 범국민대회 등에 참가하며 꾸준하고 일관되게 자유와 민주주의의 신념을 실천해 오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전룽 씨는 “한국에 있으면서 글을 쓰는 자유를 얻었지만” 생활고라는 문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의 ‘특별한 직업’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처럼 돈을 벌 수 없어 생활 자체가 어려움이 되었습니다. 한국지부 조직에서 주었던 생활 보조금이 사라지고 난 뒤, 그는 현재까지 동사무소에서 지급하는 기초생활 보조금으로 생활을 해오고 있지만, 그 돈으로는 방세, 식비, 인터넷과 전화비용 등을 내기에도 빠듯하기에 여전히 생활은 힘겹습니다.
발표를 듣자마자 한 참가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만약 중국이 민주화가 된다면 돌아가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이에 대해 그는
“저는 지금 중국으로 돌아가면 아무런 희망이 없기에 갈 수는 없는 처지입니다. 하지만, 제가 중국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 날은 민주화가 된 이후가 아니라,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는 때일 것입니다. 중국이 민주화의 물결이 일어난다면 저는 당장 중국으로 가서 그 물결에 참가할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의 대답 속에서 우리는 난민의 삶이 단지 박해와 두려움을 피해오는 과정만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삶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국과 고향에서 잃어버린 가치와 자유를 되찾는 그날을 꿈꾸는, 희망이 가슴 안에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난민이자 이주민으로서 한국정부에 대해 느끼는 한계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이에 대해 우전룽 씨는 “민주화 된” 한국에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이곳에 왔지만, 6년에 걸친 난민신청 및 소송과정에서 자신의 진실을 한국사회가 인정해 주지 않아 많이 힘드셨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당시 난민인정을 받기 위해 50여명의 중국인들이 신청을 했지만, 오직 5명만이 난민으로 판결받을 수 있었습니다. 큰 기대를 갖고 찾아온 한국 땅에서 난민으로서 살아간다는 과정은 자신이 난민인지 의심을 당하는 일부터 시작되었으며, 기본적인 생활 자체가 어려웠기에 여러가지로 힘들었던 심경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함께 참가한 등윤비 씨의 경우는 중국에 있을 때 한국의 5.18광주민주화운동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한국의 민주화에 대해 큰 감동을 느꼈다고 하셨습니다. 독재정권에 맞선 민주화의 물결뿐만 아니라 20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정치체제를 바꾸고 민주화인사들이 권리를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말이지요. 그렇기에 우전룽 씨와 등윤비 씨는 한국의 민주화 모델이 자신들이 배워가야 할 모델이라고 강하게 확신하고 계셨습니다. “환심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한국 민주화에 대해 훌륭하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현재 한국정부의 미래가 밝다는 것이 아니라 한국 시민사회의 미래를 의미한다는 단서를 달으셨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분들이 정치적·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해 주셨습니다. 중국정부의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은 적절한지, 댜오위다오 섬 분쟁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 한국에 오기 전과 이후의 한국에 대한 생각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현재 한국정부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 등등. 일반 대중 매체나 뉴스가 전하는 쟁점들에 대해 중국민주화인사의 입장과 생각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무척 흥미롭고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다만, 시간이 무척 부족했기에, 이 많은 질문들을 깊이 있게 토론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지요.
안면장애 때문에 열띤 발표를 하시면서 우전룽 씨는 하얗던 얼굴 피부가 발그스레 변하셨지만, 해맑은 웃음을 잃지 않고 우리들에게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한글교실에 참가해 오며 조금은 과묵한 모습을 보여주셨던 등윤비 씨도 그 날 만큼은 열정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해주셨기에 저희는 신선한 에너지를 전달받을 수 있었답니다.
아직까지 한국과 중국 두 정부간의 정치적 관계 등으로 인해, 중국난민이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가족과 이별하고, 생활고를 홀홀단신으로 감내해야만 하기도 하며, 한국인들의 관심은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한 어려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두 분은 자신의 신념과 강한 삶의 의지를로 살아오고 계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뜻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월담을 마무리하여 언젠가 우전룽 씨 일생의 소중한 보물인 6권짜리 필사본 책이 출간될 날이 조만간 오기를 기원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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