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돌프 아이히만



그는 성실한 생활인이었다. 언제나 지각 없이 정시에 출근했으며, 근면성실하게 업무에 임했다. 가정에서는 부족할 것 없는 아버지였으며, 자녀들에게도 언제나 상냥했다. 그는 좋은 아버지였다.


하지만 그는 이후 전범재판을 받았다.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는 아르헨티나에서 은신하며 노년을 보내던 그를 납치해 공개재판 후 처형해 버렸다. 아니, 그 성실한 아버지가 왜 그런 무시무시한 종말을 맞이해야 했을까? 바로 그 '근면성실한 업무' 때문이었다. 


그는 나치당원이었다. 히틀러의 친위대 SS 중령으로서, 유태인의 등급을 분류하고, 그들을 '어떻게 최종 처리할지'에 대해 실무책임을 맡은 사람이었다. 그의 손끝에서 나오는 사인에 따라 유태인은 가스실로 갔다. 그의 근면성실한 업무는 결국 최악의 결과를 유도했다. 사람은 그 손끝으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중대한 결과를 유발한다. 그러나 그 손끝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뇌'다. 그의 '근면성실한 손끝'은 결국 뇌를 잘못 만나, 최소한의 선악에 대한 판단조차 하지 못한 채, 수만 이상의 사람들의 목숨을 끊은 것이다.


아돌프 아이히만, 그는 이렇게 변명했다.


"오직 명령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했을 뿐이며, 그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도 똑같을 수 있을까? 우리의 '아돌프 아이히만' 고문기술자 이근안 전 경감은 2010년 2월 한 주간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난 철저히 ‘상명하복’ 원칙을 지켰고 조직을 위해 '십자가'를 졌다."


"내 경우엔 시대가 나를 죄인, 역적으로 만들었다. 과거와 현재의 잣대는 분명히 다르다. 유신정권 시절의 '애국'이 지금은 천인공노할 죄가 된 걸 보면 모르겠나."


그는 자신의 근면성실함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니다. 굳이 기술자라는 호칭을 붙여야 한다면 '심문 기술자'가 맞을 것 같다. 논리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이와 이를 깨려는 수사관은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인다. 속된 말로 '선수끼리'의 대결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심문도 하나의 '예술'이다. 비록 나는 그 예술을 아름답게 장식하지 못했지만."


이 얼마나 근면성실한 태도란 말인가. 그의 인터뷰 기사 <'고문기술자' 이근안 직격토로 1탄>과 <'고문기술자' 이근안 직격토로 2>을 각각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그는 미친 사람이 아니었다. 지극히 정상적이고 멀쩡하다.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한 확신이 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대로, 손끝을 움직이는 뇌를 잘못 만난 것이다. 한나 아렌트의 말대로 악의 평범함이자, '무지야말로 가장 큰 죄'였던 것이다.



#2. 마녀사냥


영화 <남영동 1985>에서 대공분실 수사관들과 고문기술자 이두한은 시종일관 김종태를 고문한다. 형제들이 월북했다는 이유로 그를 '빨갱이'로 낙인찍는다. 사람은 트라우마에 따라 제각각 다른 선택을 한다는 것도 알 수 있는 상황이다. 월북한 아버지로 인해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낸데다가 법관의 꿈을 접은 뒤, 반공작가로 거듭나기를 선택한 사람도 있지만, 민주화의 길을 걸은 김종태도 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표면이었다. 가족과의 관계란 천차만별이며 충분한 내재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기본적 사고조차 망각하고, 단지 형제들이 월북했다는 표면만을 강조한다. "스스로 빨갱이임을 자백하라"고 '주리를 트는가' 하면, 거물급 야당 정치인들이 그 수괴임을 밝히라고 '조지기도' 한다. 


'주리를 틀기도 하고 조지기도 하는' 그들은 철저한 '아이히만'이다. 스스로를 사장, 전무, 과장 등으로 호칭하는 그들. 각각 애인과의 이별을 걱정하고, 승진에 목을 매기도 하며, 그저 자리만 지키면 된다는 무사안일에 빠지기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평범한 사람들이 무미건조한 관료제에 폭압이라는 요소가 가미될 경우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저 중요한 것은 "위에서 지시한대로", 아이히만과 이근안의 생활태도이자 처세였다.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 영원할 수 있는 이유다. 미셸 푸코는 극단적인 사실주의를 취한다. <남영동 1985>는 故 김근태 전 의원의 수기에 미셸 <감시와 처벌>을 덧입혔다. 중세시대, 타락한 가톨릭 권력은 반대파를 마녀로 몰아 화형한다. 그 이전에 신체적 고문과 폭력, 무너지는 사람의 정신, 그 과정에서 맛볼 굴욕,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김종태는 고문 속에서 혼미해지는 가운데, 아내의 환영과 스스로의 환영을 맞이한다. 환영들은 말한다. 


"넌 최선을 다 했어. 어쩔 수 없었어."


그렇다.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혔다는 그 수치심, 그리고 거짓을 말하고 동료들의 이름을 엉뚱하게 불었다는 그 자괴감 등은 영원할 것이다. 사람이란, 그렇듯 정신적 상처와 악몽으로부터 입는 타격이 더 큰 법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다. 



#3. Safe House


<감시와 처벌> 초반, 가톨릭 권력의 마녀사냥을 극단적 사실주의로 묘사한 근거 중 하나는 바로 권력의 속성에 대한 묘사였다. 마녀사냥이란, 결국 획일화의 강조다. 또한 독재의 필수다. 반대파를 처벌하며, 자신이 원하는 획일화를 강조하기 가장 좋은 수단이다. 독재에 '감시와 처벌'이 필연적인 이유, 그리고 저토록 '오로지 명령만이 중요한' 세계 곳곳의 아이히만과 이두한을 꼭 필요로 한다.


소위 '빙고호텔'로 통했던 보안사 서빙고분실, 그리고 <남영동1985>의 무대 경찰 남영동 대궁분실은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간다에는 Safe House라는 것이 존재한다. Safe House, 재미있는 이름이다. 왜일까? 독재자들의 케케묵은 상상력은 세계 어디를 가든 똑같기 때문이다. 우리도 저 독재의 시대에 반대파를 끌고가 고문하던 곳을 안가(安家)라고 하지 않았나.





여기, 우간다에도 어느 김종태가 있었다. 높은 물가와 생활고 때문에 시위가 발생했고, 이를 비판하는 야당을 지지했던 그 '어느 김종태'는 시위에 가담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참여자들이 그렇듯, 그는 평범한 생활인이었다. 하지만 그 시위참여에 이어 체포된 뒤 그는 평생에 남을 상처를 가슴에 남긴다.


고문은 극심한 신체적 고통의 유발과 함께 정신적 모멸감과 수치 등을 심어줌으로써 사람의 이성과 판단력을 무너뜨리는 도구다. 단지 시위에 참여했을 뿐인 그 '어느 김종태'는 엄청난 구타와 성고문, 그외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한 뒤 엉뚱한 질문을 받는다. 이것조차 비슷하다. 그들은 이렇게 물었다.


"너 반란군이지?" 

"너 총 가지고 있지?"


YWCA 위장결혼식 사건 당시, 어느 시위참여자는 "시위자금은 김대중이 지원했고, 이북의 사주를 받은 것 맞지?"라는 질문을 지속적으로 강요당한다. 미셸 푸코는 옳았다. 그들의 질문은 듣고자 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정해진 답을 강요하기 위한 예정된 질문이다. 어쩌면 이렇게도 똑같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꽉 막힌 상상력을 향하여, 반항의 건배를.


우간다의 어느 김종태는 거액의 돈을 들인 후에야 6개월 간의 고문 행렬을 뒤로 한 채 풀려날 수 있었다. 그가 숨어 사는 동안, 그의 어머니도 경찰에 연행돼 조사를 받았고,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 우간다의 어느 김종태는 가족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우간다를 빠져나와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2012년 어느날, 그는 한국 정부에 난민지위를 신청했다. 



#4. 인간의 한걸음


故 김근태 의원이 겪었던 남영동 대공분실의 진실은,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로 대규모 민주화시위가 전개돼 봄이 찾아오면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세상이 달라지니 입장 또한 바뀌었다. 스스로를 애국지사로 여겼던 이근안  前 경감은 교도소에 가는 신세가 됐다. 故 김근태는 그렇게 그날의 진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안다는 것은, 결국 진실을 찾아가는 힘임을 故 김근태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우간다의 '어느 김종태'에게, 우간다에서 그런 진실을 찾기란 힘든 상황이었다. 우간다의 요웨리 카쿠타 무세베니 대통령은 만 26년째 대통령직을 유지하며 독재를 하고 있다. 야당 활동은 여전한 금기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의견을 표현하다가 감옥에 가거나 Safe House로 끌려간다. 


어디서 많이 본 상황 같지 않던가? 멀리 갈 것 없이 그것은 우리의 과거였다. 우간다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조국 우간다에서 살아갈 수 없었던 '어느 김종태'는 한국으로 왔다. 그는 난민이다. 정치적 의견을 표현하며 참정권을 행사하는 시민의 정당한 의무와 권리를 행사하려다가 부당하고도 잔인한 고문을 당했고, 더이상 우간다에서 살기 힘든 상황에 처했다. 한국행은 그에게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에 왔다.


난민은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와 무관한 존재도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옆에 있다. 우간다의 '어느 김종태'는 그렇게 우리 옆에서 손을 내밀었다. 과연 우리는 그의 손길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2012년 어느날 난민지위를 신청한 우간다의 그 김종태, 과연 한국 정부는 어떻게 대답할까?





(박형준 활동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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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난민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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