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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Activities/활동가이야기

[새식구소개] 새로운 인연을 시작하며 - 김한나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들 한다. 이 지구 상 70억 인구는 고사하고 내가 살고 있는 땅 한국의 5천만 국민을 다 만나는 것조차도 선뜻 가능하다 말할 수 없는 필연적으로 제한된 인생을 사는 나. 평생에 만날 사람은 이 큰 집합 속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에 그저 표면적으로 스치고 지나친 이들조차 시·공간을 공유한 존재로서 우리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한 맺어짐의 고리가 있었다고, 그렇게 사람과 사람의 마주침에 의미를 두는 건지도 모르겠다.



  일생 단 한 번의 조우로 잊혀질, 심지어 애초에 인식하지도 못한 많은 이들에 대해서도 이렇게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렇다면, 짧지 않은 시간 잦은 주기로 얼굴을 맞대하며 함께 울고 웃는 관계로 머리 속에, 그리고 가슴 속에 남을 이들은 어떠할까.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사건’이라 할 만하지 않을까.




  지나온 삶의 궤적을 돌아보면 나에게도 적지 않은 ‘인연의 사건’이 있었다 하겠다. 부모와 갖는 일생일대 첫 사건으로서의 만남과 관계맺음으로부터, 개인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이어져 온 다양한 사귐의 고리들. 그 순간의 희노애락으로서의 비중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빈번하게 부딪히는 선택의 시점들에서 그 원인이 되기도 하고 결과가 되기도 한 이들의 영향력과 파급력은 내 인생이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님을 더욱 절감하게 할 만큼 두고두고 크고 작은 힘을 드러내는 삶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그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 했을 친구를 사귀게 되고, 그 단체에 소속되지 않았다면 알지 못 했을 삶의 이면을 함께 경험하며, 그 여행길에 오르지 않았다면 생각하지 못 했을 또 다른 현실을 가슴에 담게 된 나날들. 그리고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한 세대를 채워온 나는 이 순간, 이곳에, 이들과 함께 있다.

 

 



   나와 난민인권센터의 연은 사실 그리 길지도 깊지도 않다. 2년 전, 한국에 거주하는 난민과 그들을 지원하는 단체의 존재를 ‘비로소’ 인식했던 날, 그 때가 난민인권센터와 내가 처음으로 만난 날이었다. 이후 한국을 떠나 있게 된 나는 난민인권센터와 이렇다 할 소통을 이어가지는 못 했다. 하지만 ‘난민’이라는 세계 현실로서의 이슈는 내 안에서 점점 집중 조명되는 영역으로 커 나갔다.



  먼 곳의 이야기로만 여겨진 그들의 행보가 바로 내 코 앞까지 이르러 있음이 그제야 보이고 들리기 시작했음 역시 고백한다. 아무 염려도 거리낌도 없이 출·입국심사대를 거치는 내 다음에 서 있는 누군가가, 일말의 의심없이 한 사회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내 이웃이라 하는 누군가가 삶을 지키기 위해 그 자체를 담보로 먼 길 달려온 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실, 한해 한해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사람을 대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로 다가온다. 눈밭에서 데굴데굴 굴리며 놀던 스노우볼. 굴리면 굴릴수록 커지는 재미에 마냥 좋았던 시기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내 몸집을 넘어서는 크기와 단단한 중량감에 계속해서 굴려야 할까 싶을 만큼 부담을 느끼게 되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역할이 사람과 관계하며 타자와 소통하는 과정을 필히 수반하기에 지금의 이 부담은 실상 어느 곳에서든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만큼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고 나만큼 사람을 향한 기대를 품고 있는 어떤 이의 인생에 직접 개입한다는 것은 보다 건강하고 분별력있는 에너지를 매 순간 요구한다고, 이 새로운 여정의 초입에 선 나는 연신 곱씹을 수밖에 없다. 한 번의 마주침이, 한 순간의 인상이 나를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했듯 나의 손짓 하나, 눈짓 하나가 갈림길에 이른 누군가의 삶을 이리로 혹은 저리로 이끄는, 어쩌면 무시할 수 없는 나비효과를 일으킬는지 그 누구도 감히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니 말이다.



   그저 더해 안고 박제처럼 굳혀가기만 했던 나의 ‘관계 스노우볼’에는 그래서, 눈과 바람, 햇볕의 적절한 교차가 필요하다. 다가올 만남들에 충실하기 위해, 적절한 호흡으로 관계의 고리를 이어가기 위해, 만남과 헤어짐, 맺고 끊음의 때를 욕심없이 가뿐하게, 그러나 찬찬히 다지며 흘러가는 단계들이 절실하다.

 

 


  마무리와 이별이 주는 노곤함에 젖어 있던 나는 이제 또 다른 시작을 맞으며 새로이 몰입 중이다. 이 길 위에서 내가 만날 사람, 나를 만날 이에게 신실한 벗이 될 수 있기를 다시 한 번 두 손 모아 바래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