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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탈과 박탈: 방글라데시 치타공 산악 지대에 줌머인들에게 존재하는 위협


 

 

강탈과 박탈: 방글라데시 치타공 산악 지대에 줌머인들에게 존재하는 위협

-라비상카르 차크마

서문:

방글라데시의 서남쪽 지역에 위치한 치타공 산악 지대(Chittagong Hill Tracts)는 소위 줌머인으로 알려진 11개의 소수민족의 삶의 터전이다. 100만명 남짓의 인구와 5093 평방 마일의 크기인 치타공 산악 지대는 18세기 영국의 식민지화 이전에는 독립된 영토로 있었다.

 

        식민지 시대 이전에 치타공 산악 지대는 비록 북쪽의 트리푸라”, 남쪽의 아라칸그리고 서쪽의 벵골부족들에 의해서 실권 탈환의 장이 되었지만 그 어떤 국가에 예속되지 않았습니다.[1]

 

영국 지배자들 조차도 줌머인들이 그들의 독립권을 유지한다고 알고 있었다.

 

        1829년 위원장 할헤드 경은 산악 지대 부족들은 영국의 관할권이 아니며 부족사회 그 자체에 종속하며 영국이 그들만의 협정에 간섭할 권한이 없다.[2]

 

치타공의 라자(/족장)들은 자신들의 주권에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했고 행정, 관리, 입법 장치가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단순한 정부와 함께 외부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상비군을 갖고 있지 않았다.

 

줌머인들의 강탈과 박탈

 

줌머인들의 인권과 그들의 토지 강탈 문제는 영국 식민지 시대 때부터 서서히 시작되었다. “1900 조약의 공표는 토착인들의 영토 소유권 문제의 첫 시작이었다.”[3] 영국 이후로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기득층들이 이 과정을 따랐다.

 

영국 시대

줌머인들은 1776년 이후로 12년 이상 그들의 독립과 자주 주권을 지키기 위해 영국의 공격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1787 2월에 분쟁을 끝내기 위해 양측간에 정식조약을 체결했다. 그 조약은 치타공 산악 지대 라자(/족장)들이 그들의 지역을 통치할 수 있는 권리를 영국이 인정하는 것이었다.[4] 그러나 그 후 영국은 조약을 위반했고 1860년에 CHT왕국에서 지역으로 격하시킴으로 지역을 일반 영토들에 합병 시켰다.

 

1870년 영국 총독부는 CHT 전역의 여러 지역을 삼림보호지역을 지정하기 시작하면서 그 지역에서 화전을 금지시켰다.[5] 영국은 CHT에서 목재 산업을 독점하고 유럽 농장 사업가에게 질 좋은 산림지역을 주었다.

 

           , 커피 그리고 오렌지 재배는 1860년대에 시작되었고 티크나무 재배는 1870년대에 시작되었다. 1860년대 중반에 50,000큐빅 피트의 나무가 CHT에서 벌목되었다. 정부는 7만 루피의 이득을 삼림보호지역에서의 벌목과 티크나무재배로 획득했다.

 

비록 영국은 라자(/족장)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CHT에 제국적 그리고 경제적 이득을 굳히려고 했지만 줌머인들의 토착 영토를 인정해주었고 그들만의 내부적인 일들에 개입하지를 않았다. 줌머인들은 영국 식민지 시대에 많은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6]

 

파키스탄 시대

그러나 파키스탄 시대(1947-1971)동안 줌머인들은 그들의 많은 권리들이 박탈당하는 것을 보았다. 

1881년의 치타공 산악지대 경찰제가 폐지되면서 산악지역 인들의 경찰제가 사라졌다. 영국은 CHT를 배타지역(외부의 세력이 들어오지 못하는 지역)으로 지정하였으나 파키스탄 정부는 이 결정을 취소하고 CHT부족지역으로 선포하였다. 줌머인들은 1960년대 파키스탄 정부가 전기발전소를 위해 캅타이에 있는 카르나풀리 강에 댐을 지을 때 40 퍼센트의 최상급 경작지를 잃었다.  이 수력발전소는 100,000명의 사람들을 지역에서 쫓아내었고 줌머인들의 문화, 정치 그리고 경제

적 삶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방글라데시 시대

1971년 방글라데시는 하나의 독립국이 되었고 그 지배세력은 치타공 산악 지대를 장악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를 신속하게 취하기 시작했다. 방글라데시 시대는 줌머인들에게 가장 끔찍한 시대이다. 방글라데시의 독립 직후 5만 명의 방글라데시 이주민들이 CHT 람가르 지역으로 유입되었다. 1979년 치타공 산악 지대 관리지침 제34항 수정조항을 통해서 정부는 CHT로 정착하려는 외부 이주자들에 대한 제약을 폐지하였다. 1979년과 1983년 사이에 대략 40만 명의 방글라데시인들이 국가 주도의 이주 계획을 통해 CHT로 옮겨 갔다. 이 이주자들을 위해 정부는 정부군의 3분의 1을 배치하였고 그 결과 CHT는 지구상에서 가장 군대가 밀집한 지역이 되었고 줌머 거주민들을 그들의 땅에 수감되었다. 이는 CHT에 거대한 영향을 주었다. 새로운 이주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레벤수람 지역을 차지하려고 정부는 큰 폭력을 행사해야 했다; 1980년 이후 12 차례 이상의 대량학살이 자행되었고 학살은 CHT의 비옥한 북쪽지역과 중앙지역에서 일어났고 여기서 몇 천명의 줌머인들이 죽었다. 이것은 또한 수천 명의 난민을 발생시켰다. 이주정착자들은 줌머인들의 집, 농장, 과수원, 촌락, , 화전과 사원을 차지했다. 1947년 인도가 분열될 당시 CHT 인구의 3% 이하가 방글라데시인이었는데 이제 그들은 48%를 차지한다.

 

1972년 마노벤라 나라얀 라르마(Manobendra Narayan Larma)가 이끄는 줌머 지도자 대표단은 독립한 방글라데시의 첫 수상인 세이크 무지부르 라하만(Sheikh Mujibur Rahaman)을 만나 CHT 지역의 자치를 요구하였다. 마노벤라 나라얀 라르마는 방글라데시 의회의 CHT 의원이었으며 Parbatya Chattagram JanaSamahti Samity 이하 PCJSS(치타공산악지대 민주 연합)운동을 창설한 사람이다. 세이크 수상은 자치각서를 던져버리면서 대표단에게 당신들의 민족 정체성을 버리고 방글라데시인이 되라고 했다.

 

1972 11 4일에 재정되었고 같은 해 12 16일에 실시된 방글라데시 헌법은 줌머인들의 지역정체성과 권리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초대 헌법 제6조에 따르면 방글라데시의 모든 시민은 벵골인으로 규정되었다. (후에 이 조항은 벵골인을 방글라데시인으로 표현을 바꾸어 수정되었다.) 줌머인들의 여론을 대변해서 M. N. Larma는 헌법을 승인하기를 거부하고 항의의 뜻으로 국회에서 최장했다.

 

1975 8월 시크 무지부르 라만의 암살 이후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운동의 가능성이 모두 봉쇄되자 줌머인들은 무기를 들고 그들의 자결권을 지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새롭게 각성된 줌머 사회의 중산층이 주도하는 것으로 근본적인 취약성을 갖고 있었고 몇 차례의 좌절을 겪으면서 정부와 1997년 협정을 체결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 협정은 줌마인들의 관습적인 토지법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많은 결함과 제약을 갖고 있었다. 그 때문에 협정은 CHT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없었다.

 

줌머 난민과 국내 난민들의 송환 문제

민족 말살의 정책의 일환으로 국가 주도 폭력이 다시 시작되어 많은 수의 줌머인들이 난민으로 전락했고 6만 명이 1980년대 중반 이후 인도 트리푸라주(Tripura)에서 난민으로 살아가야 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들 국제 줌머 난민들은 널리 알려진 치타공 산악지대 합의가 서명되고서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송환 줌머 난민의 상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그들의 송환 이후 여러 폭력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 중에는 괴롭히는 것에서부터 살인까지 있고 이 사건들은 방글라데시 이주자들과 영토를 놓고 다투는 분쟁에서 시작되었다. 1999 8월에 카그라차리에 있는 100명의 난민 송화자들로부터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96%의 응답자들은 인도로 도망간 이유는 군사적 위협 때문이었다고 했고 나머지 4%는 군대와 SB사이의 전쟁 때문이라고 했다. 게다가 92퍼센트는 여전히 상황은 불확실하고 불안정하다고 생각했다; 8퍼센트는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고 했다. 아무도 상황이 호전되었다고 하지 않았다.[7]

 

공식적으로 64,609의 난민(12,222가구)이 방글라데시 정부와 20 point package deal을 체결하고 인도에서 돌아왔다. 그 후로 11년 이상이 지났지만 아직 그들의 땅에 그들이 완전히 재정착하지 못했을 뿐 더러 조약의 모든 부분이 적용되지 못했다. 2009 7 20 Chittagong Hill Tracts Affairs Parliamentary Standing Committee로 난민 지도자들이 제출한 메모랜덤에는 inter alia(송환 줌머 난민의 안전과 보호)관련 내용이 있었다. 난민지도자들은 조약대로 정부는 땅이 없는 송환 가족들에게 5에이커의 땅을 제공하지 않았고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주지도 않았으며 송환 줌머 난민들에게 그들의 이전 사회적 지휘를 부여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줌머 난민들의 많은 공동체에서는 군대 또는 이주자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2007년 위기 때 IDP와 난민을 위한 기동대를 만나고 집으로 오는 길인 난민송환 줌머 복지회의 총리를 영장 없이 체포했다.

 

국내적으로 터전을 잃은 사람들(IDP)의 상황 역시 좋은 것이 아니다. IDP(Internally Displaced People)이란 군대 또는 이주자들의 박해로 인해 집과 땅을 잃은 사람들 중에 사정상 다른 나라로 가지 못한 난민들을 말한다. 2000년에 CHT의 요청으로 생긴 기동대는 128,364가구의 국내 실향민 리스트를 만들었다. 이 중에 90,208가구는 줌머인이었고 38,146가구는 방글라데시 이주자들이었다. 이 리스트에 이주자들까지 포함 시킨대 강한 이의가 있었다.

 

IDP를 아직 다 정착시키지 못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그들 생애 중에 3번 또는 4번 그들의 터전을 잃은 적이 있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어떤 지역 예컨대 랑가마티 지역에 사젝은 군대와 이주민들이 그들의 땅과 경작지를 장악하기 위해 반복적인 공격을 시도하고 있다. 2008 4월에 군대와 이주민들은 공격을 하였고 사젝에 많은 수의 마을을 불태웠다 그리고 이들의 95%는 국내 실향민이 되었다.

 

국가비상지대에 CHT

협정 이후 CHT 상황은 협정을 비난하는 UPDF의 회원과 지지자들에 대한 박해로 특정 지을 수 있다. UPDF 1998 12 26일 설립되었고 자나 삼하티 사미티에 의해 무장해제가 된 이후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생겼다.

 

그러나 줌머인들의 일반적인 박해, 특히 UPDF에 의한 박해가 2007 1월부터 2008 12월까지 위기 정권의 2년 동안 가장 높았다. 2008 8월 당의 최대 120 회원들이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들 중에 37명은 위기의 정권 중에 체포되었다.[8]

 

줌머인들의 다른 문제는 군대로부터 지원을 받은 불법 이주자들에 의해 줌머인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는 위기 상황에서 생겨났다. 줌머인들의 수백 에이커 땅이 이 시기에 빼앗겼다. Hill Watch Human Rights Forum에 의해 나온 리포트에 따르면 카그라차리 사다 그리고 마할차리 어파질라에 네 지역에서만 총 399.22 에이커의 땅이 2007 1월부터 9달 동안 강제로 빼앗겼다. 군대는 이주자들에게 줌머인들의 땅을 빼앗으라고 부추긴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물리적으로 빼앗는 일에도 참여하라고 부추겼다. 이런 시도는 불교 사원이 있는 땅마저도 빼앗게 만들었다. 2007 8월에 불법 이주자들과 방글라데시 군대는 카가라차리 지역의 디기날라 우퍼질라에 있는 바부차라 지역의 사드하나 틸라 불교사원을 장악하려고 했다.[9] 마할차리 경찰서에 의해 허위로 500 줌머인들을 고소했다. 이중에 사원의 최고 스님인 아르요 조티 비꾸가 있었다. 사원 땅을 강제로 빼앗으려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체포한 것이다.[10]

 

현재 상황: 보기에는 달라진 것이 없다.

임시 정부가 2008 12 29일 치러진 아홉 번째 대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한 아와미 리그 주도의 정부로 바뀐 지 거의 8달이 되었다. AL(아와미 리그)는 또한 치타공 산악 지대에 3의석 모두 차지 하였다. 선거 선언문에서 당은 CHT 협정을 완전히 적용한다고 했었다. 5월 총리 셰이케 하시나는 유럽 외교관에게 그녀는 현재 정부가 모두의 번영을 기원하는 것처럼 CHT 평화 협정을 완벽하게 이행하겠다고 약속한다.”라고 했다. [11]

 

그러나 실제 상황은 많이 다르다. 굳은 약속에도 불구하고 치타공 산악지대의 상황은 변화지 않았다; 지난 8개월 동안 그 어떠한 군부대도 철수하지 않았고 무고한 줌머인들에 대한 습격과 고문은 계속 진행되고 있으며 토지 강탈 역시 자행되고 있다. 덧붙이자면 군대는 산악지역 내부 민족의 행정집행에도 개입하고 그 곳의 민주주의와 평화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7 2일 란자마티 지역에 사젝의 줌머인 8명이 다카에서 있었던 기자회견에서 그들이 군대에 의해 어떻게 고문당했는지를 말했다. 그들은 군대의 지원을 받는 이주민들이 줌머인들의 토지를 빼앗으려는 시도에 대한 진술을 했다. 사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55 이주자 가족들이 사젝에 있는 줌머인들의 땅에 자리잡았다. 군대가 이주민들에게 완전한 치안을 보장해주고 있다.

카그라차리 지역의 람가르 우파질라 아래에 있는 보로이탈리에서 이주자들이 토착인들의 땅 300 에이커를 빼앗으려다가 두 집단간의 싸움으로 번졌고 여기서 몇 명의 이주자들이 다쳤다. 민주청년포럼(Democratic Youth Forum, 통일인민민주전선(United People’s Democratic Front)의 전위조직)과 보로이탈리 토지보호위원회가 7 10일에 토지 강탈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자 군대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 집회를 해산 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군대의 도로 봉쇄로 마닉차리에서부터 오려는 길이 막혔지만 수천 명의 줌머인들이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7 15일에 집회를 해산시키기 위해 구이마라 여단장인 라티풀 하이더가 이주자들을 보로이탈리로 이주시키고 그들에게 모든 지원을 하겠다고 했다.[12]

 

반다르반의(Bandarban) CHT에서는 지금 루마(Ruma) 군사기지를 확장한다는 이유로 무룽인들에게 속한 7,570에이커의 땅을 강탈하려고 한다. 만약 성공한다면 캅타이 댐이(Kaptai dam) 1960년대에 CHT의 북쪽과 중앙에 있었던 똑 같은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 줌 경작물에 의존하는 수천 명의 무룽인들은 터전을 잃고 생존의 권리마저 잃을 것이다.

7 20 CHT affairs Parliamentary Standing Committee 4번째로 카그라차리에서 열릴 것이다. 이 위원회가 땅 강탈 이슈에 대해 토론하지 못한다면 토지는 계속해서 강탈 당할 것이다.

지금까지 CHT 협정을 이행하겠다는 반복적인 약속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치타공 산악 지대 정책에 변한 것이 없다.

 

결론

1991년 치타공 산악 지대 위원회가 최초로 편찬한 리포트인 우리의 삶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방글라데시 치타공 산악 지대의 인권과 실상에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치타공 산악지대에서의 구조적인 폭력은 산악지대 사람들이 땅이 빼앗기고 시장 경제에 의존할 것을 강요당하기 때문에 지속된다. 이것이 멈춰지거나 역전되기 전까지는 이런 구조적 폭력은 멈추지 않을 것이고 이것은 치타공 산악 지대 전반적으로 확산될 것이다.

 

줌머인들의 토지강탈과 박해는 그들이 고유 민족으로 존재하는데 있어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많은 원주민 민족들에게 주어진 땅은 그들의 고향이며, 그것은 그 집단을 특색 짓는 물리적, 역사적, 그리고 종종 신화적인 장소이다. 그러나 그런 땅이 없이는 그들의 생존은 위험에 처한다.”[13]



[1] Banglapedia, National Encyclopedia of Bangladesh, Asiatic Society of Bangladesh. Vol.2. page 406

[2] Bangladesh District Gazetteers, Chittagong Hill Tracts, 1971. Page.28.

[3] Land Rights of Indigenous Peoples of the Chittagong Hill Tracts, Bangladesh by Rajkumari Chandra Kalindi Roy, 1996.

[4] Chakma Resistance to British Domination by Suniti Bhushan Qanungo.

[5] Land Rights of Indigenous Peoples of the Chittagong Hill Tracts, Bangladesh by Rajkumari Chandra Kalindi Roy, 1996.

[6] Cited in The Chittagong Hill Tracts, Bangladesh: On the Difficult Road to Peace by Amena Mohsin, 2003.

[7] “The Chittagong Hill Tracts, Banglaesh: On the Difficult Road to Peace”by Amena Mohsin: page72

[8] Statement to the visiting delegation of the Chittagong Hill Tracts Commission by United People’s Democratic Front (UPDF), August 2008.

 

[9] Bangladesh: The Army attacks Buddhism to facilitate illegal settlement in the

Chittagong Hill Tracts by AITPN

[10] Sarnath Arannyo Kuthir updage: Cases filed against 500 Jummas including monk and dead, Hill Watch Human Rights Forum, News No. 07/2008, January 15, 2008.

[11] New Age, May 6, 2009

[12] chtnews.com, News No. 86/2009, July 16, 2009

[13] Rodolfo Stavenhagen 1990: The Ethnic Question: Conflicts, Development, and Human Rights, United Nations University, United Nations University Press, Tokyo at p. 101. Cited in the preface to the “Land Rights of the Indigenous Peoples of the Chittagong Hill Tracts, Bangladesh” by Rajkumari Chandra Kalindi Roy.



출처: JPNK 재한 줌머인 연대


10월 9일 금요일 밤 11시 50분
MBC "W" 에서 위 내용과 관련된 "줌머인 이야기 (가제)"가 방영됩니다.

많은 시청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