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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Activities/활동가이야기

9월 활동가이야기



이슬


두리안의 나라 태국....(순전히 주관적인 정의)


태국 출입국구금시설 문 앞에서 "Good Guys In, Bad Guys Out"이라는 노골적인 문구를 봤습니다. 정부방침에 따라 "Good guy"가 되기도하고 "Bad guy"가 되기도 하는 삶이 참 묘하고, 외국인이라는 건 유동적인 기준에 따라 이렇게 될수도 저렇게 될수도 있는 존재란걸 새삼 또 느꼈습니다. "나쁜 사람이 감옥에 가는거야."라고 단순하게 배워온 것과 제가 사는 세상은 참 다릅니다.


버마와 국경을 맞댄 메솟지역에는 국경을 넘어 태국에 온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이들을 돕는 단체들에 방문할 때 난민캠프출신 버마청년이 통역을 맡아주었습니다. 캠프를 나와 학교를 다니고, 버마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의 선생님으로 일하면서 대학진학을 앞두고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그와 오며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꿈과 미래에 대한 계획을 들으면서 기분이 묘했습니다. 그가 한국에 와서 난민신청했더라면 저는 난민신청 사유외의 그의 모습을 보지못했을 것 같고, 그가 한국에 와서 일을 했다면 저는 그가 피부색이 다른 노동자라는 것 외에 다른 모습을 보지 못했을 것 같아서요.


뭐라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는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난민,외국인,이주노동자 등의 단순한 이름으로 씌워지는 껍질이 너무 단단해서, 그것을 벗기고 그 사람을 온전히 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한국에서는 취업비자로 입국했다가 난민신청하는 사람은 으레 그 '순수성'을 의심받고 조금이라도 경제적 이유가 있는 난민신청은 거절당하기 일쑤인데, 사실 생각해보면 난민과 이주노동자의 경계가 모호하고, 경제활동이 인간 삶에 중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때에 따라 삶의 어느 부분을 부정해야하거나 부정당하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난민캠프에 머무는 사람은 난민, 난민 요건을 갖췄더라도 캠프를 나와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은 이주노동자로 분류되는 메솟에서 많은 단체들이 이 구분을 넘어 일하는 것을 보고왔습니다. 두리안만큼 좋은 시간이었어요. 저도 제가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야지. 생각하게됩니다. 



류은지


2주 동안 태국에 다녀왔습니다. 아태난민권리네트워크(APRRN)에서 진행하는 회의에 참석하고 방콕이민수용소에 갔다가, 태국·미얀마 국경지대인 메솟에서 활동하는 단체들을 방문했습니다. 일본, 대만, 스리랑카, 호주, 미얀마 등 다양한 국적의 활동가들과 함께 심리, 청소년, 여성, 법률지원 등 수많은 이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새로운 이슈들을 배우는 게 재밌으면서도 마음이 한켠이 무거웠습니다. 해야 할 일은 많고 가야 할 길이 먼데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배운 것들을 살아내야 할까 부담이 됐습니다.


스리랑카 난민들을 만나고자 방문했던 방콕이민수용소 면회실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수감자와 면회신청자 120명 정도가 한 공간에 모여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지르며 상대방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 곳에 있는 난민들은 UN난민기구로부터 난민인정을 받아도 체류자격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한 방에 17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수감되어 있지만 화장실은 단 두 개밖에 없고, 아파도 병원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가 없을 정도로 처우가 열악했습니다. 한 난민은 6년이라는 긴 시간을 이 곳에서 지내왔다고 했습니다.


철망 너머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지극히 작은 한 사람이 온 우주와 같다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태국에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이슈를 배웠지만, 제가 머물러야 할 곳은 다시 일상, 지극히 작은 사람들의 곁이었습니다. 제가 할 일은 이슈를 찾아다니며 지적인 만족을 얻는 게 아니라, 얼굴을 가진 한 사람을 만나 더 나은 이야기를 함께 써 나가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아 답답할지라도 언제나 남는 것은 사람이라는 것을 믿으며, 좋은 사람들과 함께 좋은 것을 나누며 지극히 작은 저의 자리를 감당하고 싶습니다. 



이다은


메솟의 첫인상은 솔직하였습니다. 땅에 맞닿아 있는 것들이 온통 푸른색으로 물들었고 티없이 맑은 하늘은 마치 말간 아해의 얼굴같았습니다. 메솟의 이주학교(Migrant school)에는 아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합니다. 방실방실 동그란 웃음이 호수에 빗물이 퍼지듯 제 마음에 물듭니다. 아해들이 웃을 때마다 보여주는 하얀 미소안에 희망이 빛나고, 까만 눈동자에 호기심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버마어 또는 카렌어로 저들끼리 재잘재잘 거리며 뛰노는 모습이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러다가도 문득 이 중 수많은 아이들에게 부모가 없고 여러 종류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면 너무나 끔찍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학교를 다닐 수가 있겠지요. 태국에서 오랜기간 활동한 어느 활동가의 말처럼 느리지만 조금씩 변화하는 아이들 덕분에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메솟의 아침은 닭 울음소리와 함께 (강제로) 시작합니다. 화장실을 포함한 곳곳에는 부끄럼많은 도마뱀이 벽에 붙어있고, 숙소 문을 열고 나가면 제 키보다 훌쩍 큰 이름모를 나무가 있습니다. 저녁에는 늑대울음소리 같은 동네 개소리(!)가 들리고 침대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창가로 스며드는 빛과 바람이 벽의 풍경을 시시각각 변화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가 그친 후 밖에 나가면 풀과 흙냄새로 가득한 공기를 담뿍 들이마실 수 있고, 비를 피해 숨어있던 달팽이도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별로 달갑지 않은 크고 까만 산모기도 만날 수가 있지요. 제 주변의 작은 것들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감사하였습니다.


조금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이들을 만나고 활동을 돌아보고, 고민을 하고 또 새로운 고민거리를 안고 갑니다. 단순히 골치아픈 고민거리가 아니라 건강한 고민거리이기에 기쁜 마음으로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밍글라바~~!

 

오늘의 선곡은 Sing Street_Up(Bedroom Mix)

 

 

 

 

 

고은지

 

 

활동하며 가장 많이 듣는 말이기도 하지만,

가장 이해가 안되는 말이 있습니다.

 

'난민신청 제도를 남용하는 자들을 걸러낸다'

'거짓 난민신청'

'5분만 보면 이 사람이 난민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활동가(사람)마다 관점이 다를 수 밖에 없겠지만,

위와 같은 이야기들은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관점입니다.

 

지난 5년을 돌아보면.. 안, 밖으로 이러한 관점에 맞서 싸워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입니다.

 

'가짜 난민'이 연원하는 곳은 어디일까요?

난민을 '돕겠다'는 꿈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의 언어 속에서

자주 '가짜', '진짜', '남용'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게 됩니다.

또 난민을 대할 때 자신을 '신격화' 하는 이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가짜'와 '진짜'를 가려낼 수 있다는 관점 자체가

이미 스스로를 '신'의 위치에 두고 사람들을 대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역사를 거슬러 오르면, '난민'으로 명명되고 분류되어져야만 했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난민'으로 분류되어져 권리를 되찾아야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누가', '어떻게', '왜'

끊임없이 난민으로 분류되어져야만 하는지 질문하지 않은채,

'가짜'와 '진짜'를 마음대로 판단하고 이야기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 난민을 '돕겠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에서요.

 

난민제도에 의해 난민지위를 인정받고 보호 받을 사람들은 보호받을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이 난민 제도를 통해 자신의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두가 난민제도를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다만 세계인권선언에 따라서 누구든 비호를 신청할 권리가 있는 것이고

그에 따른 공정한 심사를 받기만 하면 결과는 제도에 의해서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들의 언어는 누군가에게 처음부터 '가짜'로 의심 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가짜가 되는 것일까요)

이 사람들이 가짜인지 진짜인지는 활동가가 판단할 몫이 아니고, 판단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활동가는 이들이 누려야할 권리(난민신청을 할 권리, 신청에 대한 심사를 잘 받을 권리, 과정과 이후에 보장되어야 할 삶에 수반되는 다양한 권리 등)가 잘 보장될 수 있도록 과정을 지켜보고, 빈공간이 생겼을 때 뛰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2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난센을 찾아오는 별님(가명)이 있습니다.

그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From the bottom of my heart, there are no words"

난센을 생각하면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울컥했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엉엉 울고 싶어졌어요.

왜냐하면 별님이 겪었던 숱한 문제들에

사실상 난센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문제를 해결했던 때는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별님의 이야기를 듣고, 들었을 뿐이었어요.

 

그런 난센에게 별님은 이렇게 이야기해주셨습니다.

"난센이 나와 우리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고 있다는 것을 안다.

다만 우리의 상황을 매번 공유할 뿐이다.

나는 대한민국 어디에 가도 나를 이렇게까지 믿어주고 존중해주는 곳을 찾지 못했다."

 

 

그 어떤 경우더라도 활동가는 난민을 신뢰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난민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앗아가는 이 사회에 대항하여 

난민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모이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소리들이 모이고 모여

세상에 균열을 낼 수 있도록


최준


(태국 방콕에 위치한 외국인 보호소 방문 후 작성한 '생각정리'입니다)

보호소에 구금된 사람들과 나는 만나기 전까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도 그들과 헤어지는 과정에서 내 어머니에게 느꼈던 감정이 생각난 이유는 무엇일까? 고작 한 시간 만나 몇 마디를 나눈 우리의 관계를 나와 어머니의 관계에 비교하는 것은 분명히 과장이겠지만 그때의 감정이 잠시 기억난 이유는 헤어짐이 주는 복잡하고도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때는 한국으로 돌아가시는 어머니를 공항에서 배웅해 드리던 날이었다. 몇 달 후에 또 만나겠지만, 게이트를 지나치시는 어머니께 작별인사를 드릴 때 헤어짐에서 오는 슬픈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그때 그 감정이 오랜만에 떠올랐다.


나는 출국장으로 들어가시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고 내 갈 길로 돌아서는 그때에 그 감정을 느꼈고, 이번엔 나를 보내며 나의 뒷모습을 봐야 하는 그들의 웃는 얼굴에서 돌아설 때 그 감정을 느꼈다. 과장된 감정이라 생각이 들면서도 어머니가 기억이 난 것은 아마도 그들이 겪었고 또 겪어야 하는 수많은 헤어짐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일 것이다.


헤어짐의 경험은 누구에게는 '이별'이었고, 누구에게는 '떠나보내기'나 '잊기'였고, 누구에게는 '새로움을 기약'하는 것이다. 나는 보호소에서 만난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없겠지만 혹 만나게 된다면 더 나은 모습으로 좋은 곳에서 만나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기약했다. 사실 헤어짐은 언제나 내 가까이 있다. 나는 매일 누군가 그렇게 원했던 현재와 수시로 헤어짐을 반복한다. 미래에 있을 후회 없는 헤어짐을 맞이하기 위해 그렇게 또 헤어짐을 연습했다.



김지예

 

본국의 박해를 피해 2개국을 거쳐 겨우 한국에 들어온 난민 브라운(가명). 지독했던 시간들을 지나 2009년난민인정을 받은 이후로 7년 넘게 한국에서 삶을 살아온 브라운씨는 귀화신청을 위해 얼마 전 난센에 방문해주셨습니다.

 

미스터 김~ 잘 지냈어?”

오호호 브라운!”

 

브라운씨는 난센과는 이미 난민인정을 받기 전 보호소에 있을 때부터 관계가 있던 터라 김성인 전 사무국장님과는 아주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처음 만난 이 어설프고 수상한 한 활동가에게도 큰 함박미소로 말을 걸어 주었습니다. 그리곤 우리는 오후 시간 한나절을 귀화 신청에 필요한 복잡한 서류들과 한참을 실랑이 하며 보냈습니다. 이 내용을 써야 하니 마니 한참을 고민하고 전화를 걸고 다시 종이를 들었다 놨다 이해가 안가는 글자를 들여다 보다가 꾸역 꾸역 마무리를 짓고 난센에서 준비한 추천서가 완성되면 다시 연락을 드리겠다며 그렇게 그날 브라운씨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며칠이 지나고 필요한 서류가 준비 되었으니 사무실에 방문해 달라는 말을 전하려 연락처를 찾던 중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안녕 브라운, 잘 지냈어?”

어 잘 지냈지 너는 어떻게 지냈어? 너가 그 때 날 도와준 그 사람인가?”

응 맞아 내가 그 때 함께 서류 준비했던 지예야

아 맞네~ 너무 반가워 지예!”

응 진짜 반가워 브라운. 다름이 아니라 서류가 준비되었으니 네가 가능할 때 와서 찾아가면 돼. 근데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

응 물론이지 뭔데?”

있잖아 혹시 브라운이 이름이 아니라 가족 성인거 아니야?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 브라운이길래..

맞아 사실 브라운은 내 이름이 아니라 성이야

엇 그럼 이름은 여기 적힌 앤..드류(가명)가 이름인건가? 그럼 앞으로 내가 널 앤드류라고 불러도 괜찮을까? 사람들은 너를 어떻게 불러?”

.. 사실 그게.. 앤드류가 내 이름 맞아. 근데 사실 사람들은 나를 앤디라고 불러. 앤디가 별명이야

우와 진짜? 정말 어울려. 그럼 나도 앞으로 너를 앤디라고 불러도 괜찮아?”

아 물론이지. 물론이고 말고. 정말 환영해

아 그럼 앤디 준비되면 오기 전에 연락한 번 주고 와줘 고마워 안녕

 

난민이라는 너무나 큰 의제들과 산재한 문제들 그리고 높은 벽을 드리운 현실 아래에서 이리저리 휩쓸리고 흔들리고 낙담하느라 사실은 가장 작지만 절대 사소하지 않은 것들을 쉽게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난민의 이름이 그러한 것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난민의 이름은 사실 어렵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영어권 이름이 아닌 생소한 낯선 언어로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2단어, 3단어, 심지어 5단어로까지 이루어진 이름도 있으며 어느 것이 이름이고 어느 것이 성인지 이름만 보아도 당황스러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먼저 밝혀올 경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서류상으로 먼저 알게 된 이들을 추후에 대할 때면 종종 이름 중 가장 나에게 익숙하고 쉬운 단어를 골라 상대를 부르곤 합니다. 뭐라고 불러야 할 지 물어보지 않습니다. 그리곤 그 이름을 통해 그를 기억하고 그가 나를 고쳐주지 않으면 나는 몇 번이고 몇 달이고 같은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그게 기억하기 편하니까요. 즉 나는 지금까지 그들이 불리고 싶은 이름으로 그들을 부른 것이 아닌 내가 부르고 싶은, 내가 그들이 불려야 할 이름을 지정해주었던 것입니다.

 

김춘수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무의미했던 존재의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주체와 대상은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연결된 것이지요. 하지만 단순히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에서 더 나아가 상대가 원하는 이름으로 상대를 부른다는 것은 보다 정성을 다해 이름을 부른다는 것, 온 마음을 다해 상대와 마주한다는 것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호명 받는 이는 자신이 원하는 이름으로 불림으로서 스스로가 존엄성을 지닌 자로 깨어나, 자기완결적 존재로 회복될 힘을 얻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름을 물어보고 애칭으로 불러주었을 때 너무나 기뻐하던 그 목소리의 떨림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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