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인권센터에서는 난민과 관련된 시민분들의 다양한 경험과 목소리를 담고자 기고글을 받습니다.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다립니다. 문의: refucenter@gmail.com 

 

 

은유로서의 난민

 

박경주(모든이의민주주의연구소 연구활동가, ptothek@hanmail.net)

 

*이 글은 독립비평저널 [크리틱-칼]에 기고한 글을 수정보완한 것임을 알립니다.

 

 

 

어느 대선후보와 '대량난민사태'?


대선 국면이었고 수많은 말들이 오고-갔다. 이 글 역시 오고-간 말들 사이 '어디즈음'에서 시작되었다. 그 말을 한 '주체'는 OO정당의 후보이며 말해진 '대상'은 ‘진보 진영’ 내 상대 후보의 지지자들 중 본인을 지지할 가능성이 있는 이들과 그러한 ‘지지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 되어진 '은유로서의 난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OO당 왼쪽에 있는 저와 OO당이 이번에 선전하기를 바라는 것이 촛불 민심이다이렇게 저는 생각하고 이제 선거가 본격화되면 OO당 지지자들 중에서도 과감한 개혁을 원하는 그런 지지자들이 OO당 또 저에게 넘어오는 대량 난민사태가 있지 않을까 이렇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OO후보의 발언, SBS 대통령후보 대담 ‘人집중분석’ 중

 

"OO후보 : 실질적 변화를 열망하는 시민들은 다 OO당으로 올 것입니다. OO당에서 대량난민사태가 날 수  있도록 제가 확실히 하겠습니다.

 OO작가 : 아니요즘 전 세계적으로 난민을 못 오게 막으려고 난리인데

 OO후보 : 저희 OO당은 난민을 환영하는 정당입니다문을 활짝 열어놓도록 하겠습니다

 OO위원장 : 저희 선대위에서는 보트를 준비해놓겠습니다대한민국 각 당의 보트피플들을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OO후보 외의 발언, 노유진의 정치카페의 대선승리 전진대회 특집 중

 

 

대선국면에서 상대편 후보의 지지자들이 자신에게로 ‘이동’하는 것을 설명하는 전략적 은유로서 ‘대량난민사태’는 OO후보의 인터뷰에 자주 등장했다. 개그맨 양세형이 진행하는 숏터뷰의 리액션캠[각주:1], 위에서 언급한 SBS 대통령후보 대담 ‘人집중분석’[각주:2], 노유진의 정치카페의 대선승리 전진대회 특집[각주:3] 등. 아마도 대외적인 방송의 출현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이러한 은유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는 OO후보의 대담과 연설 등을 기획하는 선거캠프의 공식적 ‘은유’로 인정받은 듯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나는 OO후보의 ‘난민의 은유‘가 몹시 불편했다. 그리고 도대체 왜? ‘지지자의 이동’을 설명하는 은유로 난민이 필요한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추측을 해보자면 아마도 상대편 정당의 지지자들이 그들의 후보와 공약을 통해 흡족하고 만족스러운 ‘개혁적 노선’을 담보할 수 없게 될 것이고 이에 따라 -그들보다 더 개혁적인- OO후보, 본인에게로 ‘피난’할 것이라는 의미를 “극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듯하다. 그러나 ‘지구화시대’, 난민의 형상은 전쟁 및 기후변화 등의 구조적 ‘재난’과 정치적 입장을 포함하는 특정 정체성(종교, 민족, 인종, 성정체성 등)을 가진 집단에 소속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국가 -혹은 국가에 준하는 정치공동체- 로부터 죽음 또는 죽음에 준하는 공포와 박해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본국-삶의 자리에서의 박탈과 ‘보호의 진공상태’를 전제로 한다.[각주:4] 즉 OO후보의 말처럼 상대편 정당에서 자신에게로 지지를 옮길 이들은 어떤 경우에서든 ‘난민’일 수 없는 것이다. 굳이 은유를 하고 싶었다면 ‘이사’ 정도가 적당했을 것이다.[각주:5] 그러나 이는 그가 대선후보라는 점을 제외하면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일이다. 그만큼 한국사회의 난민의 은유는 편재해있다.



한국사회와 난민은유의 문법


수잔 손택에 따르면 은유란 설명하고자 하는 “그것이-아닌-다른 것으로”, 혹은 “그것이-아닌-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어떤 사물이나 사건, 현상 등을 부르는 것이며(은유로서의 질병, 129)[각주:6] 이는 철학과 시만큼 오래된 정신작용으로 과학적 지식과 표현력을 포함해 각종 이해의 방식을 낳은 기초이다. 그리고 그의 역자 이재원이 말한 것처럼 이러한 은유는 질병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은유로 사용되는 대상에의 ‘무지’에서 시작되고 발전된다(같은 책, 261). 이는 한국사회의 난민의 경우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난민에 대한 무지 혹은 단편적인 이해에서 비롯된 ‘은유로서의 난민’은 가난과 기아 혹은 테러 및 위험요인 등의 ‘비참’과 ‘범죄’에 대한 이미지로 오랫동안 사용되어왔으며 ‘난민팔뚝’과 같은 신체를 둘러싼 ‘웃음거리’로도 종종 소환되었다. 무슬림에 대한 혐오를 난민에게 접속시키려는 흐름 또한 독일의 ‘쾰른 사건’과 파리에서의 '테러' 그리고 이를 적극 활용했던 국내의 테러방지법의 통과를 경유하며 '주류'가 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청년을 위시로 한 ‘내적 난민’이라는 은유와 그로 인한 담론들도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듯하다.[각주:7]


이와 같은 '난민의 은유'와 그것을 사용하는 문법의 ‘경향’들은 각 집단의 사회적 위치와 목적 및 이해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1) 법무부의 경우는 '국가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 아래 테러범과 ‘위장 취업자’, ‘가짜 난민’, '남용적 난민신청자' 등을 가려내기 위해서 (2) 몇몇의 기독교 분파는 포교활동의 ‘방해물’인 무슬림을 ‘적대’하기 위해서[각주:8] (3) 학계나 언론계는 자신들의 이론과 기사를 자극-극대화하기 위해서 (4) 몇몇의 시민단체들은 시민과 국가로부터 난민에 대한 지원을 늘리기 위해 (5) 대다수의 남성들은 국가를 지키고 또한 ‘우리누이’들을 성범죄로부터 지켜내기 위해(허나 문제는 자신들이 난민들로부터 지켜내고자 하는 그 ‘우리누이’들이 실은 현재까지도 자신들로부터 폭력과 혐오, 멸시의 대상이 되어왔다는 점) (6) 지금과 앞으로의 일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7) 아니길 바라지만 극적인 표현을 도입함으로써 상대방을 웃기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난민에게 부여하는 이와 같은 ‘은유의 문법’을 통해 상당부분 현재 우리의 문화가 지닌 거대한 결점들을 깨닫게 된다. 제도적인 국가주의와 인종주의의 증대, 적대를 기초로 한 종교근본주의, 성차별주의를 민족주의로 초과하여 사유하는, 민족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성차별을 문제시하지 않는 문화, 경제위기와 그것을 조장하는 말하기의 일상화 및 통치, 국민 혹은 남성 등 ‘애매한 동일성’에의 귀속의지의 확산, 언행의 과격화, 소수자에 대한 헤이트스피치 등.


난민의 은유에 반대한다


"사람들은 은유 없이 사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자제하고 피하려 애써야 할 은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모든 사고는 해석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해석에 반대한다는 것이 언제나 옳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같은 책, 129)."


나는 모든 은유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잠정적으로" 난민의 은유에는 반대한다. 왜냐면 사회 내에 난민에 대한 입체적이고 다양한 이해와 인정이 자리를 잡지 않은 상황에서 이뤄지는 난민의 은유는 난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고정시키며 이는 난민에 대한 낙인으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상에서 “툭~” 하고 뱉는 것을 통해 누구나 쉽게 난민으로 ‘둔갑’시키는 은유는 난민의 발생과 토대를 희화화 시킬 가능성을 높인다. 종합적으로 이러한 ‘은유의 실제-물질적인 결과’[각주:9]는 난민들의 탈정치화, 즉 ‘권리를 가질 권리’로서의 시민권으로부터 이들을 박탈-배제시킬 가능성의 증대이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들을 둘러싼 “은유들로 환유된” 그들은 감시와 경계 혹은 시혜적인 지원이나 보조를 받는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정치적으로 목소리를 내며 자신과 동료들의 권리를 위해 봉기하는 시민일 수는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글을 쓰는 이를 비롯하여 이와 같은 위험을 감지한 이들이 난민의 은유를 반대하는 이유다. 우리는 격앙되어 있는 난민에 대한 은유의 폭풍들을 가라앉혀야 한다. 물론 '내적 난민'에 한하여, 서경식이 말한 것처럼 난민과 국민 사이의 관계를 ‘외부’ 혹은 ‘단절’로 규정하는 것은 ‘난민문제’의 ‘본질’을 왜곡할 위험이 있다.[각주:10] 하지만 이 또한 매우 신중할 필요가 있으며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잠정적으로 이에 대한 문제제기가 필요하다고 본다.


시민난민의 은유에 대한 곤란으로서의 '시민=국적'이라는 등식


그러나 피하려 애써야 할 은유가 있다면 결코 피할 수 없기에 애써서 붙들고 반드시 기입시켜야만 하는 은유도 있다. 그것이 바로 “시민-난민의 은유”다. 그러나 이 은유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왜냐면 이는 위에서 언급했던 기존의 은유들에 반하는 ‘구성원리’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권의 역사에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이후 시민권의 토대-조건은 단지 인간인 것으로 충분했으며 이에 따라 시민권은 ‘평등-자유의 흔적’을 쫓는 시민들의 집단적 봉기를 통해 쟁취-발전되어 국가의 법-정책을 재구성-생성 시켰다.[각주:11] 사회권은 이에 대한 성과이자 ‘결과’라고 할 수 있다.[각주:12]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계급투쟁을 위시로 한 ‘내적 위협’과 전쟁 등의 ‘외적 위협’에 맞서 국민국가의 형태를 보존하기 위해 국민이라는 ‘애매한 동일성’ 아래로 국내에 여러 갈등과 그것의 담지자들을 포섭하려는 국가적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이에 대한 사례로 노동자나 소수민족-인종들이 자신의 계급적, 인종적 정체성보다 국적을 우위에 두게 된 경향들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사회권은 ‘봉기적 쟁취’와 ‘국가적 기획에 따른 포섭’의 이중적 형성의 과정을 거치며 시민권의 하위권리체계로서 자리매김 된다. 그러나 이는 국민국가 내부의 ‘일등국민’ 중심적 권리인정, 즉 젠더-인종-계급 등의 교차적인 차별-억압의 효과로서 생산된 ‘비국민’ 혹은 ‘이등국민’은 배제한 채 주어지는 특권이 되었고 그 결과, [선언] 이후 시민의 생성원리이었던 '인간과 시민의 동일성'을 점점 더 '시민과 국적의 동일성'으로 이행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로서 작동하게 된다.


여기에는 국가의 전략과 국민에 소속된 이들 사이에 성립된 모종의 ‘계약’이 존재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발리바르는 시민=국적의 등식이 안착-강화된 과정과 그에 대한 이유를 애국주의와 국가수호의 동어반복으로 설명하는 극우파에 맞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각주:13]


"나는 유일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이야기 전체를 다시 서술해봐야 한다. 극우파가 애호하는 설명은 애국주의 내지 넓은 의미의 국가수호에 의한 설명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순환적 설명이다. 왜냐하면 애국주의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말이다. 나로서는 여러 가지 심각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를 테면 국민적 시민성을 재창조한 것은 근본적으로 사회계약이라고 생각한다. 곧 시민성이, 사회적 권리들의 획득 및 수혜와 분리될 수 없는 사회적 시민성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런 재창조를 설명해 줄 수 있다."


즉 시민생성의 원리를 시민=국적으로 이행시킨 것은 국가의 행위만으로 이해될 수 없으며 ‘사회-계약’을 통해 사회적 권리들을 향유하기 위한 조건을 받아들인, 즉 “국민이기에 시민인” 이들의 ‘긍정의 정치’[각주:14]가 함께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민과 국적의 ‘동일성’ 그리고 그것에 대한 ‘긍정’은 전 지구적 이주가 일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지구화의 국면에서 국민국가 내부 이주민들의 시민권을 배제 혹은 성립 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자연적인 토대가 되었고 복지국가 이후 '신자유주의의 가속화'에 의한 국민의 사회권 축소의 '전면화'는 그들의 생계-생존에 대한 불안을 가중시켜 '애매한 동일성'에로 국민들을 귀속시킴으로써 국민-국가주의의 증대와 함께 이주민에 대한 인종주의적인 혐오담론을 형성함으로써 이러한 경향을 가속화하고 있다.[각주:15]현재, 전 세계적으로 '반다문화운동세력' 혹은 ‘국민의 반다문화세력화’의 흐름에 따른 제도적 인종주의로서 아파르트헤이트적인 정책의 요구는 바로 이 불안과 적대에 대한 반작용에 맞닿아있다. 이에 더하여 이주민 그룹 안에서 난민이 가지는 특수성은 귀국의 불-가능성, 즉 이들이 “왠만해서는” ‘돌아가지 않는 이들’이라는 점에 있다. 이는 난민차별의 또 다른 양상들을 만들어낸다. 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다른 지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trans국가적 정치와 국경 사이의 민주주의를 위해


이러한 국면에서 난민과 시민 사이에 하이픈(-)을 기입하려는 은유의 시도는 ‘시민=국적의 동일성’에 기초하여 배제와 차별을 주요 구성원리로서 담지 하는 이주민에 대한 ‘국가적 치안’에 맞선 ‘관-국가적 정치’, 즉 국경 내에 혹은 국경 사이에 시민권에 대한 ‘몫’이 없다고 여겨지는 이주민들의 몫을 주장하는 ‘정치’를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관-국가적 정치는 ‘시민=국적’이라는 등식을 넘어서는, 발리바르가 말한 ‘관-국민적 시민권’[각주:16]을 포함하는 기획이다.


그리고 이를 확장해나가는 방법은 한국사회에서 난민들보다 ‘시민 됨’을 앞서 인정받은 우리가 난민들의 봉기할 권리, 공적 공간에서 목소리를 가질 권리, 권리와 함께 머물 권리로서의 시민권을 인정하고 그들과 함께 차별과 배제에 맞선 봉기를 통해 쟁취한 권리들을 서로에게 호혜적으로 부여하며 이를 제도 안에 기입-생성-확장하는 것이다(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 33쪽). 이 과정에서 서로는 서로에게 유일무이한 해방의 궁극적 원천이자 준거가 된다(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 34쪽).


지난 2월 스페인의 카탈루냐주 바르셀로나에서는 30만 명의 시민들이 정부를 향해 난민을 받아들이라는 대규모 시위를 했다.[각주:17] 물론 난민에 대한 유럽 정부와 시민들의 ‘대응’은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이는 매우 긍정적인 현상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도 이러한 시위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매해 6.20일 난민의 날, 한국의 난민인권단체들은 난민의 존재를 알리는 시위를 진행하고 있으며 많은 시민들이 이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동료시민[각주:18]으로서 그들의 시민권을 위해 지금보다 더 큰 목소리와 행동으로 한국정부를 향해 요구해야 한다.


글을 마치고자 한다. 한국 정부는 90년대 초 난민협약의 가입과 2013년 난민법의 제정 이후 ‘이주정책’에 있어서 더이상 그 의무를 ‘이주노동’과 ‘결혼이주’에 한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94년 첫 신청자를 시작으로 매해 난민신청자는 늘고 있지만 한국 정부는 ‘선진국’에 준하는 인정률을 보이고 있지 못하다.[각주:19] 물론 한국정부가 모든 난민신청자에 대한 난민지위를 인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국제사회 내 한국의 정치경제적 위상을 볼 때 지금보다 더 많은 수의 난민의 지위를 인정하고 보호해야 함은 자명한 사실이다.


또한 이와 함께 한국 정부는 ‘국경 사이의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는 (1) 그들이 한국에 입국하는 순간부터 난민지위인정을 신청하기 위한 면접과 이후의 ‘인정심사’ 그리고 결과 및 재심사를 요청하는 과정에서의 안전보호와 존중, 국민적 수준의 사회권보장과 (2) 난민을 지원하는 담당 공무원의 확충 및 난민지위인정의 적법한 심사를 위한 인권단체-연구자-법무부-국가인권위가 협력하는 민주적 난민심사지원체계의 수립 (3) ‘강제구금’을 금하고 외국인보호소의 ‘시설확충’과 인권담당관제도 등을 두어 보호소 내 인권에 기초한 운영을 가능케 하며, 부득이하게 난민을 송환해야 한다면 그들이 본국이 아닌 타국에서 보호 받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과정 등을 의미한다.


난민이 최초 입국 후 지위의 인정여부를 알 수 있기까지 걸리는 기간은 평균 3-4년이다. 이 기간 동안 그들은 열악하고 제한된 노동과 주거, 의료 등의 환경에 노출되며 여성들의 경우 ‘젠더폭력’에 기반 한 더 큰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각주:20] 다행스럽게도 긴 재판 끝에 국가로부터 난민지위를 인정받으면 국민에게 기초적으로 제공되는 '사회적 권리'를 보장 받지만 참정권 및 정치적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사실상 ‘단순한 존재’[각주:21]로 공적공간을 부유할 뿐이다. "근래에 주변에서 난민들의 봉기를 본적이 있는가? 공적 공간에서 난민들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러한 권리들과 함께 머물고 있는 난민을 만난 적이 있는가?" 큰 변동이 없는 한 계속 한국에서 자신의 삶을 기획하며 살아 갈 그들을 생각한다면 이는 너무 가혹하다. 


이처럼 현재 한국사회에서 난민이 처한 ‘곤경’의 중심에는 시민권의 부재가 놓여있다. 난민의 시민권은 난민의 ‘좋은 삶’을 가능케 하는 가장 완벽한 해결책이 될 수는 없을지라도 시작이자 발판이 될 수 있다. 시민권의 토대는 특정한 국적도 인종도 계급도 젠더도 아닌 오로지 동료시민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내보이는 '호혜적인 인정'과 그에 따른 함께-봉기의 과정에 기초해있다. 바꾸어 말하면, 한국사회에서 그들보다 먼저 국민이자 시민됨을 부여받은 우리가 난민들을 동료시민으로서 인정하고 더 나아가서 권리의 쟁취를 위한 투쟁에 얼마만큼 함께 연대하느냐가 그들의 시민권 형성에 있어 토대이자 핵심사안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여기 저기에 편재하고 널부러진 난민의 은유에 시민의 은유가 추가되고 안착되는데에는 여전히 수많은 장벽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동료시민인 우리는 머리를 맞대어 상상해야 한다. 모든 난민신청자를 법적으로 인정할 수는 없을지라도 국경사이의 민주주의를! 지금보다 더 많은 난민들에 대한 인정을! 그들과 함께 봉기하며 쟁취해나갈 시민권을!

 

 

  1. https://youtu.be/VoI9lvYkfc0 [본문으로]
  2.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098921&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mq [본문으로]
  3. https://youtu.be/PV2oqf8k16U [본문으로]
  4. 아렌트의 다음 문장은 난민이 처한 상황을 잘 설명해준다. “권리를 상실한 사람들의 재난은 그들이 생명, 자유와 행복 추구 또는 법 앞에서의 평등과 의견의 자유를 빼앗겠다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1, p. 531). “고향을 떠나자마자 노숙자(homeless)가 되었고 국가를 떠나자마자 무국적자(stateless)가 되었다. 인권을 박탈당하자마자 그들은 무권리자들(rightless)이 되었으며 지구의 쓰레기가 되었다.”(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1, pp. 489-90) [본문으로]
  5. OO후보가 위의 인터뷰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난민을 포함한 이주민에 대한 시민사회의 정책적 요구에 모두 찬성을 한 것을 확인했다. 아래의 링크에서 그에 대한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153562 [본문으로]
  6. 수잔손택이 따르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은유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은유란 어떤 사물에다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용轉用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7. 2015, 미스핏츠, 청년, 난민 되다 : 미스핏츠 동아시아 청년 주거 탐사 르포르타주. [본문으로]
  8. 난민-무슬림-테러범이 상호 교차적으로 대리-보충된 의미로 사용된다. [본문으로]
  9. 수잔손택은 ‘은유의 결과’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쓴다. “암을 앓은 경험을 뭔가 추한 것으로 변모시키는 은유의 함정이 뭔가 실제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나는 다소 우울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139).” [본문으로]
  10. 서경식, 2006, 난민과 국민사이, 204쪽 [본문으로]
  11. 물론 그 반대의 경우로서 법이 시민들의 봉기를 제한하려는 의지 역시 반복되어 왔음을 지적해 두어야한다. 진태원, 2013, 무정부주의적 시민성?, 서강인문논총, 76쪽 [본문으로]
  12. 마셜에 따르면 시민권의 역사는 (1) 18세기의 공민권 내지 개인적 시민권(사유재산, 신체의 자유, 계약체결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 종교의 자유, 법 앞에서의 평등), (2) 19세기의 정치권(선거권, 피선거권 등) (3) 20세기에는 사회권(교육, 사회적 서비스 등)으로서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서로에 대해 개별적 권리들이라기보다 발리바르의 표현처럼 보완적인 권리들, 보충적인 기본권들이다. [본문으로]
  13. 발리바르-진태원 역, 정치체에 대한 권리, 후마니타스, pp. 135-6 [본문으로]
  14. 위의 책, p. 136 [본문으로]
  15. 물론 국가의 외국인 정책, 시민권의 부여는 각 국가와 사회의 문화와 경제적 상황 등에 따라 상이할 수에서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본문으로]
  16. 관trans은 물리적인 국경을 넘는, 포스트 국민주의적인 발상이라기보다 국민국가의 내적 모순을 개조하고 지양하는 것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국가 내지는 헌정의 구성을 추구하려는 발리바르의 개념이다. 즉 국민적 시민권의 한계인 국민적-인종적 경계를 넘어선 시민권의 기획인 것이다(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에 수록된 진태원의 ‘용어해설’을 참고). [본문으로]
  17.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783226.html#csidxf25ee66938f9d059cd145 a51b094e13, 독일에서도 이와 같은 시민들의 연대가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말과활, 11호, 위기의 유럽 : 이민, 난민, 계급구성, 후-식민지적 자본주의를 참고. [본문으로]
  18. 동료시민이라는 표현은 장훈교를 통해 배우고 익혔다. http://www.usjournal.kr/News/77511 [본문으로]
  19.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2016년 12월 31일 기준) 2016년 난민지위신청자는 7,542명이었으며 그 중 난민지위를 인정받은 난민은 98명뿐이다. 이는 난민인권센터의 고은지활동가에 따르면 2017년 3월 기준 한국 인구 대비 난민 수는 77,000명 중 1명에 해당된다. http://nancen.org/1598 참고. [본문으로]
  20. 여성정책연구원, 2015, 한국체류여성난민의 인권실태에 관한 연구, 72-77 [본문으로]
  21.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1 ,539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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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난민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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