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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권리들을 가질 권리 Ⅰ (right to have rights)

진태원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개념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가 『전체주의의 기원』(1951)에서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유럽 대륙에서 양산되었던 무국적자들과 소수민족들이 겪은 인권의 역설을 성찰하면서 제시한 개념이다(Hanna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Harcourt, 1973, p. 293; 『전체주의의 기원』, 이진우ㆍ박미애 옮김, 한길사, 2006, 528쪽. 번역에 관해 한 마디 지적해두자면, 한글 번역본은 전체적으로 원문의 내용을 크게 훼손하지 않은 무난한 번역이지만, 원문의 논리를 정교하게 이해하는 데는 꽤 지장을 준다. 이는 특히 번역자들이 nation, nationalism, nationality, tribal nationalsm, minority, people 등과 같은 2부의 주요 개념들을 일관성 없이, 또한 피상적으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렌트의 논의를 충실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문에 대한 참조가 꼭 필요하다. 이하 번역본의 인용문은 필요에 따라 부분적으로 수정했지만, 수정 사실을 일일이 지적하지는 않았음을 밝혀둔다). 이 개념은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본격화되면서 1990년대 이후 수많은 이주자들과 난민들이 속출하고 이들 역시 위의 경우와 유사한 인권의 역설을 겪게 되면서 다시 한 번 현대 정치철학의 핵심 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1. 인권의 역설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 사이에 유럽 출신의 모든 유대인 및 특히 여성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복잡다단하고 곡절이 많은 삶을 살았던 아렌트는 「국민국가의 쇠퇴와 인권의 종말」이라는 제목이 붙은 『전체주의의 기원』 9장에서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의 혼란기에 인권의 이념이 맞게 된 역설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인권은 양도할/소외될(inalienable) 수 없다고 추정되지만, 주권 국가의 시민이 아닌 사람들이 나타날 때면 항상—심지어 인권에 기초한 헌법을 보유한 국가에서조차—인권은 강요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293; 『전체주의의 기원 1』, 528쪽)로 집약되는 역설이다.


   이러한 역설은 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수많은 난민들과 무국적자들, 망명자들, 이주민들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아렌트는 1914년 8월 4일 이후, 곧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유럽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서술하기는 현재에도 거의 불가능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1차 세계대전이 국제 관계의 기본 규칙을 와해시켰고, 폭발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수많은 중간 계급의 몰락을 낳았으며, 대규모의 “집단 이주”(Ibid., 267; 489쪽)를 낳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고향을 떠나자마자 노숙자(homeless)가 되었고 국가를 떠나자마자 무국적자(stateless)가 되었다. 인권을 박탈당하자마자 그들은 무권리자들(rightless)이 되었으며 지구의 쓰레기가 되었다.”(Ibid., 267; 489~90쪽)


   이 때문에 아렌트는 영국의 보수주의자 에드먼드 버크가 프랑스혁명을 비판하면서 제기한 문제가 전간기에 사실로 드러났고, 이런 점에서 버크의 논리가 “아이러니컬하고 신랄한 형태”(Ibid., 299; 537쪽)로 확인되었다고 지적한다. 곧 버크는 인권이란 하나의 추상에 불과하며, “자신의 권리는 인권이라기보다 “영국인의 권리”라고 주장하는 편이 더 현명하다”고 지적했는데(에드먼드 버크,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이태숙 옮김, 한길사, 2008 참조), 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적을 상실한 소수 민족들과 망명자들, 이주민들이 겪은 사태는 그의 지적을 입증해주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국민의 권리 상실은 어떤 경우에든 인권의 상실을 수반했다. 최근의 사례인 이스라엘 국가가 입증하듯이, 인권의 회복은 국민적 권리의 확립이나 회복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인권 개념은 인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가정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인권을 믿는다고 고백한 사람들이 인간이라는 사실 외에는 모든 다른 자질과 특수한 관계들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마주치는 순간, 인권 개념은 파괴되었”(Ibid., 299; 537쪽)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권이라는 것은 어떤 개인이 어떤 나라의 국민이나 시민이든 간에,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로 인해 지니게 되고 누릴 수 있는 권리이며, 따라서 시민의 권리에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것임에도, 실제로는 어떤 개인이 이러한 인권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특정한 나라의 시민 내지 국민의 자격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인권은 시민의 권리와 독립적인 것이 아닐뿐더러, 시민의 권리에 논리적으로 선행하고 그것을 근거 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민의 권리에 의존하는 것임이 드러난다. 이것이 아렌트가 말하는 인권의 역설이다.


   아렌트가 인권의 역설을 통해 제기하려는 문제는 세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인권의 박탈은 세상에서 거주할 수 있는 장소의 박탈을 뜻한다는 점이다. “인권의 근본적인 박탈은 무엇보다 세상에서 거주할 수 있는 장소, 자신의 견해를 의미 있는 견해로, 행위를 효과적 행위로 만드는 그런 장소의 박탈로 표현되고 있다.”(Ibid., 296; 532쪽)


   둘째, 이러한 인권의 역설이 나타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에 고유한 세상, 인간이 자신의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는 장소는 자연적으로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인공적으로 구성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세상, 인간의 정치적 삶의 공간은 자연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우발적이고 현상학적인 의미에서 상호주관적인 토대, 따라서 토대 아닌 토대를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셋째, 그러므로 인권의 역설이 우리에게 드러내주는 것은, 인권에는 권리들을 가질 권리가 함축되어 있다는 점이다.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정치 상황이 출현하면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권리들을 가질 수 있는 권리(그것은 어떤 사람이 그의 행위와 의견에 의해 평가를 받을 수 있는 하나의 구조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조직된 공동체에 속할 수 있는 권리를 잃고 다시 얻을 수 없게 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그러한 권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특별한 권리의 상실이 아니라 어떤 권리이든 기꺼이 보장해주고 보장할 수 있는 공동체의 상실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닥친 재난이었다. 결국 인간은 인간으로서 근본 자질과 인간적인 존엄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이른바 말하는 인권을 상실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오직 정치 조직의 상실만이 그를 인류로부터 추방한 것이다.(Ibid., 297; 534쪽)


   하지만 아렌트에 따르면 이러한 권리들을 가질 권리는 “한 번도 인권의 항목 가운데 언급된 적이 없는 권리”이며, 이것은 “18세기의 범주에서는 표현될 수 없었다. 그 까닭은 권리가 인간의 ‘천성’으로부터 직접 생겨난다고 가정했기 때문이다.”(같은 곳)


   아렌트는 인권의 역사를 두 가지 단계를 경유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18세기 말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을 통해 “역사적 권리는 자연권에 의해 대체되었고 ‘자연’은 역사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 첫 번째 계기다. 이처럼 인권을 역사 대신 자연에 기초를 둠으로써, 각각의 민족이나 국민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역사적 권리를 통해 자신의 특권을 정당화하거나 불변적인 것으로 유지하려고 했던 지배 계급이나 특권 계급의 권리를 비판하고, 인간이 인간이라는 자연적 사실 자체를 통해 권리를 지니고 있음을 주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세기 전반기에 국적 없는 사람들, 권리 없는 사람들이 겪은 인권의 역설을 통해 새롭게 드러난 사실은 이제 역사만이 아니라 자연도 인간에게 낯선 것이 되었다는 점이다. “18세기의 인간이 역사로부터 해방되었듯이 20세기의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해방되었다.”(Ibid., 298; 535쪽) 따라서 이제는 인류가 과거에 자연이나 역사가 수행했던 역할을 떠맡게 되었는데, 이는 곧 “권리들을 가질 권리 또는 인류에 속할 수 있는 모든 개인의 권리가 인류 자체로부터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Ibid., 298; 536쪽)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렌트는 이것이 과연 가능할지 여부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왜냐하면 국제 관계가 여전히 주권 국가들 간의 상호 협정과 조약의 관점에서 작용하는 국제법에 따라 좌우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세계 정부’의 건설 역시 이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법이 될 수 없는데, 그러한 세계 정부라는 것이 “가능성의 영역 안에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면 이상주의적 경향을 가진 조직이 촉구한 버전과는 상당히 달라지지 않을까”(같은 곳) 짐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렌트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유럽의 많은 국적 없는 사람들, 권리 없는 사람들이 겪은 인권의 박탈 경험에 입각하여 인권의 역설을 제기하고, 인권 속에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새로운 범주가 포함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러한 범주에 걸맞은 정치 공동체가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권리들을 가질 권리에 대한 해석들


   아렌트가 제시한 인권의 역설 및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개념은 이후 아렌트 연구의 중심 주제 중 하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20세기 말에 수많은 이주민과 난민들이 생겨나면서 현대 정치철학, 특히 인권과 시민권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그런 만큼 이 문제는 서양 학계에서는 이미 여러 권의 저서와 수많은 논문들의 대상이 된 바 있다. 이 개념에 관한 논의는 크게 세 가지 부류로 구별해볼 수 있다.


   이 개념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석이 존재한다(특히 Michael Ignatieff, Human Rights as Politics and Idolatry,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1 참조). 앞서 말했듯이 한나 아렌트는 권리들을 가질 권리를 “어떤 종류의 조직된 공동체에 속할 수 있는 권리”로 간주한다. 더 나아가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에서 제창된 추상적 인권 개념에 대한 에드먼드 버크의 비판을 “실용적으로 건전한”(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299; 『전체주의의 기원 1』, 537쪽)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아렌트는 버크와 마찬가지로 추상적 인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국민국가에 소속될 권리만이 현실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권리들을 가질 권리는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이면서 강력한 국민국가에 소속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하게 된다. 더 나아가 국제정치적인 맥락에서 본다면, 인권을 유린하고 대량학살을 자행하는 국가나 집단에 맞서,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개입할 수 있는 권리를 함축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인권은 인권을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 권력에 의존하게 되며 권리는 권리가 아니라 선물이나 시혜를 의미하게 되는데, 이는 한나 아렌트가 말한 인권의 역설을 훨씬 더 가중시키며, 인권이라는 개념을 무력화(無力化)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James Ingram, “What Is a “Right to Have Rights?” Three Images of the Politics of Human Rights”,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vol. 102, no. 4, 2008 참조).


   칸트적 해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관점도 존재한다(Jürgen Habermas, “Die postnationale Konstellation und die Zukunft der Demokratie” in Die Postnationale Konstellation, Suhrkamp, 1998; 위르겐 하버마스, 『이질성의 포용』, 황태연 옮김, 나남, 1998; 세일라 벤하비브, 『타자의 권리』, 이상훈 옮김, 철학과현실사, 2008). 전자의 경우와 달리 이러한 해석에서는 인권을 보호할 수 있는 정당한 제도를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심적인 것이 된다. 하버마스와 벤하비브는 『영구평화론』을 비롯한 법철학 저술에서 칸트의 제안을 따르면서도 그것을 좀더 발전시켜서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세계시민적 정치체 및 정치 제도의 확립 속에서 아렌트가 말하는 인권의 역설을 해결하려고 한다. 가령 벤하비브가 보기에 칸트 자신 및 아렌트가 국제관계에서 인권의 확립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지닌 이유는 그들이 주권적인 국민국가를 정치의 (자연적인) 토대로 간주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정치 공동체 및 법 제도의 가능성을 사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권의 역설을 해결하고 권리들을 가질 권리에 대해 실질적인 해법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지역적이고 국제적인 법적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된다(특히 벤하비브, 『타자의 권리』 4장 참조). 특히 하버마스와 벤하비브는 유럽 공동체의 건설에서 이러한 세계정치적 인권 체제의 구체적인 가능성을 보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첫 번째 관점과 비슷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인권의 역설을 해결하고 권리들을 가질 권리를 구체적인 법적 제도로 실현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하버마스의 용어법대로 하면 세계적인, 적어도 국제적인 공론장의 형성을 요구하며, 궁극적으로는 대량 학살로 인해 고통 받는 동료 인간의 현실에 대한 인류의 도덕적 각성을 필요로 한다(J. Habermas, “Die postnationale Konstellation und die Zukunft der Demokratie” in op. cit.). 그런데 이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결국 여기에서도 역시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국제적인 법적ㆍ정치적 제도를 실현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들의 권력에 의존하게 된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역시 인권은 그 권리의 당사자들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대신해서 그들의 권리를 지켜줄 수 있는 강력한 이들의 힘에 달려 있는 문제가 된다(J. Ingram, “What Is a “Right to Have Rights?” Three Images of the Politics of Human Rights”, op. cit.). 그렇다면 한나 아렌트가 말한 인권의 역설은 여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해석들보다 좀더 아렌트가 제기한 인권의 역설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다른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는데, 실제로 최근에 여러 이론가들이 아렌트의 이론에 관한 새로운 해석 및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은 아렌트의 저작들에 대한 좀더 면밀하고 충실한 검토에 입각하고 있을뿐더러, 자유주의적이거나 칸트적인 해석과 달리 인권의 문제를 정치 그 자체의 문제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더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해석을 제안하고 있다(É. Balibar, “Les universels”, in La crainte des masses, Galilée, 1997; 「보편적인 것들」, 서관모ㆍ최원 옮김, 『대중들의 공포』, 도서출판 b, 2007; 7장 「폭력과 세계화: 시빌리테의 정치는 가능한가?」, 『우리, 유럽의 시민들?』,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0; “Is a Philosophy of Human Civic Rights Possible?: New Reflections on Equaliberty”, The South Atlantic Quarterly, vol. 103, no. 2-3, 2004; 「인간 시민권의 철학은 가능한가?」, 『월간 사회운동』 2006년 11월호, 통권 69호 http://www.movements.or.kr/bbs/view.php?board=journal&id=1624; “(De)constructing the Human as Human Institution: A Reflection on the Coherence of Hannah Arendt’s Practical Philosophy”, Social Research vol. 74 no. 3, Fall 2007; “Arendt, le droit aux droits et la désobéissance civique”,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UF, 2010; “On the Politics of Human Rights”, Constellations, vol. 20, no. 1, 2013; J.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The South Atlantic Quarterly, vol. 103, nos. 2-3, 2004; J. Ingram, “What Is a “Right to Have Rights”? Three Images of the Politics of Human Rights”, op. cit.; Peg Birmingham, Hannah Arendt and Human Rights, Indiana University Press, 2006; Ayten Gündoğdu, “‘Perpexities of the rights of man’: Arendt on the aporias of human rights”, European Journal of Political Theory, vol. 11, no. 1, 2011; Justine Lacroix, “Human Rights and Politics, 1980-2012”, Books & Ideas.net, 2012. http://www.booksandideas.net/Human-Rights-and-Politics.html).


   이 중에서 특히 자크 랑시에르와 에티엔 발리바르의 해석이 주목할 만한데, 그 이유는 두 사람 모두 민주주의에 대한 좌파적 재정의라는 이론적 아젠다의 관점에서 인권의 정치를 강력히 옹호하면서도(민주주의에 대한 좌파적 재정의라는 시각에서 두 사람의 이론을 검토하고 있는 글로는 진태원, 「랑시에르와 발리바르: 어떤 민주주의?」, 실천문학 2013년 여름호, 통권 110호 참조) 아렌트의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개념에 대해 상반된 해석을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랑시에르는 아렌트 정치철학, 특히 그녀가 제기한 인권의 역설에서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엘리트주의의 전형적인 특징을 발견해낸다면, 발리바르는 민주주의에 대한 급진적인 재해석의 가능성을 읽어낸다. 더욱이 이는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론과 매우 가까운 어떤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민주주의에 대한 유사한 관점을 지닌 두 사람이 아렌트에 대하여 거의 상반된 해석을 제시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꽤 흥미 있는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번 논의에서는 이 점을 좀더 심층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원문보기: http://rikszine.korea.ac.kr/front/article/humanList.minyeon?selectArticle_id=384

Posted by 난민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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