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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Activities/활동가이야기

4월 활동가이야기


 

 

류은지

화성에 있는 O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왜 와서 자신을 만나주지 않냐는 물음에 바빠서 가지 못하고 있으며 언제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답했습니다. O는 여기서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몇 년째 화성에 구금되어 있는 O는 심사를 거쳤지만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다시 심사를 받더라도 난민으로 인정받지는 못할 것이고,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화성에서 나올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이럴 땐 헛된 희망을 품지 않도록, 그리하여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새로운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더 단호하게 말해야 합니다.


“아니, 나갈 수 있는 희망은 없어.”
“화성에서 나가는 난민들을 본 적 있는 걸.”
“아마 많이 아파서 일시보호해제를 받은 걸 거야.”
“아니야. 아프지 않은데 나간 사람들도 있었어.”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설령 일시보호해제를 받아서 나갈 수 있게 되더라도 보증금을 몇백만원씩이나 내야 하는 걸. 그 돈을 마련 할 길도 없잖아. 다른 나라로 가는 건 어때?"
"다른 나라? 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걸. 거기 가서 어떻게 살라구."
"감옥에서 이렇게 인생을 허비하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 화성에서 나올 수 있는 가능성도, 희망도 없다구."


There is no hope. There is no possibility. 
그의 마음에 내리꽂았던 문장들이 그대로 튀어나와 제게도 박힙니다.

'넌 희망이 없어. 아무 가능성도 없다고.'

 

 

이슬

소송중인 난민 A님에게는 초조와 불안으로 가득했던 4월. 절차가 꼬여 진행중이었던 소송이 취소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이 소송뿐인 A님은 많이 울고 또 울었습니다. 늘 저의 안부를 먼저 묻고, 자신의 안부를 먼저 전하며 미소로 이런저런 일들을 하시던 분인데, 슬퍼하시는 낯선 모습에 저도 마음이 안좋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은 전화로 사건이 왜 이렇게 된 건지, 전임자와는 이런 문제가 없었는데 왜 이렇게 된 건지, 정말 이렇게 끝나버리면 어떻게 책임질건지 많이 화를 내셨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건 일단 기다리는 것 뿐이고, 이러저러 말하려면 할말이 많았지만 ‘이분이 얼마나 답답하면’ 싶어서 듣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마음이 조금 안정되시고나니 “오늘도 병원에 갔는데 이 서류 저 서류 내라고 하더라, 서류 한장이 없어서 먼길을 두번을 오가고, 어딜가나 ID(외국인등록증), 어딜가나 Paper(서류), 나는 낼 거 다 냈는데….”하며 울먹이시더라고요.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요. 그냥 A님한테 이 하루가 너무 힘들었던 거예요.

 

뭐라고 적혀있는지 읽을 수도 없는 서류 한장, 카드 한장에 모든 게 달려있는 거.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도 피곤한데, 일단 존재부터 인정받으려 애써야 하는게 얼마나 고달플까. 몇 번이고 때려치고싶을 그 과정을… “기다려보자”는 간단한 말들로 이분이 모든걸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제가 무심했습니다. 할 수 있는 건 이 일을 더 명확히하는것 뿐이어서, 자원활동가를 통해 모든걸 다시 설명드리고 기다려야하는 이유와 이후에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들을 이전보다 더 자세히 적어드렸어요. 그 상황에서 제가 해야하는 건 친구같은 위로도 아니고, 나도 마음이 아프다고 전하는 것도 아니고, 이 모든일을 정확하게 전하는 것뿐이라서요. 제 어설픈 위로가 난센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근거없는 희망이 될까봐요.

 

늘 최악의 시나리오를 받아드는 사람들을 계속 보다보니, 사실 A님의 케이스가 정말로 안좋은 결말을 맞게된다고 해도 저는 무덤덤했을지 몰라요. 그런데 그래도 여전히 이 한 케이스는 한 사람의 삶이고 인생인건데요... 자꾸 좋지않은 상황에 익숙해지는 저와, 그런 상황을 처음 받아드는 난민분 사이에서 무심하게 구는것만큼 부끄러운 일은 없겠다 싶었습니다. 5월 한달은 부끄럽지 않았으면, 활동을 하는 내내 당사자의 입장에 서는 게 내 일임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이런 생각을 하며 4월을 보냅니다.

 

 

김연주

1년 4개월간 출산과 육아휴직을 다녀왔습니다. 난센에 처음 들어와 활동한 기간보다도 더 긴 시간을 떠나 있었어요. 그런데 마치 엊그제 만났던 식구처럼 난센은 항상 그 자리에서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그 마음과 그 표정과 그 몸짓들이 얼마나 감사하고 따뜻했는지 몰라요.


난센 삼실을 벗어나 있는 동안 이따금 지난 저의 난센에서의 모습들을 돌아보게 되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재작년 연말쯤, 난민으로 한국에 와서 홀로 아기를 키우고 있으신 J씨가 난센에 아기 분유 지원을 요청하셨어요. 저는 난센의 메뉴얼대로 난센에 한 번 방문해 주십사 말씀드리고 오전 시간으로 약속을 잡았어요. 그리고 약속 당일 1시간 정도 지나도 J씨가 오시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으시자 저는 '못오시나 보다' 생각하며 다음 계획된 업무를 시작하고 있었어요. 마음 한 켠 그분을 만나고자 비워둔 시간으로 여유가 생겨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그러다 조금 후 그 분이 난센에 들어오셨어요. 힘겹게 1살도 안된 아기를 안고, 4살 된 아기 손을 잡고 한 손에는 한짐 가득 들고 "손이 없어 전화를 못 받았어요. 늦어서 미안해요" 하시면서요. 그때 저는 겉으로는 웃으면서, "아니에요,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말씀 드리면서도 속으로는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과 해야 할 일이 늦어지게 된 것에 대한 조급함이 뒤엉켜 있었어요. J씨는 한시간 남짓 길지 않은 상담을 마치고 다시 아이들과 짐을 챙겨 그 길을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휴직기간에 아기를 데리고 처음 지하철을 타고 외출했던 날, 저는 문득 J씨와 그 날의 제가 떠올랐습니다. 출근길 빽빽히 선 사람들 속에서 홀로 이질적인 존재임을 느끼며 눈치를 보고, 아기가 답답해서 울때마다 내려서 달래고 타기를 반복하였는데, 어린 아기 둘을 데리고 아침 일찍 지하철을 타고 서울 북쪽 끝 난센까지 2-3시간이 넘는 길을 찾아 온 아기엄마 J씨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렇게 힘겹게 난센을 찾아온 건 난센의 도움이 꼭 필요해서 였을텐데 나는 난센을 찾아 온 사람들을 진심으로 환영하였는지, 난센을 찾는 사람들의 절실함을 너무 가볍게 여겼던 것은 아니었을지.. 부끄럽고 미안했습니다.


여전히 본국을 떠나 낯선 땅 한국에 도착해 아무 기반 없이 삶을 꾸려가시는 난민들의 일상 속에 얼마나 고되고 힘든 일들이 많은지 저는 절대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한국을, 그리고 난센을 찾아 온 그 분들께 정성을 다해 "당신을 환영합니다"라고 맞이할 수 있는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난센이 그 분들에게 작은 위로와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래요. 우리가 삼실에서 보내는 하루가 '일'이 아니라 '난민인권 활동'이 될 수 있게, 그리고 난센의 활동이 '케이스 조력'이기 보다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 것'이 될 수 있도록 조금 더 노력하겠습니다 :)

 

 

고은지

총회자료집에 적었던 소감과 다짐을 다시 한 번 이곳에 나눕니다.

 

총회보고서를 준비하며 지난 한 해 동안 난센 곁을 지켜주셨던 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피부로 느꼈습니다. 보고서에 담기지 않은 수많은 이름과 얼굴들 또한 파노라마처럼 마음 속 상영관에 비추어봅니다. 스치듯 머물다 간 이들에게, 진~하게 함께 했던 이들에게도 난센이 마음 한구석 꿈틀대는 기억으로 남아있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여정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우리가 난센에 모여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상황은 어려워져 갑니다. 여전히 풀어갈 문제가 산재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니까 우리가 더 잘 모여야겠습니다.

 

함께 발하고 칠해갈 난센만의 색이 기대됩니다. 내딛는 발자국들이 모여 씨앗이 되고 풍성이 자라날 2017년을 꿈꾸어봅니다.

 

올 한해도 난센에서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함께 춤추듯 싸워나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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