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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Activities

방글라데시 난민과 함께 한 10월 월담

방글라데시 난민과 함께 한 10월 월담


 



 이번 월담에는 개최 이래 가장 많은 분들이 참석해 주신 월담이 되었습니다.^^ 학부 수업이 없는 주간임에도 성공회대학교의 많은 학생들이 참석해서 열띤 관심을 보여주셨고, 진지한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참석해 주신 많은 분들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__^



 

 

 



아시아 난민은 세계 난민의 3분의1

 

  이번 행사에서는 로넬 씨의 발표에 앞서 아시아 난민 발생 현황을 훑어 볼 수 있었는데요. 아시아의 난민은 4천만 명이 훨씬 넘는 숫자로 추산되는 전세계 난민 가운데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전반적으로는 아직까지 다수의 국가에서 종식되지 않은 독재정권의 탄압 및 정치적 갈등 상황이 난민을 양산하는 조건이 되고 있었습니다.



  지역 별로는 그 패턴이 조금씩 다른데, 서남아시아(중동)의 경우는 전쟁과 테러(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 의한 이유가 주되며, 동아시아의 경우는 중국 정부에 대해 자치를 원하는 선주민들의 난민화(티베트, 위구르 등)가 주된 경향이었습니다. 동남아시아의 경우는 독재정권 하에서 종족적, 종교적 소수자성(미얀마의 친족, 카렌족 및 로힝야족, 방글라데시의 줌머족, 스리랑카의 타밀족 등)이 탄압의 기제로 작용하면서 난민화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아시아 난민 중 팔레스타인(480만명), 아프가니스탄(280만명) 그리고 이라크(170만명)의 난민이 아시아 난민의 압도적인 규모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전세계 난민 4250만명 중아시아난민은600만명, 난민 3명 중 1명이 아시아에서 발생 (2011년 기준)  -출처:UNHCR

 

 



애매한 나의 소개

 

 로넬 씨는 어딜가서나 이름을 여러차례 얘기해야만 하는 애매한 나의 소개에 대한 이야기로 발표를 시작해 주셨습니다. 로넬 씨는 한국에서 난민으로서, 이주노동자로서 그리고 한국인으로서 여러 가지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방글라데시에서도 줌머선주민이자, 차크마인이자 방글라데시인으로서의 여러 가지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상황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한국인 또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단일한 정체성을 지닌 다수의 한국인들에게 로넬 씨의 정체성은 이해하기 쉽지만은 않은 복잡한 느낌이었지요. 국가의 경계를 넘고, 문화적 차이를 넘나들며, 여러 가지 사회적 조건들을 수용하고 공존하려는 노력들이 이와 같은 풍부한정체성들을 간직하게 했던 것이 아닐까요?

 

 

 

 

로넬 씨는 보트피플 속의 난처한 사람들이나, 굶주리고 처량한 사람들만이 난민이 아니라 태국의 탁신 총리나 위키리크스의 줄리앙 어산지 같은 사람도 난민의 처지라고 하며, 정치적 망명자들처럼 자신의 신변을 위해 적극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난민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로넬 씨는 그 이유는 다르지만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고 정치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한국행을 선택하셨던 것이지요.







 

치타공 산악지대에서 벌어진 일

 

줌머인은 방글라데시의 선주민으로서 약 70만명이며, 그 안에는 12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줌머인은 방글라데시 역사에 있어 독자적인 문화와 종교를 가진 또다른 왕국임을 강조하셨습니다. 1860년에 시작된 영국의 식민지 지배 시기를 지나자, 1947년 파키스탄의 식민지가 시작되었는데, 그 기간 동안에 치타공 산악지대에 캅타이 댐 건설을 시작하면서 줌머인들은 강제 이주를 당했습니다.



 1971년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방글라데시 정부는 치타공산악지대에 벵갈인들을 정착시키고, 선주민들의 토지와 재산이 강탈되는 것을 묵인하거나 지지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방글라데시의 줌머인에 대한 인종청소 정책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방화, 체포, 고문, 성폭력 등에 시달렸습니다. 1997년 평화협정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13번의 대량학살이 있었다면 그 이후에는 9번의 크고작은 학살이 있었습니다.

 


로넬 씨는 1986년 학생으로서 줌머인 자치권 운동에 참여하다가 방글라데시 군대와 정보원에 의해 체포되어 1989년까지 감옥에서 생활하셨습니다. 이 시기는 가장 많은 줌머인들이 대량학살과 인권유린에 시달리던 시기였고, 그래서 망명의 길을 떠나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로넬 씨는 감옥에서 풀려나신 후 다른 줌머인들처럼 인도 등 여러나라를 거쳐 망명생활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2002년에 난민신청을 하셨습니다.







 

한국에서의 생활과 재한줌머인연대

 

로넬 씨는 한국에 들어온 후 가장 힘들었던 일 가운데 하나는 다른 난민들처럼 자신의 박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여러차례의 인터뷰에 시달렸고, 법무부로부터 난민신청을 거부당하셨던 것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사회적인 안전망이 부족한 가운데 노동을 해야 하고 한국사회에 적응하는 과정들도 쉽지 않았습니다. 로넬 씨는 결국 난민불인정에 대해 다시 행정소송을 통해 최종적으로 난민으로 인정받으셨지요.



하지만, 인정 후에도 교육과 양육 등 전반적인 사회복지 혜택을 받기가 어려워 정착생활을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부모가 난민으로 인정받았지만, 아이를 낳고 나서도 아이의 법적 지위가 등록되는데 수년이 걸려, 전혀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한편 이와 동시에 로넬 씨는 동료들과 줌머인의 인권·사회·문화적인 자조를 위해서 재한줌머인연대를 결성하였습니다. 재한줌머인연대는 자립뿐만 아니라 본국에서의 인권상황을 알리고, 한국사회와의 상호문화적인 교류를 하고자하는 노력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현재에는 70여명의 줌머인들이 김포시 양현면에 함께 모여 살며, 작지만 소중한 줌머인 공동체를 만들고, 방글라데시 인권개선 및 한국사회에서의 정착과 공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줌머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유창한 한국어로 진행된 로넬 씨의 열정적인 발표가 끝나자, 많은 분들이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먼저 한 분은 여러나라들 중 한국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로넬 씨는 한국이 불교 문화이자, 몽골계 인종이라는 환경적 친밀감이 큰 계기로 작용했고, 그 때까지만 해도 한국에 줌머인들이 거의 없었고, 알려진 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한국에서의 줌머인 인권운동에 뿌리를 내리려는 뜻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재일교포로서 참석하신 한 분은 재일조선인은 대부분은 국적이 있기에 난민이 아니라는 의견을 제시해 주셨고, 이와 더불어 이들을 난민으로 간주하는 것이 오히려 한국인으로 포용하지 않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밝혀주셨습니다. 이에 대해 사회자는 대부분의 재일교포는 국적(일본, 남한, 북한 중 하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국적이 없는 소수의 무국적 조선인들이 여전히 존재하며, 이들이 난민에 해당된다는 점을 언급하였습니다. 또한 그 분께서는 질문하셨습니다.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말하면서 아프지 않으셨나요?”



 

이에 대해 로넬 씨는 잘 살고, 똑똑한 한국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자랑스러운 문화를 가진 줌머인이 되고자 한다는 말로서 본인이 한국 국적을 가지고 살고, 많은 점에서 한국인의 생활을 배우고자 하지만, 내면에 줌머인으로서의 긍지와 문화를 간직하고 살아가고 싶고 그것은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분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 국적을 가졌지만, 혹은 같은 한인(같은 민족)이지만 한국사회에서 아무렇지 않게 동화되기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선주민의 자치권

 

한국 사회내 방글라데시인과 줌머인의 관계가 어떠한지에 대한 질문도 있었는데요, 로넬 씨는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기회가 많지 않기에 특별히 관계가 좋거나, 나쁘지 않으며, 다만 본국에서 그랬듯이 사회문화적인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른 해외 줌머인들의 상황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줌머 난민들 중 프랑스에 사는 사람들이 제일 많고, 캐나다, 미국 등지에서도 거주하고 있으나, 실제 통계가 존재하지 않아 정확한 분포는 알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하셨습니다.



 

줌머인의 자치를 주장하는 이유가 다수민족으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인지, 또는 주류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려 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도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로넬 씨는 한 나라 내에서 특정지역(치타공)이 그 자신의 독립적인 지위를 누리길 원하는 것이며, 이것은 중앙정부가 직접적으로 간섭하는 것에 반대하고, 줌머인이 스스로 살고 있는 지역의 자치를 해야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외에도 지면에 모두 소개하지 못한 다양한 질문과 토론으로 월담행사는 풍성하게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월담에서는 여러 가지 박해와 정착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질적인 민족과 문화를 지닌 사람이 낯선 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새로운 정체성에 대해, 그리고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한국인’, ‘한국국민들이 어떻게 공존하고 서로의 문화를 이해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