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센으로 보내는 편지
8기 인턴 이가람
안녕하세요 난센! 난센에서 활동한지 어느덧 2년이 지났네요. 난센에서의 6개월간의 활동은 저의 눈과 마음을 활짝 열어 줄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었어요. 그 밑거름을 통해 오늘의 저는 이곳 짐바브웨에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브릿지 프로젝트 3기 활동가로서 파견될 수 있었답니다.
#1 브릿지 활동가 계기
난센에서 활동하게 된 계기가 난민에 대한 불평등 및 인권침해였다면, 브릿지 활동가로서의 활동 계기는 더 넓은 범주의 인권과 교육 불평등에 대한 관심이었어요. 지속적으로 난민분야에서 활동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더 넓은 분야를 경험해보고 싶었거든요. 무엇보다 아프리카의 한 마을에서 생활하면서 마을 주민들을 직접 만나 소통해보고, 주민들에 의한 프로젝트를 함께 꾸려나가보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2 교육
문해란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상태 또는 수학에서 사칙연산을 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해요. 난센에서 아프리카에서 온 난민들을 인터뷰 할 때면 대부분이 생년월일을 모르고, 자신의 나이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어요. 이러한 비문해 난민들은 문해 난민들보다 출입국으로부터 난민 지위 취득에 불리해요. 자신의 박해 사실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교육을 받은 난민들의 설득력은 교육을 받지 못한 난민들보다 더 높거든요. 이런 사실은 다들 알고 계실 것 같아요.
직접 이곳 짐바브웨 돔보샤와에 와보니 실제로 비문해자가 매우 많았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에 비해 현지인들의 교육 인식은 낮은 편이에요. 초등교육 후 중등교육으로의 진학률이 현저히 떨어지며, 고등교육을 배우고자 하는 청소년들의 의지는 더더욱 낮은 상황이지요. 심지어 초등교육을 받아야 할 어린이들이 학교에 가기보단 집안일을 하거나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는 경우가 많아요. 또는 집에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싶어도 학비가 없어 보낼 수가 없는 경우도 있고요. 한국에서는 중등교육까지 무료로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이곳에서는 학비를 내야 하거든요. 한 학기당 초등 교육은 미화 30불, 중등 교육은 35불이에요. 이러한 요인으로 인해 비문해자가 많은 편이고 평균 교육 수준이 중등교육에도 못 미치고 있어요.
이러한 비문해자로서의 생활고는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저희 센터에 찾아오시는 할아버지의 예를 들면, 농사를 지을 비료를 살 때 비료 포장지에 적힌 내용을 읽을 줄 몰라 엉뚱한 비료를 사거나, 사칙연산을 못해 비료가게 주인으로부터 사기를 당하는 경우도 있어요. 은행이나 병원에 갔을 때도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쓰는지 몰라 간단한 체크 표시로 사인을 했다고 해요. 그뿐인가요, 주변 사람들이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대화를 할 때 자신을 얕보고, 흉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고 해요. 젊은이들의 경우 취업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에요. 교육을 받아도 취업을 하기가 어려운데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길거리에서 맥주를 마시며 시간을 때우는 식이에요. 결국 할 일이 없어 도둑질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려는 사람들도 생겨나고요. 책에서나 읽던 아프리카의 보편적인 내용들을 직접 현장에 와서 겪어보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를 좀 더 마을 주민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면서 고민하게 되었어요.
#2 경제활동
아프리카의 물가를 생각했을 때, 물가가 낮을 것 같나요 아니면 높을 것 같나요? 물론 물가가 낮은 곳도 있지만, 이곳 짐바브웨는 물가가 높은 편이에요. 지난 2008년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많이 올랐고, 이는 아직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2008년 당시 1조원의 지폐가 발행되기도 했답니다.) 우리나라의 물가보다 조금 더 낮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보통 공무원들의 월급은 미화 250불(한화 약 30만원)이에요. 제가 보통 이곳에서 한 달에 사용하는 활동비는 약 600불 정도에요. 물론 현지인들보다 경제활동의 범위가 넓긴 하겠지만, 물가에 비해 현지인들의 월급이 낮은 편인 거죠. 하지만, 돔보샤와 지역 주민들에게는 공무원 월급인 250불도 감지덕지한 금액이에요. 높은 실업률로 인해 직업이 없는 사람들과 250불 이하의 월급으로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거든요. 하루 평균 2불로 살아가고 있는 마을 주민들에게는 5불조차 큰돈이에요.
이런 마을 주민들에게 소득증대활동을 스스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저희 돔보샤와 지역학습센터에서는 세제만들기 워크숍을 열었어요. 워크숍에서는 성인문해교실 학생들을 중심으로 세제 만드는 기술을 전수하는 자리를 가졌답니다. 이를 통해
주민들이 스스로 세제를 만들고, 판매하여 이익을 계산하고, 또 다른 세재 재료를 구입하는 등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됐어요. 단순히 세제를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동기부여가 되었고, 주민들은 삶을 살아가는 기술을 얻게 됐죠. 워크숍에서 보았던 어르신들의 말똥말똥한 눈을 잊지 못해요. 그리고, 어르신들이 스스로 세제를 만들 때 보여주신 그 활기찬 모습 또한 잊지 못할 거에요.
반면 돈에 관련한 안타까운 사건도 있었어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브릿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가 활동하고 있는 돔보샤와 지역학습센터에는 두 명의 교사가 있어요. 작년부터 저희 사무국에서 이 두 명의 교사들에게 한 달에 100불씩 생활지원비를 지급하고 있답니다. 약 10만원을 가지고 한 달을 살아가는 교사들은 100불이라도 받는 것에 감사하고 있는 실정이에요. 그런데 이런 교사들의 월급을 협력기관 직원들이 가로채버렸어요. 이 사실을 들었을 때 매우 화가 났었어요. 왜냐면 협력기관 직원들은 교사들이 얼마나 힘든 생활을 하는지 뻔히 알고 있었고, 현장에서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도 그들이 그런 비도덕인 행동을 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알아둬야 할 것은 이 현장에서 돈을 떼먹고, 사기를 치고, 뒤통수를 치는 일이 흔하다는 것이에요. 도덕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 당사자의 잘못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책임과 잘못을 그 사람에게 돌릴 수는 없어요. 협력직원들조차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거든요.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는 이 나라 사회에도 책임이 있고, 이미 개발협력사업의 일환이라며 먼저 돈을 건넨 도너에게도 책임이 있어요. 모든 탓을 협력기관에게 돌릴 수 없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차라리 모든 책임을 협력기관에 돌릴 수 있는 현실이었다면 더 나았겠죠.
#3 생활모습
저는 지금 지난 2기 활동가가 살았던 가정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며 생활하고 있어요. 홈스테이 마마가 개인병원 의사인지라 넉넉한 가정집에서 덜 불편하게 생활 할 수 있게 됐지요. 다른 주변 가정집과는 달리 밤에는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사용할 수 있고, 보홀과 워터탭이 설치되어 있어 언제든 물을 편하게 쓸 수 있답니다. 게다가 홈스테이 가족이 모두 좋은 사람들인지라 외국인으로서 외롭게 지내기보다는 시끌벅적한 가정 속에서 가족의 일원으로서 지내고 있답니다.
친척들이 가까이 주거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어요. 대가족인 가정도 있고 핵가족인 가정도 있지만, 한국보다 그리고 수도에 비해 대가족이 많은 편이에요. 아프리카는 본래 부족사회라서 가족 간의 결속력이 강한 편이에요. 예를 들면 다른 지역에 있는 친척들이 우리 집에 와서 몇 달 간 생활을 하는 것이 절대 민폐를 끼치는 일이 아니라 굉장히 평범한 일이에요. 한국에서는 친척 집에서 머물면 괜히 스스로 눈치 보이고, 또는 친척이 눈치를 주는 경우가 있지만, 이곳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가족 간의 포용력이 강하답니다. 이들은 가족 간의 포옹력뿐만 아니라 이웃이나 타인 간의 결속력도 한국보다 더욱 강한 것 같아요. 저는 이곳에서 개인차를 사용하지 않고 대중교통인 콤비(현지 버스)를 이용하고 있어요. 콤비를 이용하다보면 현지인들이 타인에게 얼마나 상냥한지 알 수 있어요. 한 어머니가 아이들 두 명 이상을 데리고 타면 콤비 안에 앉아 있던 사람은 아이들 받아 자기 무릎에 앉혀서 함께 가고 또 어머니는 스스럼없이 아이를 모르는 사람에게 건네면서 도움을 받아요. 삭막한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지요. 뿐만 아니라 짐이 많을 때면 콤비 안에 있는 사람이 짐을 받아 자기 무릎에 얹고 가는 광경도 흔해요.
콤비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지내다 보면 한국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을 겪을 때가 많아요. 이들은 부탁을 하지 않았는데도 매우 자연스럽게 이웃의 일을 도와주곤 해요. 예를 들면 저희 집에 루도와 타피와라는 친구가 있는데 제가 이웃집 마당에 앉아 이웃 분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루도와 타피와가 제가 있는 곳으로 와 얘기를 하다가 정말 자연스럽게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오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하는 거에요. 물을 긷는 곳이 가까운 것도 아닌데, 심지어 20L짜리 버켓을 3~4개를 가지고 말이에요. 저는 20L짜리 버켓 하나도 혼자서 못 들거든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웃을 도와주려는 태도가 몸에 자연스럽게 배어있어서 깜짝 놀랄 때가 종종 있었답니다.
또 한 가지 인상 깊은 문화 중에 하나는 바로 ‘인사’문화에요. 마을 길거리를 거닐다 보면 마주치는 사람 대부분에게 인사를 건네는 주민들의 모습을 보곤 해요. 그리고 저에게 항상 인사를 건네주세요. 특히 같이 일하는 교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으면 항상 어르신들에게는 꼭 인사를 건네며 안부를 묻고, 건강한지 묻는 모습을 흔히 몰 수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잘 지내세요?’ 또는 ‘어떻게 지내세요?’라는 안부 인사를 서로 한 번씩 주고받으면 땡이지만, 이곳에서는 안부 인사를 다른 방식으로 몇 번을 반복해서 물어봐요.
Mamuka sei/Maswera sei (오전/오후인사)를 제일 처음 물으면 그 다음으로 Kuri sei kumba(집은 어때요?)라고 묻죠. 또는 Zvrisei(영어로 how is it, 어떠세요)를 물으면 그 다음으로 Maka simba here?(Are you strong enough? 건강하세요?)을 물어요. 한 마디로 안부인사 절차가 길다고 할 수 있어요.
이런 긴 안부인사를 하다보면 제가 마을의 한 인원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뿌듯하고, 마을의 한 인원으로 받아주시는 주민들에게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인사는 ‘Makasimba here?(마카심바 예레?)’에요. 충분히 건강하고 튼튼한지를 묻는 인사에요. 한국에서 지인들에게 건강한지 안부를 묻는 것과 비슷하지만, 더욱 자주 사용하는 안부 인사죠. 흔히 사용하는 만큼 마을 주민들은 건강이 안 좋으신 분들이 많아요. 그리고 그만큼 주민들은 서로 인사를 건네며 건강한지 확인을 한답니다. 그래서 그런지 주민분들이 저에게 makasimba here? 라고 물어봐 주시면 저를 더욱 신경써주시는 것 같은 느낌에 마음이 따듯해져요. 어느 순간부터는 주민들에게 이런 인사를 건네고 있는 저를 발견 할 수 있었어요.
이런 마음 따듯한 문화를 다 뒤로 한 채, 제 인생에서 가장 패닉에 빠진 날이 있었어요. 바로 난생 처음 쥐를 만난 날이었죠. 그 당시 제 방문이 아직 달려 있지 않은 상태였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피곤한 몸을 눕히고 곤히 잠들었죠. 그런데, 갑자기 집 어디선가 우렁찬 ‘찍찍’ 소리가 들려와 눈이 확 뜨였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어요. 그러더니 아니나 다를까 쥐가 제 방으로 들어왔고, 제 침대 밑에서 재빠른 발로 돌아다니는 게 아니겠어요. 정말 예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져서 무섭기만 했어요. 다음 날 이 얘기를 가족들에게 하는데 쥐를 무서워하는 저를 보며 피식 웃어버리더군요. 그만큼 이곳 사람들은 쥐가 집에서 같이 사는 것이 일상생활이었던 거죠.. 그리고, 9개월이 지나 저에게도 또한 처음과 달리 쥐와 함께 사는 것이 일상생활이 되었어요. 지금도 방 밖에서 찍찍거리며 집을 신나게 돌아다니는 쥐 소리가 나고 있어요. 물론, 100% 공포를 극복하진 못했지만, 처음보다 훨씬 마음이 편해졌어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9개월간 시골에서, 그리고 현지인 가족들과 살아가면서, 짐바브웨 쇼나족 문화를 하나하나 알아가고 있고, 이들에게 동화된 것 같아요. 요리를 하는 방식, 집을 청소하는 방식, 인사하는 방식 등등 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제 몸에 많이 익숙해지고, 이들과 많이 친근해졌죠. 그러던 중 하루는 대사관저에 초대되어 한인 분들과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었어요.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현지인들이 하는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들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게 되었어요. 주제는 자원을 낭비하는 현지인들의 행동이었어요. 우리 한국인들과는 달리 현지인들은 세제를 듬뿍 써서 일주일도 안 가 세제를 다 써버리곤 해요. 또한 정전이 그렇게 잦은 이곳에서 전기가 있을 때면, 전기를 밤새 틀고 자고 꺼도 되는 불을 켜놓는 등 낭비를 하기도 하고요. 물 또한 마찬가지에요. 저 또한 이 점은 현지 가족들과 살아가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긴 해요. 하지만 제가 한인들의 대화 속에서 불편했던 점은 한인들이 스스로를 현지인들보다 ‘우월하게’ 생각하는 것이었어요. 현지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한다던가, 무조건 우월한 우리가 현지인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불편했던 것이죠. 현지 가족들과 살아가고, 현지인들로부터 배우기 위해 이곳에 온 브릿지 활동가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점이었어요. 이러한 인식은 수여국과 수혜국 사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국제기구 또는 국제 NGO와 현지에서 직접적으로 혜택을 받는 NGO 사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요. 저에게는 이런 태도가 선진국과 개도국으로서 선명한 선이 그어지는, 우월한 자들이 열등한 자들을 보는 인식이자 태도로 느껴졌어요. ‘교육’을 많이 받은 선진국들이 저급하고 교육도 받지 못한 ‘개도국’ 보다 아는 것이 더 많으니 무조건 적으로 따라오라고 하며 알게 모르게 선진국 문화를 주입시키고, 원조를 모습과 이에 알게 모르게 피해를 보는 수혜국의 모습이 그려졌어요. 현지인들은 현지인들만의 살아온 방식과 문화가 있어요. 자원을 낭비한다거나 개선해야 할 점이 있다면 이들을 무조건 가르친다는 우월한 시각에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왜 이들이 낭비를 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은 무엇인지, 그들의 문화를 충분히 알아가면서 동등한 시각에서 함께 개선해나가야 해요.
#4 마무리
약 2개월이라는 활동기간이 남아있어요. 난센에서의 활동이 밑거름이 되어 지금 브릿지 활동가가 될 수 있었다면, 지금의 밑거름은 저를 또 어떤 사람으로 발전하게 해줄까라는 생각을 문득 하곤 해요. 아직 다음 계획을 모르겠어요. 많은 고민이 들어요. 다만 예전에는 몰랐던 하루하루의 중요성을 깨달아가고 있어요. 오늘 하루가 내일을 만들어 나가듯, 오늘 하루에 최선을 다하면 다음 단계는 자연스레 제 앞에 놓여 질 거라 믿어요. 확실한 건, 난민분야도 그렇고, 이 교육 분야도 그렇듯 불평등이 있는 현장에서 활동가로서 함께 삶을 공유하고 나누고 싶어요.
'활동 Activities > 활동가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3기 인턴 모요셉 & 황인형을 소개합니다! (0) | 2015.01.05 |
---|---|
사법연수원생 자원봉사활동 후기 (0) | 2014.12.28 |
난센, 12월 일상 (0) | 2014.12.23 |
11월, 난센 활동가 이야기 (0) | 2014.12.03 |
난센, 11월 일상 (0) | 2014.1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