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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권리들을 가질 권리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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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권리들을 가질 권리 Ⅱ (right to have rights)

진태원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3. 랑시에르의 비판


   랑시에르는 「인권의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글에서 아렌트의 인권 해석 및 권리들을 가질 권리 개념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J.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op. cit.). 랑시에르가 아렌트의 인권의 역설론에 주목하는 것은 현재 국제정치에서 나타나는 인도주의적 인권 개념과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이 제시하는 종말론적인 정치 사이에 모종의 연관 관계가 존재한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특히 『호모 사케르』, 박진우 옮김, 새물결, 2008 참조). 그리고 이러한 연관성은 이론적으로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강조한 인권의 역설에 뿌리를 두고 있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인권의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1990년대에 들어서 새로운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이는 인권이야말로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연쇄적으로 몰락한 이후, 전지구적인 자유 시장 경제와 전지구적인 자유민주주의가 조화를 이루는 “평화로운 역사 이후의(posthistorical) 세계”의 명실상부한 이념적 원리, 헌장이 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민족갈등과 대량 학살, 종교적 근본주의의 분출, 새로운 인종주의 및 외국인 혐오증의 확산, 신자유주의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과 불안정의 증가 등으로 인해 세계는 여전히 빈곤과 불평등, 갈등과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인권은 권리 없는 이들의 권리, 곧 자신의 집과 땅으로부터 내쫒기고 인종 학살의 위협에 시달리는 이들의 권리들인 것으로 드러났다. 인권은 점점 더 희생자들의 권리, 자신들의 이름으로는 어떤 권리도 행사할 수 없고 심지어 어떤 주장조차 할 수 없는 이들의 권리인 것으로 나타났고, 그리하여 결국 그들의 권리는, ‘인도주의적 간섭’에 대한 새로운 권리—궁극적으로는 침략에 대한 권리가 되어버린—라는 이름 아래 국제 권리 체계의 구조를 파괴하는 대가를 치르면서 타인들에 의해 유지되어야 하게 되었다.(J. Rancière, op. cit., pp. 297~98)



   따라서 인권은 미심쩍은 것이 되었는데, 인권에 대한 이러한 의혹은 버크의 인권 비판을 다시 상기시키게 되었다. 곧 “실제의 권리는 시민의 권리, 국민 공동체 자체와 결부되어 있는 권리”이며, 인권에서 말하는 “인간”이란 “한낱 추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이 생겨났다. 랑시에르는 아렌트가 말한 인권의 역설 역시 버크의 이러한 인권 비판의 논리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으로 간주한다. “인권은 단지 인간 존재에 지나지 않는 이들의 권리다. 그들은 인간이라는 것 이상의 특성을 갖지 못했다. 달리 말하면, 인권은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한 이들의 권리이며, 권리에 대한 조롱에 불과하다.”(J. Rancière, Ibid., p. 299) 


   이 대목은 다소 의아하게 생각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권이 “인간이라는 것 이상의 특성을 갖지 못”한 이들,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한 이들의 권리”라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그 자체로 권리에 대한 조롱이 되는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랑시에르 자신이 “몫 없는 이들의 몫”을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한 이들의 권리”로서의 인권은 해방 투쟁의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랑시에르는 이것을 권리에 대한 조롱으로 이해하며, 더 나아가 인권의 역설에 대한 아렌트의 분석이야말로 “50년이 지난 이후, ‘인도주의적’ 무대에 나타난 인간의 권리의 새로운 “난점”에 딱 들어맞는”(J. Rancière, Ibid.)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전체주의의 기원』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아감벤 식의 의미에서) ‘예외상태’에 대한 아렌트의 개념화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권리를 상실한 사람들이 처한 곤경은, 그들이 법 앞에서 평등하지 않다는 점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아무런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며, 그들이 억압당하고 있다는 점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그들을 억압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293; 『전체주의의 기원』, 531쪽) 랑시에르는 “어느 누구도 그들을 억압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아렌트의 말이 “명백히 경멸적인 말투”를 띠고 있다고 이해하는데, 그가 보기에 이 말은 “마치 이 사람들이 심지어 억압당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심지어 억압될 만한 가치도 없다는 점에서 잘못이 있”(J. Rancière, op. cit., p. 299)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랑시에르가 아렌트와 아감벤 사이의 지적 계보의 근거를 발견하는 곳도 바로 이 대목이다. 


   그에게 아렌트의 위와 같은 진술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근거 짓는 고유한 인간학에서 비롯한 것이다. 사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볼 수 있듯이 활동의 세 가지 형식, 곧 노동(labor)과 제작(work), 행위(action)의 형식을 구별하면서, 삶의 필요에 관한 작업과 관련된 사적 영역(곧 오이코스(oikos)의 영역)에 속하는 노동 및 제작과 구별되는 행위야말로 본래적인 공적 영역, 곧 정치의 영역에 속하는 활동이라고 주장한다(H. Arendt, The Human Condition, Introduction by Margaret Canova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8(2nd Edition); 『인간의 조건』, 이진우ㆍ태정호 옮김, 한길사, 1996 참조). 그리고 근대성의 특징 중 하나는 고대 세계에서는 유지되었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의 이러한 구별이 무너지고 사적 영역에 속하는 노동이 공적 영역 속으로 진입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렌트는 1848년 이후 공적 영역 속으로 노동운동이 등장한 것은 근대 정치의 주목할 만한 현상이지만, 노동운동은 경제적 이해관계를 추구할 뿐 고유한 의미의 정치적 행위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일단 노동운동이 사회 속으로 통합이 되고 노동자들이 사회의 성원으로 인정받게 되면, 노동운동은 오히려 공적 영역 및 그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정치적 행위의 가능성을 잠식하게 된다고 본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랑시에르는 아렌트 인간학의 특징을 생물학적 삶 및 사적 영역의 삶을 의미하는 조에(zoe)의 영역과 위대한 행위가 이루어지는 고유하게 정치적인 삶의 영역인 비오스(bios)의 영역 사이의 엄격한 구별 및 분리에서 찾는다(잘 알려져 있다시피 아감벤의 정치철학, 특히 그의 세계적인 출세작인 『호모 사케르』는 이 두 가지 개념의 구별에 의거하고 있다). “아렌트가 보기에 인권과 근대 민주주의는 이 두 가지 삶의 혼동—이는 궁극적으로는 비오스를 순전한 조에로 강등시키는 것을 뜻한다—에 의거한 것이다.”(J.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op. cit., p. 299) 따라서 아렌트가 말한 “억압을 넘어선 상태”는 이 두 가지 삶의 영역을 엄격하게 분리시키는 것의 이론적 귀결이다.


   랑시에르는 이것을 아렌트 정치철학에 고유한 “아르케 정치적 입장”으로 간주한다. 아르케 정치(archi-politique)는 랑시에르가 『불화』의 4장에서 도입한 개념으로, 플라톤이 창설한 정치철학적 입장을 가리킨다. 아르케 정치의 고유한 특징은 정치적 활동을 소수의 집단에게만 할당하고, 데모스 또는 인민은 정치의 영역 밖으로 배제하고 오직 삶의 필요와 관련된 일에만 종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랑시에르가 아렌트의 관점을 아르케 정치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순수한 정치의 영역과 삶의 필요와 관련된 영역을 구별하고 후자에 의한 오염으로부터 전자의 영역을 보호하려는 것이 아렌트의 고유한 관심사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순수한 정치 영역을 보존하려는 의지는 궁극적으로 이 영역을 국가 권력과 개인적 삶의 관계 속에서 사라지게 만든다”는 점이며, 따라서 아감벤의 저작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정치를 권력과 같은 것으로, 곧 “점점 더 저항할 수 없는 역사-존재론적 숙명(오직 신만이 우리를 여기에서 구원할 수 있으리라)으로 여겨지는 권력”(Ibid., p. 302)과 같은 것으로 만들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랑시에르는 이러한 아렌트-아감벤의 계보에 맞서 인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안한다. 그는 이를 아렌트가 만들어낸 두 가지 진퇴양난의 딜레마와,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세 번째 길의 형태로 제시한다.

아렌트는 인권과 시민권(Rights of the Citizen)을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는 진퇴양난으로 만든다. (1) 시민권은 인권이다. 그러나 인권은 정치화되지 않은 사람의 권리다. 이 권리는 아무런 권리도 없는 사람들의 권리이며, 결국 무로 귀착된다. (2) 또는 인권은 시민권이이다. 이러한 시민권은 이러저러한 헌정 국가의 시민이라는 사실과 결부되어 있다. 이는 이 권리가 권리를 지닌 사람들의 권리라는 것을 뜻하며, 이는 결국 동어반복으로 귀착된다. 권리 없는 이들의 권리이거나 아니면 권리 있는 이들의 권리라는 것. 공허한 것이거나 아니면 동어반복이라는 것, 그리고 양쪽 다 속임수라는 것. 이것이 아렌트가 조립한 자물쇠다. 이러한 자물쇠는 진퇴양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세 번째 가정을 일축하는 대가를 치를 경우에만 작동하게 된다. 실로 세 번째 가정이 존재하는데, 나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겠다. 인권은 그들이 가진 권리를 갖지 못하고 그들이 갖지 못한 권리를 갖고 있는 이들의 권리다.(Ibid.)



   여기서 세 번째 가정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우선 “그들이 가진 권리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기록된 권리들”, 곧 성문화된 권리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자유롭고 평등한 것으로서의 공동체의 기입들(inscriptions)”(Ibid.)인 이러한 성문화된 권리들은 개인들이 이러한 권리에 기초하여 불평등하고 부자유스러운 사회, 정치적 상황에 맞서 투쟁할 수 있는 근거들로 작용한다. 따라서 인권은 그들에게 부여된 성문화된 권리를 실제로는 누리지 못하는 불평등하고 부자유스러운 상황에 처한 개인들의 권리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 인권이 “그들이 갖지 못한 권리를 갖고 있는 이들의 권리”라는 것은, 이러한 개인들이 단지 이미 기입되어 있는 권리를 옹호하고 그러한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기입을 바탕으로 아직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권리들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권리 주체들을 생산한다는 것을 뜻한다. “자유와 평등은 한정된 주체들에 속하는 술어들이 아니다. 정치적 술어들은 열린 술어들이다. 그것들은 그것들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그것이 어떤 경우에 누구와 관계하는지에 대한 논쟁을 열어놓는다.”(Ibid., p. 303) 


   따라서 랑시에르에게 인간과 시민의 차이, 또는 인권과 시민권의 차이는, 아렌트가 제시하는 진퇴양난에서처럼 공허하든가 동어반복적인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그러한 간격을 폐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정치의 공간, 새로운 정치적 주체들의 생산의 장을 뜻한다. 정치적 주체들은 정확히 말하면 자신들이 갖고 있는 권리를 실현하고 그러한 권리들에 기반하여 새로운 권리들을 창출해내는 이들이다. 랑시에르는 이러한 주체들을 총칭하여 데모스 또는 인민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가난한 이들의 권력”이나 “벌거벗은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행사할 자격을 갖지 못한 이들의 권력”으로 정의한다. 곧 “민주주의는 아무런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빼고는 통치하는 데 필요한 어떤 특별한 자격도 갖추지 못한 이들의 권력”(Ibid., p. 305)이다. 이런 의미에서 랑시에르는 『불화』를 비롯한 다른 저작에서 민주주의를 안-아르케(an-arkhe), 곧 아르케 없는 것으로 규정한다.



   4.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 발리바르의 해석


   발리바르는 1990년대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아렌트의 정치철학에 관해 논의한 바 있는데, 그의 성찰의 핵심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인권의 역설론이다.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발리바르가 아렌트의 ‘권리들을 가질 권리’(또는 ‘권리들에 대한 권리’)라는 개념을 랑시에르의 ‘몫 없는 이들의 몫’이라는 개념과 유사한 것으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이 이를 잘 보여준다. “[아렌트의] 이러한 관점은 최근 랑시에르가 정치적 공간에서의 만인을 위한 실질적 평등의 척도는 민주주의라는 관념의 기원에서부터 ‘몫 없는 이들의 몫’에 대한 인정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 다시 말하면 배제―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제이지만 또한 다른 차별의 범주들도 여기에 속합니다―의 과정을 정치체 안으로의 포함 과정으로 전화시킴(이는 정치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킵니다)으로써 구성된다는 것을 보여 주면서 재정식화하려고 시도했던 것과 가까운 관점입니다.”(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232쪽) 『우리, 유럽의 시민들?』이 프랑스어로 2001년에 출간되었고, 랑시에르의 「인권의 주체는 누구인가?」가 2004년에 발표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랑시에르가 자신의 글에서 발리바르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기는 해도, 그의 글은 발리바르의 이러한 (부당한?) 연결에 대한 반론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역으로 발리바르는 랑시에르의 글이 출판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인권의 역설론, 특히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개념에 대해 재고찰하면서 자신의 논점을 좀더 분명히 드러내고 문제의 쟁점을 심화시키고 있다(인권의 역설론에 관한 발리바르의 논의로는 지난 호에 제시된 문헌 참조). 따라서 아렌트는 어떤 의미에서는 인권의 정치 및 무정부주의적 시민성에 관한 두 사람의 논쟁을 비춰주는 거울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랑시에르의 해석과 비교해볼 때 발리바르의 해석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먼저 그는 랑시에르의 해석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둘째, 이 개념에 초점을 두고 인권의 역설을 고찰하게 되면, 아렌트 문제제기의 핵심에는 정치 공동체의 무근거성, 아르케 없음이라는 문제, 아르케 없는 정치 공동체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가 놓여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셋째, 만약 이것이 아렌트의 인권의 역설론의 핵심 쟁점이라면, 그로부터 제기되는 또 다른 문제는 정치 공동체에 고유한 아포리아적 성격 또는 이율배반적 성격이라는 문제다.


   우선 첫 번째 문제를 살펴보자. 발리바르는 아렌트의 핵심 논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그것은 아렌트가 권리들의 인간학적 토대라는 관념 및 정치적인 것의 토대로서 ‘인권’의 고전적 교의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 중 하나를 전개하면서도 이 권리들 중 몇 가지를 무조건적인 것으로서 극단적으로 옹호했으며, 이러한 권리들에 대한 무시는 인간적인 것의 잠재적인 또는 현행적인 파괴로 귀착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인권이라는 관념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전형적인 인권의 정치를 정치적인 것 일반, 특히 민주주의적인 정치의 중심에 위치시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É. Balibar, “(De)constructing the Human as Human Institution”, op. cit., p. 728) 발리바르는 이것을 “아렌트의 정리”(Arendt’s theorem)라는 수학적 용어로 표현한다. “시민의 권리가 제거되거나 역사적으로 파괴되면 인권 역시 파괴된다.”(É. Balibar, Ibid., p. 732) 정리라는 표현이 뜻하는 바는, 인권과 관련된 이러한 역설적 사태가 일시적이거나 역사적 우연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보편적인 함의를 지닌다는 점이다. 아렌트의 정리가 지니는 보편적 함의는 무엇보다도, 그러한 정리가 인간의 권리에 함축된 권리라는 것이 개인 주체가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고유한 성질, 말 그대로 양도/소외 불가능한 자연적 성질이 아니라, 공동의 세계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서로에게 부여해주고 또한 서로에 대해 보증해주는 자격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준다는 점에 있다. 개인들이 지닌 인권은 이것 이외에는 다른 보증을 지니고 있지 않다. 따라서 시민의 권리가 파괴되면 인권 역시 파괴되는 이유는, 인권이 시민의 권리에 의존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랑시에르가 주장하듯이, 아렌트가 버크를 옹호하면서 인권은 국민의 권리의 부속물이라는 것, 국민 국가에 소속되는 것이 개인들의 역사적 숙명이며, 그러한 공동체 바깥에서는 권리라는 통념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하고 개인들은 오직 벌거벗은 생명으로서의 자연적 성질만을 지닐 뿐이라는 점을 인정했다는 뜻이 아니다. 발리바르가 보기에 아렌트의 논점은 이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다. 첫째, 아렌트가 말하려는 것은 “행위의 상호성이라는 의미에서의 공동체의 제도/설립 바깥에는, 인간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념이다.”(É.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op. cit., p. 210) “완전하게 조직된 인류와 더불어 고향과 정치적 지위의 상실은 인류로부터 배제되는 것과 동일하게 되었다.”(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294; 『전체주의의 기원』, 533쪽) 또는 역으로 표현한다면, 인간 존재 그 자체는 개인들이 공동으로 형성된 세계 속에서 서로에 대해 부여하고 보증해주는 권리들과 다르지 않으며, 그 권리들만큼 실존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따라서 둘째, 인간의 인간성 자체를 구성하는 이러한 공동의 세계 형성은 특정한 정치 제도나 공동체의 형식을 함축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아렌트가 명시적으로 말하듯이 인권의 하나로 간주되어야 하는, 또는 이러저러한 구체적인 인권의 항목들을 보호하고 성립하게 해줄 수 있는 일차적인 권리로서의 권리들을 가질 권리를 뜻한다.


   발리바르는 이를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É.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 72;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윤소영 옮김, 공감, 2003, 23쪽)라고 바꿔서 표현하며,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1789)의 한 가지 핵심(그가 인간=시민 명제라고 부르는 것)을 여기에서 찾는다. 하지만 발리바르가 말하는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는 이러저러한 정치적 권리에 대한 주장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권리선언』은 인간을 시민으로, 인권을 시민권으로 환원하려는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권리선언』이 개인의 자율성, 개인적 권리의 영역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다 정치로 환원하며, 따라서 공포정치 및 전체주의로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프랑수아 퓌레(François Furet)나 마르셀 고셰(Marcel Gauchet) 식의 수정주의적 프랑스혁명 해석 및 반(反)전체주의론적 비판에 무기력해질 수 있다. 반대로 우리가 인간=시민 명제의 핵심을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로 파악한다면, 인간=시민 명제는 인간을 시민으로 환원하거나 자유를 평등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권리나 개인적 자유의 조건이 무엇인지 좀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명제가 된다. 왜냐하면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란, 인간의 권리 및 시민의 권리를 인간의 본성이라는 불변적인 자연적 사실에 기초 짓는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피압제자들의 해방은 그들 자신에 의해 쟁취될 수 있을 뿐”(『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23쪽. 이 부분은 2010년 판본에는 빠져 있다)이라는 원칙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인권이라는 것이 시민적 권리에 선행하지 않으며, 이러저러한 시민적 권리들과 더불어 인권 역시, 서로에 대해 권리를 부여하고 보증해주는 개인들의 공동의 세계 구성 행위에 의존한다면, 그것은 정치 공동체의 자연적이거나 본질적인 기초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한다. 정치 공동체는 공동의 세계를 구성하려는 시민들의 호혜적인 행위 이외의 다른 기초를 지니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민주주의적 공동체로서의 정치 공동체는, 랑시에르가 말하듯이 아르케 없는 것, 안-아르케, 무-정부적인(an-archy) 것임을 뜻한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아르케 없는 것으로서의 정치 공동체가 어떻게 성립 가능한가라는 중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더 나아가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보다 더 심각하고 근본적인 문제도 제기되는데, 그것은 이러한 아르케 없는 공동체로서의 민주주의 공동체에 본래적인 이율배반적인 또는 아포리아적인 성격이라는 문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한 가지 심원한 이율배반을 포함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권리들을 창조하는 동일한 제도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개인들이 그것들을 통해 서로에게 상호적으로 권리들을 부여함으로써 인간 주체들이 되는 그러한 동일한 제도들은, 그것들이 이 권리들을 파괴할 경우에는, 또는 권리들을 실행하는 데 장애가 될 경우에는 또한 인간적인 것에 대해 위협이 된다는 점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É.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op. cit., p. 211)


   아렌트가 국민국가에 고유한 인권의 역설을 통해 표현한 것이 바로 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국민국가는 『인권선언』에 기초를 두고 시민으로서의 개인들의 평등과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호혜적인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해 수립되었지만, 이러한 공동체는 역사적으로 시민들의 평등과 자유를 제한할뿐더러, 그 성원들 중 일부를 배제하거나 억압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렌트는 이것이 단순히 국민국가에만 고유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좀더 외연이 넓은 초국민적인 국가 및 일종의 세계정부를 구성한다고 해도, 그 국가나 정부는 정치적 통일성을 획득하기 위해 정치체 내부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축소하거나 심지어 제거하려는(곧 배제하려는) 경향을 지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렌트는 그의 스승이었던 칼 야스퍼스가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제안한 ‘세계 연방 국가’ 방안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바 있다. 왜냐하면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그 국가는 고도로 강력한 “연방 치안력”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그러한 무력은 또 다른 억압과 폭력의 힘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 문제에 관해서는 Ayten Gündoğdu, “‘Perpexities of the rights of man’: Arendt on the aporias of human rights”, op. cit., p. 13 참조)


   따라서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아렌트의 개념이 제기하는 문제는 정치 공동체에 대한 초월적이거나 자연적인 기초가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랑시에르 식으로 말하면, 정치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안-아르케”, 곧 “무-정부”적이다), 어떻게 민주주의적인 공동체를 설립할 수 있을 것인가, 또는 민주주의를 구현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사실은 배제에 기초를 두고 있는 현재의 민주주의적 정치체(국민국가를 포함하는)를 어떻게 민주화할 것인가, 곧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개념이 지닌 깊은 현재성은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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