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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는 흉터가 많다”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말하기>
하리타
독일에 살고 있는 난민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하기로 했다. 베를린에 있는 정치 그룹 국제여성공간(IWSPACE, International Women Space)에서 발행한 책자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이야기>에 수록된 11편의 이야기를 번역해 소개한다.
각각의 이야기는 이주 여성과 난민 여성들로 구성된 팀이 다른 난민 여성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1인칭 시점의 에세이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들 다수가 망명 및 난민 신청자(asylum-seeker) 신분이며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아프가니스탄, 마케도니아 등 분쟁 지역에서 자유와 안전을 찾아 국경을 넘은 이들이다. 첫 번째 이야기 “내 몸에는 흉터가 많다”(I have many scars on my body)의 주인공은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여성으로, 이름은 공개하지 않았다.
열네 살, 아버지의 명령으로 약혼하다
뭔가 문제가 있지 않는 한, 가족이 다같이 살던 나라를 떠나지 않는다. 우리 가족은 유럽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보려고 28년간 쌓아온 모든 걸 처분했다. 내 경우에 문제는 ‘결혼할 나이’인 14살 때 시작됐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여자애들이 12살 때 결혼하는 게 지극히 정상이다.
14살 어느 날, 나는 거리에서 한 남자애를 만났다. 난 그 애가 내 이상적인 남자, 내 남편이 될 수도 있다 생각하고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스스로에게 “그래, 안될 게 뭐야”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3주 동안 그 애랑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엿들어 버렸다. 아버지는 전화기를 빼앗아 들고 어떤 남자랑 통화를 하느냐고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냥 전화하는 것 말곤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지만 아버진 안 믿었다. 남자랑 전화질하는 걸 보니 이제 결혼할 때가 됐다고, 하지만 자기가 모르는 애니까 이 남자애는 상대가 아니라고 했다. 이 애는 ‘카불’ 출신인데 우린 아니었다.
※카불은 아프가니스탄 수도이자 동쪽에 위치한 제일 큰 도시이다. 2015년 통계에 의하면 카불시의 인구는 460만명이고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민족인 파쉬툰(Pashtun), 타직 (Tajik)을 비롯해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다.
아버지는 때가 됐으니, 아무나 첫 번째로 자길 찾아와 관심을 보이는 남자에게 내 결혼 수락을 할 거라고 했다. 실제로 그랬다. 한 남자가 “따님과 결혼하고 싶습니다”라고 청혼했을 때 아버지는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다만 아프가니스탄 출신인 그 사람 할아버지를 안다고 했다. 그런데 아버진 그 남자랑 결혼하라고 했다. 난 할아버지를 아는 걸로 충분하지 않다, 정작 그 사람은 모르지 않냐, 그 남자 성격이나 생김새나 직장 정도는 알아야 하는데 아무 정보도 없지 않냐고 했다. 아버지는 무조건 결혼하라고 했고, 난 따랐다.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그 사람은 정말 아니었는데. 여자들은 미래 남편에 대해서 각자 생각이 있다. 예를 들어 키 큰 남자 혹은 살집 있는 남자를 원한다거나. 그런데 그 남자한텐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 나한테 좋은 사람이야, 나에게 충분해, 라고 할만한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시의 전경 (출처: UNAMA/Fardin Waezi)
약혼하고 두 세달 쯤 지나서, 나는 남편 될 남자가 마약을 하고 팔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여자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사람인 것도. 그 사람은 여자를 그저 요리하고 빨래하고 애나 낳는 노예로 봤다. 여자들은 밖에 돌아다니면 안되고, 일하지도, 학교에 가서도 안 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세계 헤로인 유통량 90%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온다는 연구(Centre for Research on Globalization, 2015)가 있을 정도로 아프가니스탄에는 수십 년째 헤로인 및 아편 생산과 불법 거래가 성행하고 있다. 경제 구조가 빈약하고 빈곤이 만연한 현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마약 거래를 소득원으로 삼는다.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발표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25개국 중 하나로, 2016년 통계에서 1인당 국내총생산이 세계 평균치의 5% 수준인 500달러를 기록했다.
약혼할 때 아버지는 내게 이런저런 잔소리를 했다. 알다시피 난 겨우 14살이었고 내 몸은 지금 같지 않았다. 굉장히 마르고 작았다. 아버지한테 울면서 빌기도 많이 했다. “제발, 제발, 이 남자랑 결혼하기 싫어요. 전 다른 남자를 좋아해요.” 그럼 아버지는 그랬다. “아냐, 내가 이미 골랐으니까 그 남자랑 해.”
나는 그 남자가 아직 미혼이긴 하지만 다른 여자들을 두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한 남자가 일곱 명까지 여자를 둘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여자는 여권이나 신분증에도 기재되는 정식 배우자이고 나머지 여섯 명은 등록은 안되어 있는, 그런 게 정상이다. 내 약혼남한테는 여섯 명까지는 아니었지만 나 말고도 두세 명 정도 여자가 더 있었다. 나는 그에게 왜 다른 여자들을 두냐고 물은 적 있다. 내가 당신 아내인데 그걸로는 부족하냐고. 그랬더니 그 사람은 날 때리면서 말했다. “뭐라는 거야? 여자는 아무것도 못해. 내 눈 똑바로 쳐다보지도 마. 나한테 말 걸 때 눈 내리 깔아.” 난 이렇게 혼잣말하곤 했다. ‘미쳤다. 이 미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구나….’
강제 결혼, 남편의 구타로 인한 유산
어디 보자, 지금 난 11년쯤 전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와 결혼한 게 2004년이었다. 11년 전에 난 정말 작았다. 하지만 그 때도 세상은 이미 현대였다. 여자에 대한 남자들의 시각도 변하고 있었다. 한 1천년 전을 말하는 게 아니라 고작 11년 전이다. 그 사람과 나는 1년 반 동안 약혼한 상태였는데, 그 사람이 결혼할 만한 사람 같지 않아서 아버지에게 내내 헤어지고 싶다고 말했었다. 아버지의 대답은 항상 ‘안 된다’였다. 내가 파혼하면 다른 사람들이 자길 어떻게 보겠냐면서. “사람들이 그럴 거 아니냐. 저 남자 좀 봐. 딸이 파혼했대.” 아프간 가족한텐 주변 평판이 안 좋은 게 치명적이다. 아버지는 결혼하고 나서 같이 살다 보면 사정이 나아질 수도 있다고 했다. 나도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앞날을 누가 알겠냐는 생각 끝에 결국 결혼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결혼했는데, 나아지는 건 없었다. 그 사람은 전보다 더 심해지기만 했다.
그 사람 아내로 같이 산다는 게, 그 사람한테는 나를 자기 뜻대로 휘두를 수 있다는 의미였다. 결혼하고 두 달 후쯤부터 날 때리기 시작했다. 주로 칼로 공격했다. 내 몸엔 흉터가 많다. 지금도 다 볼 수 있다. 여긴 칼 때문에 생긴 거, 여기는 내 팔에다 담뱃불 지진 자국이다. 여기, 여기, 여기도 흉터. 그 사람은 손에 쥐고 있는 것 무엇이든 그걸로 내 얼굴을 때리기도 했다. 그렇게 생긴 흉터들도 많다. 때릴 때 그 사람은 짐승 같았다. 스스로 통제가 전혀 안됐다. 그렇게 때리다가 내가 실제로 죽을 수 있다는 것도 파악 못한 듯이. 죽든 말든 상관 없었을 거다.
다 때리고 나면 미안하다고 한다. 난 실컷 두들겨 패놓고 사과하면 무슨 소용이냐고 했다. 지금 난 그 시기를 잊어버리려고 노력하는데, 그 사람한테 맞서 싸울 힘이 없었다는 것 때문에 스스로에게 자꾸 미안해진다. 지금 같았으면, 조금만 더 힘이 셌으면 반격했을 수도 있다. 당시에도 그 사람이 날 공격할 때마다 죽이고 싶었다.
어머니한테도 계속 얘기했다. “내가 파혼하고 싶다고 했을 때 어머니가 사람들이 욕한다고 못하게 했죠. 그래서 결혼했는데 더 심해지기만 해. 이젠 헤어지겠다는 내 뜻을 받아줘야 되요. 이 사람 미친 놈이에요. 어느 날 날 죽일 수도 있어요. 내가 자기 아내이든 말든 신경도 안 써요. 다른 여자들이나 밤마다 하는 마약에나 더 신경 써요. 그 사람이 저보다 마약을 더 좋아하는 거 아시죠.”
그 남자가 언제 한번 나한테 약을 보여주면서 그랬다. “이것 봐, 난 너보다 이걸 더 사랑해.” 미친놈이나 그런 소릴 할 수 있다. 난 남자보다 여자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뱃속에 아기를 담을 수 없다. 남자들은 여자들처럼 제대로 살지도 못한다. 남자들에겐 불가능하다. 내 남편은 자기가 나보다 몸집이 크다고 더 강하다 생각했지만 그냥 미친 놈이었다. 정말로.
이혼하겠다니까 어머니가 안 된다면서 임신을 해야 된다고 했다. 아이가 있으면 좀 나아질 거라고. 어머니가 나보다 나이가 많고, 그리고 어머니니까 그 말을 듣기로 했다. 내가 처음 임신한 게 15살, 16살 무렵이다. 아이를 가지니까 남편이 조금 나아졌는데, 처음 다섯 달 동안만 좀 그랬다. 임신 5개월 때 남편이랑 싸운 적이 있다. 친정 집에 있다 돌아왔는데 남편이 딴 여자랑 있는 장면을 보고 난 엄청 화가 나서 따지기 시작했다. 남편이 다른 여자랑 자는 걸 목격했는데 기분이 좋았겠나. 그 사람한테 왜 딴 여자랑 잤냐고, 내가 당신 아내고 임신도 했는데, 난 당신이 나한테 원한 거 다 줬는데, 왜 아직도 이 여자랑 연락하냐고 했다.
그러고 나서 난 그 여자를 때리려고 했는데 남편이 가로막더니 날 때렸다. 내 배를 발로 찼다. 난 그대로 기절했다.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이었고, 배에 무겁고 큰 느낌이 더 이상 없었다. 어머니한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니까, 남편한테 배를 맞을 때 태아가 죽었다고 했다. 의사들이 소파술로 죽은 애를 끄집어냈다고 했다. 남자애였다. 나중에 가족들한테, 이 남자는 내가 임신한 것도 아랑곳 않고 내 배를 걷어찼다고, 이런 남자가 어떻게 날 책임지냐고 했다. 이런 사람이랑 어떻게 사냐고. 친정 집에서 두 달 정도 지내는데, 가족들이 그만 남편한테 돌아가라 했다. 아직 젊으니까 다시 임신할 수 있다고.
남편 집으로 돌아갔는데 달라진 게 없었다. 그 사람은 여전히 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생각하고 나한텐 아무 권리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건 아프간 사람들 사고의 전반적인 문제다. 남자들뿐 아니라 여자들한테도 있는 문제. 아프간 여자들 몇몇한테 내 사정을 말했더니, 그 사람들은 자기 남편들도 때린다고, 원치 않을 때도 강제로 섹스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원치 않을 땐 받아주면 안돼. 만지지 말라고 하면 못 만지고, 키스하기 싫다고 하면 못하는 거라고 말해야 된다”고 했는데, 그 여자들은 남편인데 뭘 어쩌겠냐고 결론지었다.
이건 정말 아니다. 여자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남자들은 더 하다. 여자를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힘이 있다면 아프간 여자들 그룹을 크게 조직해서 이런 생각에 맞설 텐데. 남자와 여자는 같은 곳에서 와서 같은 곳으로 돌아가는 존재, 남자들이 우리보다 낫다는 건 얘기는 말도 안 된다. 난 정말 그렇게 생각 안 한다. 아무튼, 남편 집에 돌아갔을 때 그 사람은 앞으로 나아지겠다고 약속했지만 그것도 거짓말이었다. 남편과 아내로 살았던 일년 반 동안 남편은 내일은 나아지겠다고 끊임없이 말했다. 난 이혼하자고 했다.
▶ 무슬림 여성들이 모여 자신이 겪는 섹슈얼리티 억압과 가부장제를 신랄하게 까발리는 장면들을 담아낸
그래픽 노블 <바느질 수다>(휴머니타스). 현대 이란 사회의 모순과 역동을 여성의 관점으로 바라본 그래픽 노블 <페르세폴리스>의 작가 마르잔 사트라피 작품이다. 이 글의 화자에겐 폭력을 폭력이라 함께 말할 동지가 필요했다.
우리 가족들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냐며 내 이혼 의사를 도저히 못 받아들였다. 난 거듭 말했다. 날 생각해야 된다고, 남편이랑 끔찍하게 살고 있는 날 걱정해야 된다고. 지금 내 인생보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를 더 신경 쓰고 있는 게 말이 되냐고. 나는 가족들한테 내 상황을 알리는데 여섯, 일곱 달을 썼다. 하루는 남편 집에 있던 시어머니가 날더라 나쁜 여자라 했다. 난 그랬다. “저 나쁜 여자 아니에요. 어머니가 나쁜 여자예요. 아들한테 아내를 때려도 된다고 가르치고 있잖아요.” 이 말만 했는데, 나쁜 욕을 한 것도 아닌데 시어머니는 날 때리기 시작했다. 내가 방어하려고 하니까 시동생, 시아버지, 시어머니 무엇보다 남편까지 합세해 다같이 날 때리기 시작했다. 네 명이서.
집을 나가려고 하니까 그 사람들은 내 스카프를 뺏어 들었다. 이란이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자들은 머리에 쓰는 스카프 없이 밖에 돌아다닐 수가 없다. 난 그래도 그 사람들이 날 죽일까 봐 겁이 나서 집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스카프 없이 그냥 나와버렸다. 옷은 다 찢어지고 아무것도 못 가지고 그냥 나왔다. 옷은 다 찢어진 채 피 흘리면서. 얼굴에 피칠갑을 하고 있으니까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다 쳐다봤다.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친정 집 주소를 댔다. 기사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 나는 그냥 가라고, 빨리 여기서 벗어나달라고 했다. 시댁 사람들이 택시 쪽으로 날 쫓아오고 있었다. 남편은 “너네 집에 가서 죽여버릴 거야” 라고 고함치며 달려왔다.
※원문에 ‘scarf’라고만 쓰여 베일의 다양한 종류-부르카(burka), 니캅(niqab), 차도르(chador), 히잡(hijab) 등- 중에서 화자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불확실하다. 2017년 기준, 50여개 무슬림 국가 중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에서만 히잡 착용이 법적 강제이고, 나머지 국가들에서는 법규는 없으나 절반 이상의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베일을 쓴다고 알려져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탈레반 조직이 집권했던 시기(1997~2001)에 베일 중 가장 신체를 적게 드러내는 부르카 착용이 강제된 적이 있다. 따라서 화자의 ‘스카프 없이 다닐 수 없다’는 말은 법규가 아니라 종교적 관습적 차원의 강제를 의미한 것 같다.
그 꼴을 하고 가족들한테 가니까 이번에야 비로소 날 보며 그랬다. “우리 애한테 정말 큰일이 있구나.” 나는 지난 3년 내내 이 남자랑 못 산다고 해왔는데 가족들은 내 얼굴에 피를 보고야 겨우 깨달았다. “이게 3년 동안 내가 그렇게 얘기했던 거예요. 이혼은 죄라고 사람들이 뭐라 한다, 그 걱정만 하셨죠.” 그렇게 마침내 나는 이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알다시피, 이란에 사는 아프간 사람들한테는 공식적인 서류라는 게 없다. 그래서 결혼이나 이혼을 할 때 관청 같은 곳에 정식 신고를 못 한다. 대신 사람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아 뽑힌 사람 -이게 이란에 사는 아프간 사람들 문화다- 이 남자 어른이 남자 여자 사이에 앉아서 “지금부터 너희들은 아내와 남편이다” 라고 선언하면 결혼이 성립된다. 이혼도 마찬가지. 나도 전남편과 그런 식으로 결혼했다. 이혼할 때도 어떤 남자 어른이 “이 시간 이후로 너희들은 더 이상 아내와 남편이 아니다”라고 했다.
전남편의 폭력을 피해서, 위험천만한 국경 넘기
그런데 이혼한 뒤로 전남편은 우리 가족 집에 수시로 찾아와서 공식적인 이혼이 아니었으니 내가 계속 자기 아내라고, 집으로 안 돌아오면 죽여버릴 거라 협박했다. 내가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는 것도, 친정 집에 사는 것도 인정 안 할 거라면서. 그래서 몇 달 있다가 우리 가족은 이란으로 이사를 갔고 거기서도 주소를 두세 번 바꿨다. 그런데도 전남편은 어김없이 새 주소를 알아내서 계속 찾아왔다. 그 사람은 날 때리거나 우리 가족을 인질로 잡아가려 했다. 특히 내 남동생을 납치하기도 했다. 하루는 집으로 전화가 와서 전남편이 우리 남동생을 데리고 있다고, 내가 안 오면 동생을 죽이겠다고 했다. 난 할 수 없이 나갔고, 강간 당했다. 내가 더 이상 그 사람 아내도 아니고 섹스 따위 하고 싶지 않았는데 동생 때문에 갈 수 밖에 없었다.
다른 날은 길거리에서 마주쳤는데 그 사람이 친구 세 명을 데리고 우리 앞길을 막더니 날더러 자기랑 같이 돌아가자고 했다. 내가 우린 더 이상 부부가 아니다, 당신은 나를 잊어야 된다고 했는데 전혀 안 통했다. 그 사람은 계속 내가 자기 아내이고 영원히 그래야 한다고, 다른 남자랑 결혼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우린 이란을 떠나 아프가니스탄으로 갔는데, 전남편은 거기에도 또 나타났다. 곧바로는 아니고 대여섯 달 뒤였다. 공통으로 아는 친구를 통해 우리 주소를 알아내 우리 집에 찾아와서는, 이 부분이 진짜 중요한데, 이번엔 우리 아버지를 상대로 우겼다. 아버지가 제발 좀 그만하라고, 너흰 이혼했다고 하니까 전남편은 자기 친구들이랑 같이 아버지를 때리려고 했다. 난 어머니랑 위층에 있었다. 어머니는 그 사람이 날 죽이려 할까 봐 위층에 피해있게 했다. 난 어머니한테 내려가 보겠다고, 저 사람들이 아버지를 죽일지도 모르는데 내가 가서 도와야 된다고 했다. 내가 내려갔을 때 그 사람이 막 칼로 아버지를 찌르려고 해서 나는 중간에 끼어들어 날아오는 칼을 막았다. 칼이 여기 손목 부근에 박혔다. 전남편은 내가 피를 줄줄 흘리는걸 보고야 자리를 떴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아버지는 노르웨이에 있는 큰 오빠한테 전화를 걸어 우리가 지난 4년 동안 무슨 일을 당하고 살았는지, 내 전남편 때문에 바람 잘 날 없었다고 털어놨다. 큰 오빠는 가진 걸 다 처분하고 노르웨이로 오라고, 거기선 살기가 좀 낫지 않겠냐고 했다. 그렇게 해서 36년간 가족을 꾸려온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간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에서 일군 것들을 다 팔았다.
우린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란으로, 이란에서 터키, 터키에서 그리스, 그리스에서 노르웨이로 갔다. 이런 여정이 어떤 건지 사람들은 짐작이나 할까. 정말 위험천만하다. 터키에서 그리스로 갈 때, 우리가 탔던 보트는 정원초과였다. 32명이 작은 보트에 7시간을 끼어 있었다. 나는 도저히 못해낼 것 같다는 기분에 내내 시달렸다. 이런 말까지 해도 될 지 모르겠지만, 물이 정말 내 허리까지 차올라 있었다. 우린 해안 경비대에게 제발 도와달라 구조요청을 했다. 그런데 보트가 GPS로 위치파악이 안 되는 바다 한가운데, 특히나 위험 구역에 있어서 경비대가 4시간이나 수색 끝에 겨우 찾아냈다. 우리는 거기서 터키로 압송돼 3일동안 구치소에 수감됐다. 풀려나면서 받은 서류엔 1년 안에 터키를 떠나야 하고, 그 이후에 우리가 터키에 있다가 적발되면 아프가니스탄으로 강제 송환된다고 했다.
우린 그리스로 다시 가보려고 이스탄불에서 밀입국 브로커에게 연락했다. 브로커를 찾아가 재시도할 때는 서른 명쯤 되는 사람들이 전보다 더 작은 보트에 탔다. 이번엔 세 시간 만에 그리스 해안에 닿았다. 그리스 경찰이 우리를 체포해 지문을 체취하고 구금했다. 21일간 감옥에서 지내는 내내 200명 정도 되는 여자들이 샤워실 한 개짜리 작은 방에서 생활했다. 그 당시 풀려 날 때는 한 달 내에 그리스를 떠나라는 명령이 있었다. 아테네로 가는 티켓을 받았고, 아테네에서 도착해서는 네 가족이 아주 작은 방에서 한 달을 같이 살았다. 누울 공간이 없어서 잘 때도 바닥에 앉아서 잤다. 그러고 나서 다시 한번 밀입국 업자에게 돈을 쥐어주고 루마니아 여권을 위조해 아테네에서 노르웨이로 날아갔다. (※2편에서 이어집니다.)
[번역자 노트] 난민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꿈에서 나는 문 잠긴 집 안에서도 극도로 불안해한다. 외출을 두려워한다. 그러다 다음 순간 밖이 되면 영문도 모른 채 마구 달아난다. 악몽이 왜 시작되었는지 안다. 여성들이 잔인하고 집요한 폭력에 쫓기는 이야기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어 그렇다. 물리적 감각으로 어떤 사건을 직접 겪지 않아도, 이를 자세히 묘사한 텍스트나 이미지를 접하면 우리 뇌는 직접 경험이라고 착각을 하기도 한다. 바로 대리 외상(vicarious trauma)이다. 이 번역 프로젝트,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어떤 태도로, 어떤 마음으로 이 일을 대해야 할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끝까지 해볼 것이라는 것 외에는.
내게 ‘난민’은 그 동안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독재정권에 반발하다 고문 당하고 국경을 넘은 액티비스트. 유럽의 유대인 학살 때 미국으로 망명한 학자. 내전으로 아비규환이 된 도시에서 폭격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 분리독립을 외치다 학살 당한 소수민족 마을에서 온 청년. 앰네스티 뉴스레터가 구명을 호소하던 정치수감자. 이 얼굴들은 물론 여자일 수도 있고 실제로 그렇기도 했지만, 그간 내 앞에 놓인 것들은 늘 남자였다. ‘남자들이 벌인 지옥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남자들’이 내 안의 난민 서사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들의 얼굴은 이제야 거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여성들이 난민이 되는 동기와 과정에는 거대 정치의 폭력뿐 아니라 결혼과 가족, 마을공동체와 같은 일상적 공간에서 벌어진 싸움이 있음을 생생히 깨닫기도 했다. 이번 이야기의 난민 여성은 아버지 대신 칼을 맞고 피 흘린 전사였다. 스토킹, 폭행, 학대, 강간, 납치… 죄목은 많은데 조치는 없는 치외법권에서 싸운 전사였다. 날아오는 칼과 주먹, 고통과 치욕을 버티는 싸움. 여성혐오와 차별을 깊숙이 내재화한 방관자들을 설득하는 싸움. 사나운 파도와 비좁은 감옥과 진 빠지는 기다림에 맞선 싸움. 그녀는 이 싸움들에서 모두 살아남아 지금 이 순간 우리와 같이 숨쉬고 있다. 내 악몽은 차라리 다행이다. 그녀에겐 악몽이 지극히 현실이었다.
한편, 나는 번역 작업이 한창이던 베를린 행 기차에서 작은 재난을 겪기도 했다. 독일 중부 지역에 상륙한 큰 태풍 때문에 수백 대의 기차들이 가다 서고, 가려다 말았다. 내가 타고 있던 기차는 프랑크푸르트 인근에 오래 정차해 있었고, 혼란의 공기가 서서히 퍼져나갔다. 오후 3시쯤엔 안락을 택할 기회가 잠시 있었다. 망설임은 잠깐, 나는 그 불편과 불안을 하나의 의식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난민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의식. 그 수난시대에 아주 작은 한 발짝이라도 다가가는 의식. 좁고 불편한 공간에서 밤을 꼬박 지새우는 것.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것. 갈 곳 없이 표류하는 잉여체가 되는 것. 형편없는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 낯선 사람들과 실없는 위로의 말을 주고받는 것. 눈꺼풀이 무겁게 닫혀도 마음 놓고 잠들 수 없는 것. 이쯤은 내가 할 수 있었고, 해야 했다.
[필자 소개] 하리타(정세연)- 젠더, 이주, 섹슈얼리티, 지속가능성을 분야에서 활동하는 작가, 저널리스트, 액티비스트이다. 2014년 독일로 이주해 환경 거버넌스 석사과정을 밟았고, 남부 도시 프라이부르크에 산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ildaro.com)’에 번역 프로젝트 <우리 자신의 언어로 - 독일 난민 여성들의 말하기>와 인터뷰 시리즈 <하리타의 월경 만남>을 연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성폭력 트라우마 치유 경험과 섹슈얼리티 해방의 여정을 기록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 - 더 자유로운 페미니즘을 위하여>(2017, 동녁)가 있다. 하리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초록’이라는 뜻이다. facebook.com/haritamoonrider
본 기고글은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에 최초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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